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ti 한국어방송의 청취자님들께서는 동창회에 나가보신 적이 있을까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을 몇 년, 혹은 몇 십년 만에 만나 함께 옛 추억을 회상하는 일은 행복하고 소중한 순간입니다. 인터넷과 SNS가 일상의 일부분인 저의 세대에서는 굳이 동창회라는 자리를 별도로 마련하지 않아도 비교적 쉽게 동창들과 연락을 할 수 있다지만, 인터넷은 물론, 개인 휴대폰 소지도 쉽지 않았던 시절에는 일 년에 한 번 있는 동창회 자리가 어릴적 학교 시절을 추억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타이완에서는 학교 친구를 ‘동반동학(同班同學)’이라고 합니다. 같은 학교, 같은 반을 나온 친구라는 만다린 중국어식 표현이지요. 그런데 연세가 있으신 할머니, 할아버지에게는 ‘동반’보다는 ‘동창(同窗/窓)’이란 표현이 더 익숙하다고 합니다. 오히려 ‘동학’이란 표현은 익숙치 않다고 해요. 일제시기서부터 한 학교를 졸업한 학우들을 ‘동창’이라고 불렀고, 그 친구들이 만나는 모임을 ‘동창회’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타이완에서의 첫 동창회 모임은 일제시기 초기에 시작되었습니다. 타이완에 요즘과 같은 현대식 학교가 처음으로 창립된 시기와 그 역사를 같이 합니다.
일본 정부의 타이완 통치가 시작된 첫 해인 1895년 최초의 현대식 학교가 타이베이에 설립되었습니다. 구체적인 위치는 현 타이베이 스린(士林)의 즈산옌(芝山岩) 지역입니다. 타이완인을 대상으로 일본어를 가르치기 위한 학교라는 목적으로 학교명은 ‘국어학교제1부속학교’로 개칭되었고, 매년 10명 안팎의 졸업생을 배출하기 시작했습니다. 학생들은 타이완인이었지만, 선생님들은 모두 일본인이었죠. 특히 우에노(上野道之助) 선생님의 동창회 결성 호소에 국어학교제1부속학교에서는 1898년 1월 타이완의 첫 동창회를 열었습니다. 첫 동창회에는 학생은 물론, 선생님과 교장선생님까지 참여했습니다. 이렇게 1월에 열린 동창회는 일 년에 한 번 정도 열리는 지금과 달리 일 년에 여러차례, 많게는 매 달 열렸을 뿐만 아니라 교장선생님까지 참여하는 등 엄숙한 분위기해서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졸업생들이 옛 학교 시절을 추억하는 활동보다는 오히려 일본인 선생님들이 타이완 학생들에게 공부를 격려하는 문화가 더 컸다고 합니다. 그렇게 타이완에서의 첫 현대식 학교를 시작으로 이후에 신설된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도 유사한 동창회를 열기 시작했습니다.
1920년대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에 이르자, 민족자결 풍조가 식민지 타이완에 퍼지고, 용감한 타이완의 학생들은 타이완 학생의 동창회에 일본인 교장이 참여하는 것을 반대하자는 운동도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일본 당국은 동창회의 목적은 ‘학교 교육 연장’에 있다며 동창회는 반드시 학교 교장이나 사단장이 주재하도록 명령하였죠. 이렇게 타이완의 남학교에서는 동창회의 ‘민주화’를 추진하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면, 여학교의 동창회는 성격이 조금 달랐다고 합니다. 타이완에서 명문으로 손꼽혔던 여학교, 타이베이 제1고등여학교나 타이베이 제3고등여학교의 동창회는 결혼상담소까지 있어 결혼 중매를 하는 장이었다고 합니다.
1920년대 타이완의 남학교에서는 동창회의 민주화, 민족주의 정신이 발휘되어 일본인 교장의 참여를 저지하는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지만, 일제시기에 학교를 다녔던 대부분의 타이완인들에게 일본인 선생님은 좋은 분으로 기억됩니다. 타이완의 한 기자는 ‘왜 타이완인은 일본과 일본인을 그렇게 좋아할까?’라는 질문에 일제시기에 학창시절을 겪은 타이완인들이 일본 선생님에 대한 좋은 인상이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추론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추론의 배경에는 다양한 사람들의 경험과 진술이 있습니다.
