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기 타이완의 교육기관은 총독부가 주도해서 설립한 관립학교들이 수량 면에서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총독부 외의 민간인이나 종교단체 등에서 설립한 ‘사립학교’도 없지 않았습니다. <대만주간신보>를 애청하시는 청취자님들이라면 이제는 낯설지 않은 ‘단수이학교(淡水學校)’가 그 대표적인 예죠. 단수이 남/여학교가 캐나다 장로교파 선교사들이 타이완으로 건너와 세운 사립학교라면, 타이베이 시내에는 스페인 가톨릭 선교사들이 세운 또 다른 사립학교가 있었습니다. 바로 1916년 설립된 정수여학교(靜修女學校)입니다.
타이완이 일본 식민 통치 하에 있던 1916년 설립된 정수여학교는 역사적 의의가 상당히 많은 학교입니다. 우선 타이완 최초의 가톨릭 학교라는 점, 둘째로 일본인과 타이완인 학생을 모두 수용한 최초의 사립학교라는 점, 마지막으로 일제강점기 타이완 자치운동의 대표적인 단체인 ‘타이완문화협회'(臺灣文化協會)’의 창립자, 장웨이수이(蔣渭水)가 1921년 첫 창립총회를 연 장소라는 점. 이러한 특징은 정수여학교가 타이완 계몽운동의 중요한 발전 과정을 목격할 수 있는 학교라는 것을 방증하는데요. 오늘 <대만주간신보> 시간에는 이와같이 다양한 역사적 의의를 가진 일제시기의 대표적인 사립학교, 정수여학교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 갖도록 하겠습니다.
* ‘타이완문화협회’ 관련 방송 다시듣기
정수여학교가 타이완에 어떻게 설립되었나 살펴보려면, 두 가지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우선 인지해야 합니다. 하나는 타이완에 가톨릭이 언제부터 들어오기 시작했는지, 다른 하나는 일제시기 총독부가 타이완의 여학교, 특히 사립 여학교에 대한 정책이 어떠했는지 입니다.
천주교, 타이완에 입성하다
가톨릭, 천주교가 타이완에 들어온 것은 일제시기보다 200여 년 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한국에서는 조선 중기 실학자들에 의해 서학의 한 종류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임진왜란 때 이미 카스티야 왕국(현 스페인) 출신 신부가 조선 땅에 온 적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16세기에서 17세기 무렵이죠. 타이완에서도 가톨릭이 가장 처음 들어온 시기는 17세기 초반으로, 정확히는 1626년 스페인 도미니코회에서 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때 스페인 선교사들은 타이완 북부인 지룽, 타이베이, 단수이, 베이터우, 이란 등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벌였고, 20년도 채 못 가 타이난에서 북상하는 네덜란드인들에 의해 타이완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그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1859년 스페인 도미니코회는 타이완에 다시 들어옵니다. 이때는 가오슝, 핑동 등 남부를 중심으로 시작해 점차 북상했습니다. 그리고는 머지 않아 일본이 타이완을 할양해 기독교에 냉랭했던 일본 정부와 맞닥뜨리게 된 것이죠. 타이완 가톨릭이 일본 정부에 정식으로 개교 신청을 한 최초의 학교가 바로 이곳, 정수여학교(靜修女學校)입니다.
날로 까다로워지는 일제시기 총독부의 사립여학교 정책
일본 정부는 1898년 1월 타이완 사립학교에 관한 최초의 법령인 ‘사립학교설치폐지규칙'을 공포했고, 여기서 사립학교를 “일본 문부성이 인정하는 학교 이외의 각종 학교교육과 유사한 교육시설”로 정의합니다. 설립 과정에서 제출해야 하는 조건을 충족해 총독부의 인가를 받는다면 가톨릭 교회에서 타이완에 학교를 신설하는 데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죠.
그러나 사립학교를 보다 효율적이고 적극적으로 통제, 규제하기 위한 총독부의 사립학교 법률은 날로 까다로워졌습니다. 1919년 개정된 법규에는 사립학교 교원 역시 (총독부가 설립한) 정식학교 교원과 같이 교원증을 소지해야 한다는 규정이 추가되었고(최소 교원 총수의 ½), 1922년 개정된 법규에는 학교가 충분한 자금을 갖추어 ‘재단법인'으로 설립하여야 한다는 규정을 추가해 경제적인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사립학교는 공립학교와 동등한 자격의 교육기관으로 승격할 수 있는 자격을 박탈했죠.
사립학교에 대한 조건이 날로 까다로워지면서, 일제시기 타이완인이 스스로 설립한 사립 중등교육기관은 없었고, 가톨릭이나 장로교와 같이 서구 종교단체의 지원이 아니면 타이완은 사립학교가 버틸 수 없는 구조가 되어버렸습니다.
