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
타이완의 소리 RTI공식 앱 내려받기
열기
:::

‘교육’을 통한 동화(?): 일본 식민 교육 정책에 대한 타이완과 조선의 상반된 반응

  • 2023.06.13
대만주간신보
영어권에서 일본 제국과 식민지에 대해 다룬 책, 'The Japanese Colonial Empire, 1895-1945' (Edited by Ramon H. Myers and Mark R. Peattie, 1987). 이 책의 7장에는 타이완과 한국의 식민지 교육에 대해 비교 분석한 E. 패트리샤 쯔루미의 연구가 실려있다. - 사진: Princeton University Press

일제시기 식민지 타이완의 역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국인의 입장에서 어쩐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모습들이 몇몇 보입니다. 그 중 대표적인 예로 식민 시기 학교를 포함한 ‘교육'을 꼽을 수 있습니다. 당시 중등교육 이상을 받은 타이완인들의 학력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대부분 일본 식민 정부가 계획하고 설립한 학교 체제 안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혹은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일본의 일류 대학을 나왔습니다. 한국의 경우에는 선교사들이 세운 이화, 연세, 배재, 민족자본이 설립한 숙명, 진명, 보성, 휘문 등 사립학교 출신과 일본 유학 외에도 미국을 비롯한 일본 제국 이외의 국가 유학 출신 인사들의 비중이 높은데 말이죠. 

캐나다 역사학자 E. 패트리샤 쯔루미는 일본의 식민 교육이 타이완과 한국에 어떻게 달랐는지에 대한 연구에서 피식민자들의 요구와 의지를 중요한 요인이라고 분석한 바 있습니다. 메이지 일본 역사 연구자인 E. 패트리샤 쯔루미(E. Patricia Tsurumi, 1938-2016)는 캐나다 빅토리아 대학교에서 여성, 교육, 식민주의, 노동 역사 관련 연구에 상당히 기여한 바 큽니다. 1990년에는 메이지 일본의 초기 산업화 과정에서 여성 섬유 노동자들을 연구해 이 ‘공장 소녀들(factory girls)'이 일본 초기 근대 공장 노동자로서 일본 노동자 계급 역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일본 자국에 대한 맹목적인 애국심보다는 자신의 이해타산에 맞게 일함으로써 가능한 한 그들의 고용주에게 저항했다는 것을 보였주었고, 1977년에는 식민지 타이완에서의 일본 교육 정책에 대해 연구한 자신의 하버드 박사 학위 논문에 기초해 책을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대만주간신보>에서는 E. 패트리샤 쯔루미의 연구를 중심으로 일본 식민 교육이 타이완에 미친 영향과 그것이 동시대 한국에서와는 얼마나 유사하고 또 달랐는지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일본은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등 서양의 제국주의 세력과 달리 달리 2차세계대전 이전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비서구’ 식민 권력이었습니다. 일본 역시 자신들의 문호를 네덜란드 등 서구 세력들에 점차 개방하기 시작하면서 메이지 신정부 들어서는 본격적으로 서구 문명을 적극적으로 들여오기 시작합니다. 1871년부터 2년간 유럽, 미국에 이와쿠라 사절단(岩倉使節団)을 파견해 이들과 같은 근대 국민국가 설립을 위해서는 전국 단위의 초등보통교육 실시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절감하죠. 그렇게 1870년대부터 일본은 국내 초등보통교육 실시를 위해 막강한 중앙정부 재정 투입하기 시작했고, 1890년대부터는 지방정부의 자본까지 추가하면서 초등보통교육을 전국 단위로 확산시키기 시작합니다. 교육의 중앙집권화의 시작이죠. 중앙정부에서 제정한 동일한 교육령과 교과목, 교과목표를 기준으로 일본 전국의 학교에서 동일하게 교육을 시키기 시작합니다. 

1880년대 일본에 파견된 조선의 개화사상가들, 특히 유길준과 윤치호 등을 적극 지원하기도 했던 당시 일본의 외무장관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1836-1915)가 “아시아의 변두리에 새로운 유럽 스타일의 제국 만들어야한다”고 주창한 것과 같이 일본은 주변 국가 영토를 침략해가면서 제국의 범위를 차차 넓혀가기 시작합니다. 인도를 지배한 영국, 인도네시아를 지배한 네덜란드, 알제리를 지배한 프랑스 등 유럽의 제국과 일본 제국이 다른 점은 민족적으로 일본인과 유사한 사람들을 통치해야 한다는 것에 있었는데요.  특히 식민지 타이완과 한국은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유대관계에 있는 같은 동아시아인으로 일본인처럼 될 가능성 높다고 생각한 일본 식민 정부는 두 식민지에서 모두 ‘교육’을 식민지 개발에 중심 축으로 삼았습니다. 

