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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조선에 소개된 타이완 2. 1931년 <매일신보>에 연재된 ‘대만기행(臺灣紀行)'

  • 2023.04.18
대만주간신보
1931년 8월 12일자에 실린 '臺灣記行' 8 기사 - 사진: , 한국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지난 주부터 ‘식민지 조선에 소개된 타이완’ 이라는 주제로 조선의 매체에서 타이완이 어떤식으로 소개되었는지 알아보는 시간을 갖고 있는데요. 타이완에 대한 소식은 1910년대부터 당시 한국의 잡지나 신문 등의 매체에서 가끔 소개되곤 했습니다만 대부분 사건, 사고 위주의 단발적인 소식들 위주였습니다. 그래서 한국인들이 타이완에 관해 심도 깊은 정보를 알기란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다 1930년대 들어서자, 정확히는 1930년 타이완 원주민들의 대규모 항일 운동인 우서사건을 계기로 식민지 조선의 신문에서는 타이완에 관한 연재 기사들이 실리기 시작합니다. 지난 주에 이어 오늘 소개할 연재 기사는 <매일신보> 1931년 8월에 연재된 ‘대만기행(臺灣紀行)'입니다. 

‘대만기행'은 1931년 8월 2일 1편을 시작으로 같은 달 14일까지 총 열 편이 실렸습니다. 이 기사를 쓴 김혁묵(金赫默)씨는 직접 배를 타고 타이완에 가서 약 열흘 동안 지룽을 시작으로 타이베이, 타이난, 가오슝, 핑동, 타이중 등을 여행했습니다. 그가 타이완을 실제 여행한 날짜는 보도가 실리기 1년 전인 1930년 3월 중순 경으로, 겨울 옷을 입고 경성에서 출발했는데, 일본 모지(門司) 항에서 출발한 배가 50여 시간에 걸쳐 남쪽 타이완에 다다르자 여름에 부는 훈풍(薰風)이 불러오기 시작해 점차 더워지고 있다고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지룽항에 도착하자마자 기차를 타고 여섯 정거장을 지나 타이베이에 도착한 김씨는 타이베이 삼선로 큰 도로의 가로수와 타이베이 도처의 공원을 보며 감탄합니다. 김씨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 구분이 경성 모양으로 노면에 금을 그어놓은 것이 아니라 초목 무성한 남국인만큼 가로수를 심어 나무 그늘 사이로 자동차가 달림질을 하고 나무가지에 옷자락을 스쳐가며 사람이 지나간다. 더욱이 곳곳의 삼각지나 십자로에는 소공원을 꾸미고 풀과 꽃이 우거져 그야말로 먼지와 티끌에 쪼들리든 도회인의 눈에는 시가 전체가 공원 같이 보였다.”

김씨의 눈에 띈 타이베이의 또 다른 점은 바로 정자각(亭仔腳)이었습니다. 정자각이란 더위와 비를 피할 수 있도록 1층과 2층 건물 사이에 거리로 1~2미터 정도 인도변으로 나와 있는 그늘막을 의미합니다. 건물 설계부터 이렇게 신경 써 타이베이 도로를 걷는 보행객들이 더위와 비 걱정없이 서늘하게 처마 밑으로 걸어다닐 수 있게 한 것에 김씨는 감탄합니다. 

타이베이에서 김씨를 화들짝 놀라게 한 다른 한 가지는 타이완인이 직접 경영하는 대극장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바로 타이베이 시가지 대도정에 소재한 ‘영악좌(永樂座)’라는 극장입니다. 영악좌는 1924년 차 상인 천티엔라이(陳天來) 등이 자금을 조달해 지은 4층 높이의 일본식 스타일로 지은 대극장으로, 무려 1500여석이 넘는 좌석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경성에서는 조선사람이 소유한 극장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 규모 역시 경성의 단성사, 우미관, 조선극장을 합쳐야 이 극장의 한 폭 밖에는 안된다며 아쉬워했습니다. 그러면서 극을 즐길 줄 아는 타이완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문교에 진보된 민족인만큼 취미인의 소질이 품어있어 그런 것 같다. 구경을 즐기는 사람. 그것은 곧 마음의 생활이 넉넉하다는 반증일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한끼 죽거리도 가졌을 것 같지 않은데 그네들은 노지에 유유히 앉아서 극을 보여 우롱차를 맛보고 앉아있다. ” 

타이베이에서 타이완의 도시문화를 경험한 김씨는 타이완의 남부 도시인 타이난과 가오슝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김씨의 대만기행 글에서 발견한 재미있는 사실 중 하나는 그가 당시 타이완에서 성공한 조선인 사업가들을 타이베이, 타이난 등에서 직접 만나러 갔다는 사실입니다. 타이베이에서는 “타이완에서 성공한 조선사람 중 1인자”라며 한재룡(韓在龍)씨를 소개합니다. 그러면서 “왜 조선사람들은 눈을 좀 넓고 크게 뜨지 못합니까.”라며 한탄하는 한씨의 말을 전했으며, 타이난에서는 요리업에 종사하던 30대의 이영순(李榮淳)씨를, 가오슝에서는 조선인 연회에 참여해 가오슝에 사는 조선인들의 사정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당시 타이완에는 조선인이 약 1400명 가량 있었는데 대부분 인삼을 판매하는 행상이며 여성들의 경우 소위 일본의 성매매 업소인 유곽에서 타이완 남성을 상대로 일을 하고 있다고 소개합니다. 조선인 여성만 있는 유곽이 35여곳나 된다며, 남녀를 막론하고 타이완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의 넉넉치 못한 삶을 개탄하기도 합니다. 

