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완광복기념가를 비롯해, 타이완과 관련된 다양한 창작곡을 남긴 타이완의 서양음악 1세대 작곡가 천스즈. 지난주 대만주간신보 시간부터 천스즈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 갖고 있는데요. 이번주에도 이어서 그의 인생 후반부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 갖도록 하겠습니다.
1934년 천스즈를 포함해 일본에 유학 중인 타이완 음악 유학생들이 타이완 본토에서 개최한 ‘향토음악회’는 당시관객들의 상당한 호응을 받았습니다. 8월 한여름에 열린 향토음악회는 공회당 내부가 더운 열기로 가득해 무대 앞에 얼음 덩어리를 여러 개 놓고 진행했어야 할 만큼 무더운 날씨 속에서 진행했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타이완 북부, 중부, 남부 할 것 없이 모든 도시 마다 관객석은 만석이었죠. 일제시대 서양음악을 연주하는 타이완 음악가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지지와 응원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음악회를 통해 타이완 언론계로부터 주목을 받게 된 천스즈는 당시 타이베이 신공원에 위치한 타이베이 방송국(JFAK)으로부터도 여러 초대를 받아 피아노를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타이완 최초의 성악 합창곡 작곡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 천스즈. 1936년 일본 이즈 반도(伊豆半島)에서 휴가를 보내던 그는 타이완 최초의 합창곡을 완성했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어린 양(上帝的羔羊)>인데요. 기독교인이었던 천스즈는 일본 이즈 반도의 해변가를 보고 성경의 한 장면을 떠올리며 이 작품을 썼다고 하는데요. 당시 일본에서 훈련 받은 서양음악 기교를 갖고 타이완 최초의 합창곡을 완성하기에 이릅니다. 이 작품은 6년 뒤인 1942년 타이베이 공회당(지금의 타이베이 중산당)에서 초연되었는데, 이때 천스즈는 쐉롄(雙連), 멍자(艋舺), 다다오청(大稻埕)의 3개 교회 연합으로 구성된 합창단, ‘삼일성영단(三一聖詠團)’을 이끌며 직접 지휘해 무대를 꾸몄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43년 타이베이 중산에 위치한 한 장로교회(지금의 중산장로교회)에서 재공연된 <하느님의 어린 양>은 동시대 성악가 뤼취안성(呂泉生)이 독창을 맡기도 했습니다. 이 당시는 2차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중일 때라 일본의 식민지였던 타이완도 미군의 폭격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시기였는데요. 그래서인지 이 날 공연은 교회의 불을 모두 끄고 커튼을 쳐 밖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 전혀 알 수 없게 만든 상태에서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귀국 후 교회 전도사로… 피아노 소품 ‘타이완 스케치' 작곡
천스즈는 1937년 학업을 마치고 귀국한 뒤 1946년까지 타이베이 스린장로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했습니다. 같은 해 28살의 나이에 기독교 가정 출신의 류단메이(劉淡梅, 먀오리 출신 류아슈 목사의 차녀)와 결혼도 했죠. 류 씨도 천스즈와 같이 단수이여학교에서 수학한 후 일본으로 유학해 유아교육을 공부하고 타이완에 돌아온 인재였습니다. 류 씨는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그리고 어린 아이들이 모여있는 유치원에서도 솔선수범하는 온화하고 다정한 여성이었습니다. 그러했기에 천스즈도 더욱 안심하고 작곡에 임할 수 있었다고 사람들은 평가합니다.
1939년 천스즈는 <타이완 스케치(台灣素描, Formosan Sketch)>를 작곡합니다. 총 10곡의 피아노 독주곡으로 구성된 이 모음집은 타이완 최초의 피아노 모음곡(piano suite)이죠. 이 작품은 천스즈가 귀국 후 처음으로 타이완 섬 전체를 여행하는 ‘환도(環島)' 기차 여행에서 본 타이완의 풍경을 보고 영감을 받아 탄생된 곡입니다. 기차역에 하나씩 하나씩 들를 때마다 천스즈는 창문 넘어로 보이는 타이완 각 지역의 풍경을 오선보로 옮겨 적었고, 그렇게 타이베이로 다시 돌아오기 전까지 총 10곡의 작품을 스케치했던 것입니다. 서양 음악 기법 사용해 타이완의 주제들을 녹여내는 능력이 탁월했던 그이지요.
