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기 타이완 문예인들의 활약을 다룬 소설 <자색대도정>(紫色大稻埕)을 원작으로 만든 드라마에는 당시 타이완인으로는 처음으로 일본의 제국미술전람회(帝國美術展覽會)에서 수상한 화가 천청보가 일본의 기자와 인터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제국미술전람회는 1919년부터 1934년까지 일본 문부성 산하단체인 제국미술원에서 15회에 걸쳐 개최한 전람회로, 줄여서 제전(帝展)이라고 부릅니다. 이 제전은 1922년부터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조선미술전람회>와 1927년부터 타이완총독부가 개최한 <대만미술전람회>의 모델입니다. 제전은 일본 제국을 통틀어 가장 권위있는 미술 대회라고 할 수 있죠. 화가 천청보는 이 제전에서 타이완인으로는 처음으로 입선했습니다.
드라마에서 일본 기자가 말을 꺼냅니다. “진 상, 대단해요. 타이완인으로서 처음으로 제전에 입상한 화가로서, 결코 간단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천청보는 “작년 제 작품이 낙선되어 올해에도 큰 확신은 없었습니다. 어제 밤 미술관에서 제 이름을 발견하고는 너무 기뻐 어쩔 줄 몰랐습니다.” 기자가 묻습니다. “타이완의 자이는 어떤 지역인가요?” “내 고향은 햇빛이 풍부한 곳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검게 탔죠.” “진 상이 가장 좋아하는 화가는 누구인가요?”라는 기자의 마지막 질문에 천청보는 “반 고흐입니다. 고흐의 그림은 생명력이 충만합니다.”라고 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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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청보(陳澄波, 1895-1947), 그는 청조 마지막 해인 1895년 타이난 자이(嘉義)에서 출생했습니다. 자이는 천 화가의 고향이자 자신의 작품의 중요한 모티브였습니다. 천청보는 타이베이의 타이완총독부국어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친 일본 화가 이시가와 긴치히로(石川欽一郎, 1871-1945)로부터 처음으로 서양식 수채화를 배우면서 미술계에 입문합니다. 타이베이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인 자이(嘉義)로 돌아와 7년 간 교사로 재직하면서 일본으로 유학 갈 경비를 모았습니다. 그리고 1924년 29살의 나이에 그는 일본 도쿄로 건너가 도쿄미술학교(현 도쿄예술대학)에서 유학을 시작합니다. 도쿄미술학교에서 유학 중이던 천 화가는 1926년 그의 유화 작품 중 고향을 소재로 한 ‘자이의 시가지(嘉義の町中)’라는 작품으로 제7회 일본 제국미술전람회에 입선하게 되죠.
다이쇼 15년(1926) 10월 12일자 <대만일일신보(臺灣日日新報)>에서는 천청보의 입선 소식을 다음과 같이 전했습니다.
“제전 서양화 부문에는 반입된 총 2283점 중 154점을 입선 결정했다. 10일 밤 발표에따르면 올해에는 예년에 비해 새로운 얼굴들이 많은데, 그 중에는 타이완인 천청보 군이 <자이의 시가지>를 출품해 처음으로 입선하는 영광을 얻어 전 타이완인에게 기쁨을 선사했다.” 면서 천 씨의 인터뷰를 함께 전했다. 천청보는 유창한 일본어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작년에도 출품했는데 낙선되어 올해도 여러모로 위태위태했지만 당선되었습니다. 저는 지금 시타야(下谷)에 살고 있지만, 고향에는 아내와 두 아이가 있습니다”
이렇게 타이완인으로는 최초로 제전 입선이라는 결과를 갖고 1929년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한 그는 타이완으로 바로 돌아가지 않고 잠시 중국 상하이에서 거주합니다. 1933년까지 약 4년 간 상하이에서도 서양 유화를 가르쳤습니다. 그러면서 상하이의 중국 예술가들과 긴밀히 교류하고 1932년 설립된 중국의 서양화 단체, 결란사(決瀾社)에도 참여하면서 동양화 스타일의 유화의 기초를 다지는 데 공헌했습니다. 천청보는 일제시기 타이완 화가 중 중국 화단에서 활약한 극소수의 인물 중 한 명이죠.
1933년 천청보는 드디어 자신의 고향인 자이로 돌아옵니다.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다양한 미술단체(七星畫壇, 赤陽會, 赤島社, 臺陽美術協會) 창립활동에 참여하면서 타이완 미술사에 큰 공헌을 남겼습니다.