일본 정부 통치 하, 타이완 가톨릭 첫 학교를 설립하다
또한 일제시기 초기, 총독부는 타이완 학생들의 초등교육만 장려했을 뿐, 이후 여학생들이 진학할 수 있는 중등교육기관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랬기에 19세기 말에서 1900년대 초, 일본 불교의 각 종파나 서구 기독교 장로교회 등, 종교단체가 설립한 사립학교는 타이완 학생, 특히 여학생들에게 진학 통로를 제공하는 중요한 기관이었죠. 이런 배경에서 타이완 가톨릭 도미티코회 역시 교육과 선교를 목적으로 타이베이에 여학교 설립을 계획하였습니다.
1916년 11월 5일, 사립정수여학교 설립이 총독부 인가를 받았습니다. “타이완의 일본 여자 및 본도인 여자의 초등, 고등 보편 교육을 시행하고 그 품행을 도야하여 양처현모의 자질을 함양하고 일상생활에 유용한 지식과 기술을 전수하기 위함입니다”라는 창립 취지와 학생들이 납부한 등록금와 타이완 가톨릭교회에서 매년 8,000엔을 보조금으로 제공하여 재정유지를 하겠다는 조건 하에 말이죠.
인가 과정에서 큰 공헌을 한 페르난데즈(林茂才, Clemente Fernandez) 신부는 타이베이 다다오청(大稻廳) 펑라이정(蓬萊町) 천주당 옆 공사가 중단된 한 주식회사를 사들여 옛 건물을 2층 건물로 개축, 교사로 짓기 시작했고, 교원은 주로 필리핀의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수녀들을 초대해 교무 진행을 맡게 했습니다. 교사와 교원 문제가 잘 정리되자 정수여학교는 설립인가를 받아 그해 말 페르난데즈 신부가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죠.
정수여학교의 교명은 영어로 ‘Blessed Imelda's School’,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축복받은 이멜다 학교'이다. 여기서 이멜다는 14세기 이탈리아 출신 성인 이멜다 람베르티니(Imelda Lambertini)를 칭합니다. 중문 교명인 정수(靜修)는 ‘정심수신(靜心修身)’에서 따온 글자로, 정수여학교의 7대 교장이자, 첫 여성 교장인 홍치전(洪奇珍)이 택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1931년 사립정수여학교의 모습. - 사진: 국가도서관 臺灣記憶
현모양처에서 신여성 교육으로
정수여학교가 설립된 후 일본 정부의 사립학교 규정에 따라 학제가 몇 차례 바뀌면서 정수여학교는 당시 총독부가 설립한 관립 4년제 고등여학교와 유사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재단법인 설립을 위한 자본과 자격증을 갖춘 교원 섭외가 가능했기 때문에 실현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정수여학교는 당시 관립고등여학교에 입학하지 못하는 많은 타이완 여학생들의 차선책이 되었습니다.
학교 초기 모집 학생 중 약 3분의 2가 일본인, 3분의 1이 타이완인으로 일본계 학생이 대다수를 차지했습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수업내용으로는 수신, 국어(일본어), 수학, 일본역사, 지리 등 지적인 과목과 이 밖에 재봉, 가사, 그림, 솜씨, 노래, 체조 등의 기예류가 있었죠. 일반 과목 외에 정수여학교는 특별히 여학생들의 체육 교육을 중시하며, 당시 테니스와 당구로 상당히 유명했다고 합니다. 테니스 방면에서는 일본 메이지신궁 경기대회에 타이완 대표로 여러 차례 참가하기도 했고, 당구도 타이완섬 전국대회에서 제패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고 하죠.
정수여학교의 수업내용과 '양처현모자격 양성'이라는 창립취지는 사실 일제시기 여성교육의 한계를 반영합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당시 타이완 사회 인심에도 깊이 뿌리를 두고 있어 많은 사람들은 중등여학교를 '신부학교'로 여겼고, 중상층 이상의 가정의 아들이 장가갈 때가 되면 중등여학교 졸업자를 반드시 필요로 했죠.
정수여학교 출신 여성들도 졸업 후 이내 결혼을 택해 가정으로 돌아 간 사례가 많지만, 적지 않은 동문들은 사회에 진출하는 것을 선택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타이완 최초의 여기자 양첸허(楊千鶴, 1921-2011)는 정수여학교를 졸업한 후, 당시 타이완 유일의 여자 고등교육 학교인 타이베이여고등학원(台北女子高等學院)에 입학하여 계속 공부하였고, 1940년 졸업 후부터 일본어로 글을 쓰기 시작해 1941년부터 1942년까지 《대만일일신보》의 기자로 활동하였으며, 《문예대만》, 《대만문학》 등의 간행물에 잇달아 글을 발표하여, 타이완 여성의 관점을 예리하게 표현하는 기자가 되었죠.
제2차 세계대전이 임박하면서 총독부는 미션스쿨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시작했고, 정수여학교도 이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1936년 타이베이주는 스페인 국적의 교장 신부를 해임하고 그 자리를 일본인으로 교체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본 국적의 사람이 정수여학교의 교장을 맡았습니다.
►참고문헌
《靜修女中創校七十五週年紀念特刊》 1991.
古偉瀛, 〈台灣天主教最早的正式教育機構──靜修女中〉 《臺灣天主教史研究論集》 2008.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Rti 중앙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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