1935년 1월 15일. 기온은 18도에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겨울 날씨가 계속 되는 하루. 이렇게 날이 흐리고 번거롭게 비까지 오는 날, 일제시기 타이완의 유명 가문 중 하나인 타이중 우펑 린가의 린셴탕(林獻堂) 선생은 자신이 거주하던 우펑에서 타이중 시내까지 가 건강 검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 시내 경찰 부서 내의 의사를 찾아간 것은 결코 린 선생의 자발적인 움직임은 아니었습니다. 린셴탕 선생에게 일본 황실은 ‘기침을 하고 절대 콧물을 흘려서는 안 된다’, ‘외관은 둘째 치더라도 바이러스와 세균이 전염되는 죄악은 용서할 수 없다’ 등을 이유로 린셴탕에게 검진을 하게 한 것입니다. 왜일까요? 린셴탕 선생에게 며칠 후 조선의 왕조인 ‘이왕(李王)’을 만나보라는 미션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왕’은 조선 이씨 왕조의 일본식 표현으로, 대한제국이 1910년 한일합병으로 멸망한 후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 황실을 일본 황실의 일부로 편입하기 위해 만든 지위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타이완의 유지 린셴탕이 만나야 하는 ‘이왕’은 대한제국 황실을 이은 의민태자 이은(懿愍太子 李垠, 1897-1970)이었죠.
1897년 고종의 아들로 태어난 이은은 한일합병이 있기 3년 전인 1907년, 열 살 도 채 되지 않았던 어린 나이에 당시 초대 통감부 수장인 이토 히로부미에게 끌려가 일본에서 공부 해야했습니다. 일본 막부 시대 때 대장군이 각 번의 성주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소주들을 에도(지금의 도쿄)에 거주시켜 인질로 삼은 것처럼,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이은도 도쿄로 끌려가 일본 황실의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梨本宮守正王)의 장녀와 결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한국인들도 잘 알고 있는 이방자(李方子, 1901-1989)입니다.
일본 황족의 식민지 타이완 시찰 역사를 정리한 천웨이한(陳煒翰)의 연구에 따르면, 타이완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후 1901년 일본 황실의 첫 방문을 시작으로 1945년까지 일본 황실 11궁의 총 27명이 타이완을 방문, 총 34 차례의 호화 여행을 즐겼다고 합니다. 이미 일본 황실 소속이 된 대한제국 황실 이은도 바로 여기에 포함됩니다.
이은은 타이완을 방문한 일본 황실 소속의 열두 번째 인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유일하게 일본인 혈통이 아닌 신분으로 타이완을 방문한 일본 황실 소속 인물이었죠. 평소 난초 재배를 좋아했다던 이은은 두 차례 타이완을 방문했습니다.
<타이완총독부 관보>에 따르면, 그의 첫 타이완 방문은 1935년 1월 24일 목요일. 한창 겨울 날씨를 띄던 타이난으로 이은이 차를 몰고 방문했습니다. 이곳에서 근무하는 장교와 군인들을 위문하고 군대를 사열하는 업무를 마친 이은은 타이난 보병 제2연대(현, 타이난 청공대학 광복 캠퍼스)를 방문해 점심을 먹었는데요. 바로 이 자리에 린셴탕 선생도 참여했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곳을 방문한 일본 황실 사람들은 부대 안 롱위안(榕園)에서 나무를 심었는데, 이은도 그에 따라 이곳에 나무를 심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현재에는 그 나무를 찾아볼 수 없지만 말이죠.