츠루미는 식민주의 교육이야말로 일본 최초의 식민지인 타이완에서 질서유지, 경제자원 활용, 원주민의 협력 확보하는 등 타이완인을 동화(assimilation)시키는 데 핵심적인 기능을 수행했다고 분석합니다. 식민지 타이완의 초대 학무부장인 이사와 슈지는 1895년 메이지 일본에서의 교육 정책을 타이완에 소개하면서 타이완 전 섬에도 공학교, 즉 보통초등교육을 위한 네트워크를 설립해 계급, 나이, 성별 구별없이 무료로 교육을 제공하고자 하는 야심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총독부에서 부담해야하는 비용의 문제고 있고, 학교를 설립하는 데 시간도 걸리고 해서 단기적으로 일부 학생만 교육시키기로 하죠. 중등교육 역시 현실적으로 의사, 선생 등 당장 행정적으로 필요한 인원을 채우기 위한 교육을 우선적으로 실시했습니다. 그리고 식민지 타이완의 제 4대 총독인 코다마 겐타로(兒玉源太郎)가 임기에 들어서자 1898년부터 공학교 체계를 조직하고 교육비 지불 가능한 타이완인에 한해 보통교육을 실시합니다. 이 과정에서 타이완 유지층 부모들을 설득하는 것이 총독부의 주요 사업 중 하나였습니다. 학비 충당이 되어야 교육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으니까요. 총독부는 수학이나 과학 같은 근대식 과목뿐만 아니라 고전 한문도 학교에서 가르친다는 명분 하에 타이완 유지층 부모를 설득합니다. 그러나 타이완에서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을 위한 교육과 달리 일반 타이완인 교육에는 여러모로 제한적인 상황을 파악한 타이완 유지층들은 일본과 동일한 수준의 학교 교육을 총독부에게 요구합니다. 초등교육 이상의 중등교육에 대한 타이완 학부모들의 수요가 높아지면서 1915년에는 타이완 최초로 타이중(台中)에 남학생 위한 중등학교가 설립됩니다. 대부분의 경비는 타이완 유지층의 자본으로 충당했죠. 식민지 타이완 최초의 문민 총독인 덴 켄지로(田健治郎)가 1919년 제8대 총독이 되면서 교육을 타이완 개혁의 핵심으로 삼아 타이완의 교육 정책은 상당히 확대되었습니다. 1919년 제1차 타이완 교육령을 제정했고, 1922년에는 2차 교육령으로 개정해 일본어를 할 줄 아는 타이완인은 모두 보통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을뿐만 아니라, 중등학교에서는 일본인과 타이완인이 함께 재학하는 ‘공학'제도가 마련되었습니다.   

반면, 1905년부터 일본의 보호국 시기에 접어든 대한제국에서 일본은 타이완을 모델로 한국에서 교육 정책을 시행하고자 했으나 결코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는 1900년대부터 자체적으로 나라를 위한 교육 운동을 전국 단위로 전개하고 있었죠. 게다가 미국 선교사들이 19세기 말부터 한국에 선교차 오면서 미션 스쿨 등을 지어 근대식 교육을 이미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1910년  한일합병 이후 첫 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는 한국의 기존 사립교육과 민족의식과 관련해서 ‘독립과 관련된 사립학교 활동을 일절 금지시킬 것’을 강조하기도 했죠. 일본 당국은 한일합병 이전부터 한국에 들어와 활동하던 기독교 선교사들의 선구자적 역할을 인정했습니다만, 그 안에서 반일감정이 형성되는 것은 견제할 수 밖에 없었죠. 타이완과 유사하게 한국에서 실시한 일본의 동화중심 교육은 오히려 한국 학생들 사이에서 반일 민족정서를 형성하는 모멘텀을 만들었고 결국 1919년 학생들은 통학을 거부하고 거리 밖으로 나왔습니다. 1922년 제2차 교육령에서 이론상으로는 한국인과 일본인이 하나의 교육 체계에서 동등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했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이미 사립학교의 역할이 커진 나머지 총독부에서 설립한 학교보다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이 방법 역시 타이완과 달리 잘 먹히지 않았죠.

타이완에서 먼저 시도해본 일본의 식민 교육 정책이 왜 한국에서는 잘 이행되지 못했나에 대해 역사학자 패트리샤 쯔루미는 “(한국에서는) 피식민자들이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합니다. 일본이 타이완 섬을 식민지로 삼은 후 여러 총독에 걸쳐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교육 정책을 세우고 실행해 가면서 근대 교육을 실시하는 기관은 총독부 설립 학교가 주를 이뤘습니다만, 한국에서는 일본의 보호국이 된 1905년 이전부터 이미 사립 근대교육 기관들이 많았던 데다가 대한제국에서 직접 설립한 최초 관립 근대교육기관도 있었죠. 한국에서는 총독부가 설립한 각종 학교들이 여러 대안 중 하나였던 셈이죠. 따라서 한국에서의 근대화는 일본 교육만이 유일한 길은 아니었습니다. 첫 여성 교육을 실시하거나 서양의 문화 및 문명을 전달한 사람들 역시 일본인이 아닌 그 이전부터 대한제국에서 활동하던 미국 선교사였기 때문입니다.  

쯔루미는 두 식민지의 일본 교육 정책을 비교한 글의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며 글을 마칩니다. “타이완인들은 일본 정부가 관리하는 식민지 학교의 부족함이나 차별에 대해 더 나은 모델을 요구함으로써 대응했지만, 한국인들은 그야말로 즉각적인 독립을 원했다.” (Tsurumi, 1984:311)

 

참고문헌

E. Patricia Tsurumi, “Education and Assimilation in Taiwan under Japanese Rule”, Modern Asian Studies 13(4), 1977.

E. Patricia Tsurumi, “Colonial Education in Korea and Taiwan”, The Japanese Colonial Empire, 1895-1945, 1984.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프로그램 진행자

관련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