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시대에 피아노를 배우는 것은 더 이상 특별한 일이 아니죠. 어릴적 자신의 취미와 특기를 발견하기 위해 배우는 여러가지 중 하나일 뿐 그 이상의 사회문화적 의미를 담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초반생인 저희 부모님 세대만 해도 어릴 때 피아노를 배우는 것은 동네 사람의 시선을 끄는 굉장히 특별한 일이었습니다. 피아노를 직접 구매해 가정에 들여놓는 일은 물론 피아노를 배우는 교육비용을 부담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1960-70년대 한국 사회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으니까요. 타이완도 비슷했나 봅니다. 타이완의 피아노 역사를 소개하는 천로우진(陳柔縉) 기자 겸 작가, 교수는 지난 20~30년 전만에도 타이완에서 피아노를 배우는 아이는 부러움의 대상이었으며, 오늘날 많은 엄마들이 당시 어려서 못다 이룬 꿈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아이를 피아노 교실이나 학원에 보낸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무려 100여년 전 피아노는 더욱 더 희귀한 물건이었죠. 질문은 피아노를 배우냐 배우지 않느냐가 아니라 과연 누가 당시에 피아노를 배울 수 있었는가라고 물어야 맞을 정도로요. 타이완의 음악교육가 왕즈먀오(王子妙)는 <타이완음악발전사>라는 책에서 일제시기 식민지 타이완에서 피아노 교육을 하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당시 피아노는 타이완에서 자체적으로 생산할 수 없었고, 일본 수입에 의존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야마하, 가와이 브랜드가 많았기 때문이 가격이 매우 비쌌다. 경제적으로 여유있고 예술 관념이 풍부한 소수의 가정을 제외하고 일반인은 피아노를 배울 수 없었다…”
1936년 야마하 피아노 판매 광고를 보면, 광고에는 ‘보급형’ 500엔, 연주회용 ‘그랜드피아노'는 그 두 배인 1,000엔이라고 적혀있습니다. 가격이 상당해서 일반인은 지불할 수 없는 비용이죠. 일본제 피아노를 타이완에서 파는 ‘일본악기제조주식회사 타이완출장소’는 분할구매방법을 제공하지만, 매달 19엔을 지불해야 하는데, 당시 19엔 역시 일반 서민들은 부담할 수 없는 사치였습니다. 야마하 외에 당시 타이베이의 유명 서점 ‘신고당(新高堂, 1898년 설립)’의 악기부에서도 삼목(三木)표 소형 피아노를 판매했는데 1932년도의 가격은 150엔이었습니다. 일제시기를 겪은 타이완 문학가 예스타오(葉石濤, 1925-2008)는 구술에서 그의 부친은 타이난 주청, 지금으로 따지면 시청에서 근무했는데 월급이 20여엔이었다고 했습니다. 공립학교의 매 학기 수업료는 50전이었고요. 예스타오 작가는 “그때는 한 달에 10여엔만 있어도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당시 장로교회 총간사의 월급은 50엔이었다죠. 꽤 높은 편입니다. 이렇게 당시 봉급과 1930년대의 피아노 가격을 비교하면, 높은 월급의 50엔으로 계산하더라도 야마하 ‘보급형' 피아노 한 대는 무려 10개월의 월급이 드는 셈입니다. 예스타오가 말한 20엔으로 계산하면 피아노는 2년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 월급이 있어야만 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일제시대 식민지 타이완에서 개별적으로 피아노를 배울 수 있었던 사람은 절대다수가 부잣집 자제였습니다. 타이완의 대표적인 유지 가문인 우펑 린가(霧峰林家)네는 타이난에 있는 선생님을 타이중 집으로 초대해 피아노를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지난 <대만주간신보>에서도 살펴보았던 린셴탕 선생의 일기 중 1931년 8월 19일 기록에 따르면 “점심에 가오진화(高錦花)가 와서 아이코(愛子)에게 피아노(ピアノ)를 가르쳤다. 2시경에는 다섯 째 아들을 가르쳤다.” 린씨의 일기에서 등장하는 가오진화(1906-1988)는 타이완에서 일본으로 유학한 최초의 여성 피아니스트이며, 아이코는 린셴탕의 일본인 며느리입니다. 피아노는 휴대할 수 있는 악기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당시 린가에 개인 피아노가 비치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명 작곡가 뤼취안성(呂泉生,1916-2008)은 타이중의 명문 선강 뤼가(神岡呂家) 출신으로 중학교 때 타이중시의 여성 피아니스트 천신전(陳信貞)에게 이례적으로 남학생을 받아달라고 부탁해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였습니다. 전 타이완 시멘트 회장 구전푸(辜振甫)의 동생은 당시 뤼씨와 함께 타이중에서 천신전의 문하에 들어 피아노를 배웠다고 합니다.