1946년 타이완광복기념가 작곡
1940년대에 들어서도 천스즈의 활약은 계속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일본이 타이완에서 물러났고, 중국에 있던 국민정부가 타이완 섬으로 오자 천스즈를 비롯한 많은 젊은 타이완인들은 지룽(基隆) 항구에서 국민정부를 환영하는 행사에 참여했습니다. 당시 국민정부에 대한 많은 희망과 기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1946년 천스즈는 타이완문화협회(台灣文化協會)의 음악위원회 위원을 맡습니다. 이 때 교육부의 부탁을 받아 <타이완광복기념가>라는 노래를 만들게 되었는데요. 일본 유학 후 천스즈가 타이완에서 몇 년 간 교육계에 종사하고 있는던 데다가, 당시 천스즈를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로 음악계에서 왕성하게 활동을 하고 있었던 시기인만큼, 교육부는 단연 천 씨에게 창작을 부탁했었죠.
타이완 광복 이듬해인 1946년에 쓰인 <타이완광복기념가>는 강한 민족풍과 애향심이 드러나는 노래로, 악보와 가사가 이후 초등학교 음악 교과서와 국어 교과서에 모두 수록되어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초등학생들의 입에서 불리고 있습니다.
종교와 교육, 음악 사업에 매진하다
그로부터 얼마있지 않은 1947년 2월. 2·28사건이 발생했고, 천스즈는 아내와 아이 셋을 데리고 단수이로 이사했습니다. 2.28 사건에 이어 국민정부의 백색공포 정책이 이어지자, 초기에는 국민정부에 큰 희망을 가졌던 천스즈도 강한 불만을 드러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단수이로 그의 거처를 옮긴 뒤에도 천스즈는 음악교육을 게을리 하지 않않았습니다. 단수이여학당(淡水女學堂, Tamsui Girls' SchooI, 1884~)이 전신인 순더여학교(純德女學校)에 재직하면서 어릴적 자신의 음악을 지도해준 캐나다 선교사 이사벨 테일러(Miss Isabel Taylor, 德明利, 1909-1992)와 함께 이 학교에 음악과를 설립하고, 합창단을 만들었습니다. 당시 타이완 교육제도 하에 있는 고등학교 에서 ‘음악과’를 설립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었죠. 학교 안에는 무려 15대 이상의 피아노가 있었을 정도로 천 씨는 학생들의 음악 교육에 열정을 다했는데요. 천스즈가 1952년 순더여학교 교장으로 부임한 뒤 생긴 일입니다. 천스즈의 아들의 증언에 따르면, 천스즈는 교내 피아노 증설에도 모자라 심지어 자신의 집에 있는 피아노도 학생들이 연습할 수 있도록 내주었다고 합니다.
약 30년 간 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천스즈는 자신의 음악 공부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요. 1957년에는 캐나다 토론토 왕립음악원으로 건너가 오스카 모라베츠라는 유명 작곡가로부터 1년간 작곡을 배웠고, 1958년 타이완기독장로교회 총회의 위임을 받아 이사벨 테일러 선교사 및 다른 교회 음악가들과 함께 타이완 장로교회의 찬송가를 편집, 그리고 자신의 창작 활동도 꾸준히 이어갔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1981년 1월 23일, 학교 교장직을 퇴직한 천 씨는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그가 태어난 해가 1911년이니, 만 70세의 나이에 퇴직을 하고 제2의 삶을 위해 미국에 간 셈이죠. 적지 않은 나이에 미국으로 건너갔음에도 천 씨의 종교와 음악에 대한 애정은 식을 줄 몰랐습니다. 80에 가까운 나이에도 1990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애너하임에 오렌지카운티 기독교인단계를 설립하면서, 종교인으로서의 자신의 사명을 이어나가죠. 그로부터 얼마 있지 않은 1992년 9월 천 씨는 자신의 새 터인 캘리포니아 오렌지 카운티에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Rti 중앙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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