<청류(清流)>라는 제목의 작품은 1929년 초 도쿄미술학교 졸업을 앞둔 천청보가 완성한 작품으로 같은 해 중국에서 열린 중화민국 교육부 제1회 전국미술전과 타이완에서 열린 제3회 대만미술전람회에 잇따라 출품되었습니다. <청류>는 색채가 대담하고 붓놀림이 제법 자유로운 천청보의 대부분의 작품과 달리 특별히 맑고 조용하며 약간은 공허해 보일 수 있는 작품입니다. 그는 이 작품에서 서양의 유화에 동양적인 선과 공간감을 내재화해서 ‘유화의 동양화’라는 회화적 특징을 구축했다고 평가받는 20세기 초 타이완 회화의 선구적인 예입니다. 천청보의 <청류>는 작년 2022년 8월에 타이완의 국가문화자산 중요고물(重要古物)로 지정되었습니다.
29세에 당시 예술 학도들이 선망하던 일본 도쿄미술학교에 합격해 타이완 최초로 일본 유학 화가가 된 천청보는 전례없는 일본 제전 입선과 중국에서의 교학 경험까지 더해 타이완 미술계에 새로은 발자취를 남긴 인물입니다. 특히 그의 그림 속에서 물씬 풍기는 타이완의 풍토와 향취는 타이완의 땅과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한껏 보여주죠. 자화상, 비탄(碧潭), 자이거리, 나의가정, 절 입구, 단수이중학, 자이공원, 야자나무, 장롱여중 학생기숙사 등 그의 작품의 주제는 한결 같이 타이완의 지역 경치와 인물을 조합한 경우가 많습니다. 천청보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자연을 관찰하고 타이완 사람들이 사는 거리, 집, 산, 하천의 모습을 찾아다니며 수채화, 유화 등 서양의 화법에 접목하면서 타이완 섬 풍토와 민정을 반영한 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는 타이완 최초의 유화 화가일 뿐만 아니라 타이완 미술사에서 생활 현실을 반영하고 타이완 풍토의 아름다움을 집요하게 표현한 화가라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가 큽니다.
그러나 일본으로부터 해방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47년 3월 그는 2.28 사건으로 인해 사망했습니다. 향년 52세의 나이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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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차이잉원 총통이 천청보의 전시에 직접 참여해 가족을 접견하며 인사말을 건넨 적이 있습니다. 이 때 차이 총통은 천청보는 “타이완 근대사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하나”이자 동시에 “2.28 사건의 희생자”라고 소개합니다. 그러면서 “천청보 화가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생전 작품을 숨겨둔 많은 친구들이 연루될 까봐 그림을 불태워 버리기도 했다”며 그런 위험을 무릎쓰고 남아있는 작품에 대한 경의를 표했습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천청보 화가의 생전 마지막 작품은 자이시 거리에서 바라본 옥산에 쌓인 눈으로, 1947년 작품인데 작지만 강한 힘이 있으며 이 작품은 옥산의 창백한 산이 여전히 봄을 기다리고 있음을 일깨운다”면서 천청보 화가의 생전 마지막 작품을 통해 정치적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들을 함께 애도했습니다.
2019년 7월 무더운 햇볕이 내리쬐는 여름, 국립타이완대학 역사학과 저우완야오(周婉窈) 선생님의 주선으로 화가 천청포의 장남인 천중광(陳重光) 선생님 댁을 방문한 바 있습니다. 타이완어(臺語)를 구사하시는 천 선생님은 이 날 인터뷰에서 1979년 열린 천청포 작품 전시회 당시를 회상하며 역시 자이가 고향인 타이완 본토 출신의 소수 정치인, 린진성(林金生, 1916-2001) 전 중화민국 교통부, 내정부 부장과의 관계를 증언했습니다. 천 선생은 비록 그가 한 일들은 모두 “국민당을 위한 일”이었고 심지어 장징궈(蔣經國)의 억양을 흉내내기까지 하며 국민당 일에 앞장섰지만, 미술을 참 좋아했었고 1979년 열린 전시회 첫 날과 마지막 날에 모두 들러 사인을 받으러 왔다고 털어놓았습니다. 1979년 11월 29일부터 12월 9일까지 타이베이 춘지예랑(春之藝廊)에서 열린 ‘천청포 유작전’(陳澄波遺作展)은 2.28 사건 이후 천청포의 작품이 타이완에 처음 공개된 역사적으로 중요한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계엄시기였던 당시 차마 천청포 화가가 2.28 사건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화랑에 공개적으로 소개하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같은 일제시기 자이인으로 태어나 화가의 길을 걸은 천청포 화가와 정치의 길을 택한 린진성 정치인. 사뭇 다른 두 분의 행보는 타이완 근현대사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Rti 중앙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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