김씨는 타이완의 대표적인 삼림지대로 유명한 핑동과 자이에도 들렀습니다. 핑동에서는 타이완제당회사를 직접 찾아가 영업부장의 이야기를 빌어 해당 제당회사의 큰 규모와 설탕 생산량을 소개합니다. 오늘날에도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일품인 자이에 들른 김씨는 아리산과 그 주변 호숫가를 지금 당장 여행을 가고 싶게 만들 정도로 매력적으로 묘사합니다. 그리고 타이베이로 향하기 전 타이완 중부의 대도시인 타이중에 들러 원주민의 항일 운동인 우서사건의 책임자였던 타이중경찰부장의 근황을 전하기도 했다. 

그는 타이완을 “우리와 같은 길을 걷는 이 땅의 이 사람들"이라고 소개하며 같은 식민지 상황에 처한 사정의 사람들에 주목하게 된 이유를 “그들의 사정을 돌아보면서 우리의 살림살이에 한 도움을 얻고자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타이완에 우서사건을 통해 조선 사회도 타이완에 주목하기 시작하고 흥미를 갖게 되었다면서 조선인으로서 타이완의 사정을 파악하는 것이 결코 쓸데없는 일은 아닐 것이라며 8번째 기행 연재 기사를 마무리합니다. 

그렇게 연재 기사가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김씨는 이틀의 지면을 더 할애해 타이완에서 자신이 보고 들었던 인상깊은 노래와 극을 소개합니다. 자신이 타이완에서 여행하던 중 가장 많이 들었다던 유행가를 시작으로, 커자인의 거자이시의 일부인 상마가(相罵歌), 대표적인 타이완의 자장가, 반딧불을 잡은 어린아이들의 동요, 원주민 노래까지 소개합니다. 아마도 타이완의 도처를 여행하며 타이완의 풍류를 즐길 수 있는 여러 극장과 기생들이 공연하는 장소에 들른 모양입니다. 김씨는 타이완에서 노래를 능숙히 부르는 기생이 모여 있는 곳을 ‘염연반’(厭煙盤)이라고 부른다며, 그 이름이 청나라 때 손님이 기생을 찾아가면 대개 첫 인사로 아편 담뱃대를 내놓아 그 연기가 자욱했기 때문이고, 현재에는 일본 총독부가 들어오면서 아편을 금지해 더 이상 아편은 할 수 없지만 그 이름만큼은 여전히 남아있다고 소개합니다. 

이곳에서 타이완의 노래를 많이 들었기 때문일까요? 그는 10편의 ‘대만기행' 연재 기사 중 마지막 세 편을 타이완의 노래를 소개하는 데 할애합니다. 앞서 소개해드린 유행가, 거자이시, 자장가, 동요 등 장르의 다양성을 갖춰 소개하는 것은 물론 그 노래의 가사까지 한자로 적고 뜻을 풀이하며 조선 사회의 독자들에게 소개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으로요.

“내가 대만에 놀던 중에 제일 많이 들은 유행가였다. 그 뜻을 들으면 두 다리가 아프도록 걸어서 머나먼 곳에서 사람을 만나려 기를 쓰고 왔거늘, 부르고 찾는 애인은 대답도 없구나. 조선에 육자배기와 비슷하다는 생각도 든다”

김씨는 타이완의 한 유행가가 조선의 육자배기와 비슷하다고 말하고, 커자(객가)인들의 거자이시 중 ‘상마가(相罵歌)'는 여러 가지의 꽃이름을 들어 서로의 사랑을 읊는 노래로 우리의 화편(花編), 즉 여창가곡인 편삭대엽과 그 방식이 유사하다고 소개합니다. 김씨가 소개한 노래의 가사를 찾아 이 노래의 제목이 무엇이며 어떻게 부르는 노래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만, 당시 김씨가 타이완의 다양한 노래를 듣고 그 유사한 특징을 조선의 노래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는 점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타이완의 다양한 노래에 감동을 받은 김씨의 심금을 절절하게 울린 노래는 원주민 노래였습니다. 그는 “이 노래를 듣고 나는 음연한 기분에 쌓였다"며 언어를 몰라 처음 들었을 때는 아무 느낌이 없었으나 너무나 목가적인 애조가 넘쳐 흘러 감탄해 그 뜻을 직접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식인종이라 지칭 받는 그들에게 이 같은 아담하고 애닲은 노래가 있을 줄은 몰랐다. 뜻을 듣고 나서 들으니 그야말로 옷깃을 적실만 하였다. 만일 사랑에 병든 가슴의 나그네가 이 노래의 비조를 듣는다면 눈물 없이는 못견딜 것이다. 번족이 가진 마음의 생애, 노래를 통해 엿보는 그들의 고귀한 율동, 그야말로 그들의 가슴에 빛나는 한 자랑이다”

마지막으로 김씨가 감탄한 원주민 노래의 가사를 소개하며 식민지 조선에 소개된 타이완 두 번째 편 1931년 8월 <매일신보>에 연재된 ‘대만기행' 소개를 마칩니다.

 

산넘고 재넘어 구름저편에

끝없는 산을 보며 다리를 쉬자

잠자는 곳 들벌판 벌레소리의

다다를 곳 물으니 아직 멀다네

자고나서 남은 목숨 잇는 날까지

나그네에 발길은 그치지 않으리

 

-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프로그램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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