<타이완총독부 관보> 1935년 1월 타이완총독부보 제2289기에 기록된 이은의 타이난 방문 기록. - 출처: 국사관 타이완문헌관
당시 일본 황실에는 ‘궁(宮)’이라고 할 것이 몇 개 없었던 데다가 인원 수도 적었습니다. 그럼에도 대한제국의 왕조, 이왕은 이족으로 일본 황실 성원으로 들어갔고, 1926년에 순종이 승하하자 이은은 왕위를 계승하여 제2대 창덕궁 이왕이 되었습니다. 이를 두고 일제시기를 연구하는 타이완의 역사학자들은 한국과 타이완 모두 일본의 식민지였지만, 일본이 조선을 통치하는 데 쓰는 방식은 타이완과는 현저히 다르게 매우 심열을 기울였다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일제시기 식민지 타이완에 사는 그 어떤 타이완인도 일본 황실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심지어 일본은 타이완에 남작이나 자작과 같은 귀족 신분 하나조차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삼았음에도 한국을 상당히 '배려'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당시 한국에 살았던 일반 국민의 입장에서 보면, 일제강점기는 원래 우리의 왕조와 영토에 뿌리는 둔 나라가 일본에 합병당한 뼈아픈 망국의 한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반면, 타이완 섬에서 청나라 황제는 상당히 먼 곳에 있었기 때문에, ‘국멸’이랄 것도 없이 한순간에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해 나타난 당시의 집단 정서는 일종의 ‘버려진 고아’의 분노가 가장 강렬하였다고 타이완 학자들은 평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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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에 대항하는 한국과 타이완의 방식도 달랐습니다.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으로 파견된 지 3년 만에 안중근 독립운동가에게 암살당하고 말았죠. 이후 황태자까지 암살하는 데는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조선인의 항일운동은 타이완이 비교적 온건한 방식, 즉 글을 쓰고 기를 흔드는 것과는 달리, 무기와 무력을 동반한 암살 작전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1932년, 한인애국단원이었던 이봉창은 사쿠라다문에서 쇼와 천황의 차량 행렬에 수류탄을 던졌고, 3개월 후 25세의 윤봉길은 중국 상하이에서 긴 외투를 입고 천황의 생일을 축하하는 홍커우공원에서 ‘기미가요(君が代)’를 부르는 찰나에 폭탄을 던져 적지 않은 수의 일본 대장과 중장이 죽거나 눈이 멀고 다리가 부러지는 등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중대한 암살 사건, 즉 독립운동은 타이완에서도 일어났습니다. 타이완인이 아닌, 바로 조선 황해도 출신으로 한국에서 건너 온 찻집 직원 조명하(趙明河)씨에 의해서 말이죠. 조명하씨의 구니요시 왕 암살 사건은 지난 5월 7일 ‘식민지 타이완을 방문한 두 명의 조선인’ 시간에서도 간략히 소개해 드린 바 있죠.
쇼와 3년인 1928년 5월에 타이완을 방문한 구니노미야 구니요시 왕(久邇宮邦彦王, 1873-1929)의 암살을 위해 그는 타이중에서 잠복 중이었습니다. 5월 14일 아침, 타이중 지역 순시를 마친 구니요시 왕이 타이베이로 돌아가려는 찰나, 오전 9시 50분쯤에 그를 태운 차량이 타이중 주립도서관 앞 큰길을 지나고 있었고, 양 옆 가로수 아래롤 환송 인파가 붐비고 있는 상황에서 초등학생 무리 뒤에서 조명하는 ‘부귀한 정원 찻집’이란 글자가 쓰여있는 ‘핫피(法被, 당시 일본 직공들이 입던 옷)’를 입고 숨어있었습니다.
조명하는 구니요시 왕이 탄 차 뒤로 돌진해 오른손에 쥐고 있던 독이 묻은 칼을 앞으로 꺼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암살은 성공하지 못한 채 타이완 국적 경찰에게 붙잡히고 말았고, 이 사건은 한 두 차례의 칼바람과 함께 몇 초 사이에 막을 내렸고, 그는 몇 달 뒤 암살 사건으로 타이베이에서 사형선고를 당하는 비극을 맞이하고 말았죠.
일본 황실 구성원의 신분으로 타이난을 방문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이은, 그리고 타이중에서 일본 황실 구니요시 왕의 암살을 시도한 독립운동가 조명하. 이 두 인물은 같은 일본 제국 하의 식민지였던 한국의 상황이 타이완과는 얼마나 달랐는지, 피식민자로서 일본 제국에 대항하는 방식이 얼마나 달랐는지를 명백하게 보여준다고 타이완 학자들은 이야기합니다.
►참고자료
<타이완총독부 관보> 쇼와 10년 1월 타이완총독부보 제2289기, 1935년 1월 10일.
陳煒翰 《日本皇族的臺灣行旅:蓬萊仙島菊花香》2014.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Rti 중앙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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