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인, 일본 식민지 시기부터 보다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해 자신의 고향을 떠나 외지로 향하는 타이완 여학생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는데요. 타이완 남부인 타이난에서 타이완 북부인 타이베이로 향하는 것은 물론, 타이완 섬에서 일본으로 과감히 떠나는 10대 소녀들의 용기와 열정을 <대만주간신보> 시간을 통해 들여다 보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 이어 이번 주에는 일본을 넘어 태평양 건너 저 먼 미국으로까지 유학을 단행한 타이완 소녀들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 갖도록 하겠습니다.
뤄슈칭(羅秀卿, 李羅秀卿)이란 열아홉 살짜리 소녀는 대학생 교류라는 명목으로 당시 미국으로 건너 간 대표적인 학생입니다.
2차세계대전 이전, 그러니까 타이완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하기 이전, 미국으로 유학 간 타이완 여성은 열 손가락, 아니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힙니다. 전 핑동여중(屏東女中)의 교장을 역임한 바 있는 류콰이즈(劉快治)는 1936년에서 1938년 사이 미국 미주리 주립대학에서 교육학과와 교육석사를 전공하였는데, 그녀는 전쟁 전 미국 학위를 취득한 유일한 타이완 국적 여성인 것으로 확인됩니다. 지난 주에 소개해드린 타이완 최초의 여의사 차이아신(蔡阿信)도 일본 유학 후 1940년 미국 동부에 위치한 하버드대학에 간 적은 있으나 정식적인 학과 수업을 위한 것이 아닌 의과대학에 견학한 정도였죠.
뤄슈칭은 타이완 중부 난터우 푸리(埔里) 지역의 대지주 집안 출신으로, 아버지 뤄완처羅萬俥)도 당시 타이완 사회에서는 보기 드문 미국 유학 출신이었습니다. 일제시기 동안 타이완 신민보(台灣新民報)라는 타이완인 운영 매체의 상무이사 겸 총경영인으로 지낸 그는 1920년대에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국제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았죠. 타이완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이후에는 입법위원에 당선되기도, 장화은행 이사장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딸 뤄슈칭의 어머니는 그녀가 열 살이던 해 안타깝게 병으로 돌아가셨고, 그러자 이듬해인 열한 살 때 그녀는 타이난 교회에서 운영하는 미션스쿨인 장롱여학교(長榮女學校)로 보내졌는데요. 그녀는 훗날 한 인터뷰에서 “당시 (학교로 보내진 것이) 슬프지 않았느냐?”라는 질문에 “그렇지 않았다. 나는 고민한 기억이 없다. 내가 고향인 푸리로 돌아간다고 해도 어머니도 안 계시고 조부모님도 안 계셨기 때문이다”라며 담담하게 대답한 바 있습니다.
그렇게 미션 스쿨에 입한 한지 5년이 지난 여름 방학 중 어느 날, 도쿄로 가려는 아버지에게 매달리며, 그녀는 “나도 같이, 나도 같이 데려가줘요”라며 간청해 아버지를 따라 처음으로 일본에 도착했습니다. 하루는 도쿄의 한 신문 광고에서 도쿄에 소재한 서구식 명문학교인 ‘동양영화여학교(東洋英和女學校)’에서 편입생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는 이내 지원했고, 열심히 노력한 끝에 합격하고 말았죠. 그렇게 그녀는 다시 한 번 아버지에게 “(도쿄에) 남아있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뤄슈칭은 도쿄에 있는 동안 북미 출신 여성들이 선생으로 있는 서구식 학교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일반적인 타이완 여성들의 교육 과정과는 점점 다른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19세기 말 캐나다 선교사가 세운 동양영화여학교에서는 일찍이 캐나다 출신 선교사들이 영어 수업을 했었고, 영어 선생님은 알파벳순으로 학생들에게 영어 이름을 지어 주었기 때문에 당시 뤄슈칭은 엘레노어(Eleanor)라는 영어 이름을 가졌죠. 졸업 후에는 도쿄에 소재한 사립여대인 케이센 대학(惠泉女學園大學) 외국어학과에 입학해 공부를 계속 이어갔는데요. 당시 학과의 선생님 대부분은 일찍이 일본에서 미국으로 이민 간 일본계 미국인 2세였습니다. 타이난에서부터 도쿄에 이르기까지, 줄곧 개신교 미션 스쿨에서 공부했던 그녀는 일상생활에서도 일본어보다는 영어를 주로 사용하는 일본 내 타이완 유학생이 되었습니다.