이렇게 일제시대 부유한 집안의 자제들은 피아니스트를 초빙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나, 피아노를 배우는 통로는 가정교사에 국한되지만은 않았습니다. 공립학교의 음악 선생님들은 방과 후 시간을 이용하여 개별적으로 피아노 연주를 지도했는데 따로 비용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앞서 소개한 문학가 예스타오도 피아노를 배울 수 있었는데, 그가 일제 말기에 공립학교의 대리 교원으로 일하던 중 어느 날 교장의 재량을 통해 일본인 여선생으로부터 직접 피아노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앞서 소개한 일제시기 피아노를 배운적 있는 타이완인의 경험과 진술을 들여다보면 그들이 피아노를 배울 수 있었던 것은 1930년대 이후의 일입니다. 타이완인이 피아노를 공개적으로 독주하는 것도 1930년대에는 신선한 일이었습니다. 피아노를 접할 수 있었던 소수의 학생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타이완 학생들은 당시 발로 페달을 번갈아가며 눌러 소리를 내는 서양식 풍금을 배웠습니다.
구체적인 증거는 없지만, 1895년 타이완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기 전 피아노라는 악기를 알게 될 기회가 있었다면 그건 서양 선교사의 소개 덕분일 것입니다. 영국 장로교 선교사들이 1885년 타이난 세운 ‘장로교회 중학교’(현 장종중학교의 전신)는 1901년부터 1908년까지 페드릭 존슨(Fredrick R. Johnson) 교장이 재임하던 중, 영국에 보낸 편지에서 "학교는 현재 작은 풍금이나 피아노를 필요로 한다. 아마도 우리를 도와줄 선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후에 학교에 풍금이 생기자 학교는 풍금 과정을 증설하여 존슨 교장의 부인이 교좌를 맡아 타이완 학생들에게 풍금을 가르쳤습니다. 타이완대학 문과대학 교수를 지내다 228 사건 때 사망한 린마오성(林茂生)은 당시 존슨 교장 부인의 제자였습니다. 린마오성은 풍금 연주법을 배워 후에 교회에서 교사와 학생이 예배를 볼 때 반주하는 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선교사 학교가 타이완에 먼저 설립되어 피아노 문화를 서서히 알리고 있을 무렵, 타이완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총독부가 설립한 학교에서도 풍금과 피아노가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총독부 초대 학무부장인 이자와 슈지(伊澤修二)가 첫 학교인 '즈산옌학당(芝山岩學堂)'을 설립하고 이듬해에는 '국어전습소'를 열어 일본어를 가르쳤는데, 1898년 5월 20일자 <대만일일신보> 기사에 따르면 이 때 30여 명의 국어전습소 졸업생이 간친회를 열었고 회의 중 간사들이 일본어로 인사말을 하며 풍금을 연주하였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총독부가 설립한 사범학교 학생들은 일주일에 2시간 음악수업이 있어서 반드시 풍금을 배워야 했고, 현 중산여고의 전신인 타이베이의 제3고녀에서는 3학년이 되면 매년 우수학생 6명을 선발해 별도로 피아노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일제시기 공립학교에서 주로 사용했던 풍금은 현재까지도 중년 이상의 타이완인의 기억 속에 남아있습니다. 피아노는 부잣집 자제 아니면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상상속의 악기였다면 풍금은 비교적 친해지기 쉬운 악기였던 셈이죠.
참고문헌
陳柔縉. 臺灣西方文明初體驗 / 陳柔縉作. 二版. 臺北市: 麥田, 2011.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go.kr)



Rti 중앙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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