1928년생인 의학박사 양콩자오(樣孔昭)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타이난제2중학교에 다닐 때, 나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는데, 나카무라(中村) 선생님은 밖에서 살 수 없는 그림 용품을 보내 나는 격려했다”라고 언급하며, 안타깝게도 선생님은 병으로 일찍 돌아가셨지만, “지금 눈을 감으면 여전히 선생님의 자상한 모습이 떠오른다”고 했습니다.
1925년생인 예스타오(葉石濤) 문학가이자 역사학자도 자신의 학창시절, 일본인 안도(安藤) 선생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를 남겼습니다. “타이완인 제자들을 마치 자신의 아이와 같이 여기고, 수업이 끝난 후에도 오후 5~6시까지 과외를 했지만, 한 푼도 받지 않았다.” 예스타오의 어머님은 선생님께서 이렇게 시간을 쓰는 것이 마음에 걸려 소시지를 한 상자를 사서 아들 편에 보냈는데, 이를 본 안도 선생님은 매우 화를 내며 그 소시지 상자를 내던졌다고 합니다. 예스타오가 선생님에게 어머니의 고마움이라고 설명하자 안도 선생님은 “너희들의 과외를 돕는 것은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니 소시지를 가지고 돌아가라고 말했다”고 하는데요. 예스타오 자신도 광복 후 초등학교의 교사가 되었는데, 이러한 일본인 선생을 회상하며 "위대하다(偉大)"라는 두 글자를 남겼습니다.
1912년 생인 전 타이난시장 신원빙(辛文炳) 씨도 자신의 초등학교 5, 6학년 시절, 와타나베 선생님이 특별히 집을 세내어, 진학을 준비하는 14명의 학생들에게 매일 저녁 6시부터 9시까지 어떠한 학원비도 받지 않고 과외를 해주었다고 하는데요. 결국 14명의 학생들은 모두 타이난의 명문 중학교에 합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신 전 타이난시장은 스승의 은혜에 감격해 광복 후에 와타나베 선생이 일본으로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본에 가면 언제나 스승님을 찾아뵈었다고 하고요.
타이베이의 주요 명문 여학교였던 타이베이제3고등여학교는 광복 후에도 정기적으로 동창회를 열거나, 동창회지를 출판했는데요. 1990년대에 출판된 타이베이제3고등여학교 졸업생 할머니들의 진술과 증언을 보면, 할머니들은 만다린 중국어가 아닌 일본어로 자신의 학창시절을 회고하며 글을 적기도 하고, 당시 일본인 선생님이 학생들의 공부와 진학에 상당한 열의를 보였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1960~70년대 이 학교의 동창회가 출판한 연락처에는 졸업생들의 주소지와 전화번호 뿐만 아니라 타이베이제3고등여학교를 거쳐갔던 교우, 즉 선생님들의 일본 주소지와 전화번호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중 동창회 활동에 적극적이었던 일부 졸업생은 타이완의 광복 후 모두 일본으로 돌아간 선생님을 직접 찾아뵙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기도 했고, 일본인 교장이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듣고 직접 일본의 한 장례식장에 참석하기도 하는 등 졸업 후에도, 광복 후에도 타이완 학생과 일본인 선생 사이의 끈끈한 유대관계가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물론, 모든 타이완 학생들이 일본인 선생을 좋아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일본인 중심의 권위에 대항하거나 저항하는 타이완 학생들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고요. 그러나 전반적으로 일본인 선생님에 대한 타이완인들의 기억은 매우 좋은 편입니다. 일제시기 학창시절에 대한 긍정적인 기억, 그 기억에는 일본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이 있고, 일본 선생님은 한 기자의 말처럼 바로 타이완 사람들이 일본을 좋아하는 감정의 원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참고문헌
陳柔縉 《舊日時光》 大塊文化, 2012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Rti 중앙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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