1934년 만주 사변 후, 일본의 대륙으로의 확장 야망은 미일 관계에 커다란 긴장을 가져왔습니다. 그러자 일본은 ‘일미학생회의(日米學生會議)’를 개최해 양국 대학생들 간의 친선 교류를 동시에 진행했는데요. 이 회의에는 1990년대 초 총리를 역임한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일본 전 총리도 1939년 참석한 바 있죠. 뤄슈칭은 미야자와보다 2회 앞선 1937년, 일미학생회 제4회에 참석했습니다. 당시 대학교 2학년이었던 뤄슈칭은 유창한 영어로 일본 문부성 시험을 통과하여 교류단의 일원이 되었고, 여름 방학에 바로 주최 단위였던 스탠퍼드 대학교로 가 한 달간 프로그램에 참여했죠.
1937년 일미학생회 제4회에 참여한 전체 학생 50명 중 여학생은 15명, 남학생은 35명이었습니다. 그들은 요코하마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여 10일 후에 하와이에 도착, 하와이에서 반나절 동안 머물다, 4일이 지나서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는데요. 뤄슈칭은 요코하마에서 샌프란시스코로 하는 선상의 14일 동안 매일같이 조를 짜서 여성의 지위 향상과 군비 감소를 토론한다거나 다른 여가 시간에는 춤을 배우는 등 태평양의 풍경은 즐길틈도 없이 바빴다고 당시를 회상했습니다.
미국에 도착한 후 학생단은 많은 학교를 견학했는데, 특히 스탠퍼드 대학에서 3주 가량 가장 긴 시간을 보냈습니다. 당시에도 미국 대학에서는 많은 파티(party)를 진행했었는데요. 뤄슈칭은 "당시 어떤 남성과 함께 춤을 추었냐?”는 질문에 춤 문화가 익숙치 않았던 일본 대학생들은 너무 내성적이어서 자기 나라 사람과만 춤을 추려했었다고 회상하기도 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미국으로 간 모든 학생들에게 100달러의 용돈으로 주었는데, 당시 100달러면 일본돈으로 200엔으로 일반 직장인들의 반년치 월급보다 많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정부로부터 받은 용돈으로 ‘코닥 카메라’를 샀다고 기억하고요.
뤄슈칭이 미국을 경험한 1937년 이후 중일전쟁에 이어 2차세계대전까지, 전 세계는 광란의 전쟁에 휘말려 바다를 건너 유학을 가는 기회는 점점 낮아졌고, 타이완 여성이 타이완 섬 밖으로 유학 가는 일은 극히 감소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전쟁 후, 타이완 여성의 유학 추세는 일본에서 미국, 그리고 보다 ‘글로벌화’된 방향으로 바뀌었습니다. 여기에 일제시기에는 자비로 자유롭게 유학이 가능했지만, 해방 후에는 반드시 유학 시험을 거쳐야 하는 것으로 바뀌었죠. 1970년대까지 ‘자유 중국’으로 세계 각국과 국교를 맺었던 과거 중화민국 타이완은 각국의 각종 장학금을 통해 여성들이 출국하여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더욱 높아졌습니다. 예를 들면 1958년 이라크 정부는 세 명의 타이완 학생에게 국비 장학금을 제공하였고, 당시 대만대학 법과 1학년에 재학중이었던 전 교포위원회 위원장 장푸메이(張富美)는 룸메이트와 함께 시험 보아 일등을 차지하고 말았죠. 비록 부모님이 대학 졸업 후 출국해도 늦지 않다며 그녀를 말리긴 했지만요.
한때, 여성의 혼기를 걱정해 고등학교 졸업생의 해외 유학을 제한하는 정책이 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런 족쇄가 없어져, 여성들도 반드시 정해진 나이에 시집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압박감 없이, 그리고 고졸, 대졸 등 학력 여부와 상관없이 자유롭게 전 세계로 떠날 수 있게 되었죠.
여성들은 예로부터 아름다움을 끊임없이 추구했다고 하죠. 그 아름다움에는 외적인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지식와 배움에 대한 아름다움도 있음을 최근 100년 간의 타이완 여성의 유학 역사가 말해줍니다.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Rti 중앙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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