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살아가고 있는 우리. 한 번이라도 다른 삶을 살아볼 수 있을까요? 반복되는 삶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문학입니다. <포르모사 문학관>에서 타이완 특유의 문학 세계 속으로 함께 들어갑시다.
안녕하세요! 저는 <포르모사 문학관> 시즌2의 진행자 안우산입니다.
“직장에서 진정한 친구를 사귈 수는 없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타이완 문단에서 이 주장을 반증하는 우의가 있는데요. 지난 2월 출판된 서신집 《역류(逆流:鍾理和與鍾肇政書信錄)》에서 타이완 하카계 작가 중리허(鍾理和)와 중자오정(鍾肇政)이 1957년부터 1960년까지 주고받은 편지가 처음으로 온전한 형태로 공개되었습니다. 작가 주요우쉰(朱宥勳)은 추천서문에서 두 사람의 교류가 시종일관 순수한 글로 이루어졌고 문학에 기반한 우정을 보여줬다고 언급했습니다. 정권이 바뀌면서 일본 식민지 시대에 태어난 많은 타이완 작가들이 뜻을 이루지 못해 울적해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지난 2020년 95세로 별세, ‘창작력이 가장 왕성한 타이완 작가’라 불리는 중자오정과 달리, 중리허는 1960년 폐질환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두 사람의 삶은 매우 달랐지만 모두 타이완 문학에 대체 불가한 소중한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오늘은 <포르모사 문학관>과 함께 타이완 문단의 베스트 프렌드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두 작가에 대해 소개하기 전에 우선 2차 세계대전 이후 타이완의 시대적 배경부터 살펴봅시다. 타이완이 1945년 중화민국으로 반환된 이후 국민당 정부는 중국어를 보급하기 위해 일본어, 민난어(타이완어), 하카어, 원주민어 등 타이완 현지 언어를 금지하는 국어운동을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로 인해 일본 교육을 받은 대부분 타이완 지식인들은 하룻아침에 문맹이 되어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자원은 국민당 정부를 따라 타이완에 온 외성인(外省人)에 크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본성인은 아무리 뛰어난 재능이 있어도 발휘하기 어려웠습니다. 외성인과 본성인의 갈등이 심각해지면서 1947년 반정부 봉기 228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내부 대립의 심화와 국공내전의 패배로 타이완에 이전한 국민장 정부는 1949년 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또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 ‘반공회향문학(反共懷鄉文學)’을 적극 추진했습니다. 본성인 작가들을 탄압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공산당과 아무런 원한도 없고 고향을 그리워할 필요도 없는 본토 작가들을 간접적으로 억압했습니다. 이러한 배경 아래 1950-60년대의 본성인 작가들은 설 자리를 잃게 되었죠.
본성인 작가들이 겪은 어려움을 감안하여 중자오정은 여러 작가들에게 잡지를 함께 발행하자고 하는 초청 서한을 보냈고, 이 서한들을 1957년 발행된 최초의 본성인 간행물 《문우통신(文友通信)》에 게재했습니다. 참여 작가진이 확정된 후 《문우통신》3호부터 작가 간의 작품 리뷰를 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비밀결사가 염격히 통제되었던 계엄시대에 1년 반밖에 지속되지 않았고 문단에서도 영향력이 거의 없었지만 16차례의 서신 왕래로 본성인 작가들을 집결시켜 1970년대 타이완 향토문학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중리허와 중자오정의 인연은 이 프로젝트에서 시작되었는데, 당시 중리허는 중자오정에게 프로젝트 참여를 약속한 원로 멤버 중 한 명이었습니다.
작가 주요우쉰은 평론집 《계엄시대 타이완 소설가 군상(他們沒在寫小說的時候:戒嚴台灣小說家群像)》에서 문학 창작은 매우 개인적인 사업이지만 중자오정은 비교적 특별한 사람으로 본성인 작가의 커뮤니티를 조직하는 것 외에도 작가의 브랜딩을 추진하는 매니저 역할을 했다고 분석했습니다. 사실 《문우통신》은 중자오정 본인의 창작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는데 오히려 중리허 등 참여 작가들에게 동기부여가 되었습니다. 《문우통신》 이전 폐질환에 시달린 중리허는 2차례의 수술을 거쳐 갈비뼈 여섯 개를 제거했을 정도로 몸이 매우 허약했습니다. 1956년 장편소설 《리산농장(笠山農場)》으로 문학상을 받았지만 주최 측의 변동 때문에 출판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열 살 어린 후배 작가 중자오정으로부터 편지가 왔습니다. 훗날 타이완 양대 하카 작가로 꼽힌 두 사람은 같은 성씨를 갖고 있지만 혈연관계는 없고, 중자오정은 타오위안(桃園) 룽탄(龍潭), 중리허는 지난주 <랜드마크 원정대>에서 소개해 드린 핑동(屏東) 류뒈이(六堆) 출신입니다. 각각 타이완 북부와 남부에서 떨어져 살면서 평생 얼굴도 못 봤지만 편지를 통해 돈독한 우정을 쌓았습니다.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난 중리허는 생애 마지막 2년 동안 풍부한 작품을 발표했는데, 이는 중자오정을 알게 된 후였습니다. 당시 행동이 불편한 그는 완성한 원고를 먼저 중자오정에게 보내고, 중자오정을 통해 잡지사나 신문사에 전달했습니다. 두 사람의 편지에는 중자오정이 중리허를 격려하는 말, 그리고 중리허를 위해 만든 투고 계획이 담겨 있을 정도로 두 사람의 사이는 굉장히 가까웠습니다. 얼핏 보면 중자오정은 중리허보다 훨씬 더 잘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때만 해도 주류 문단에서 소외된 본성인 작가 중 한 명에 불과했습니다. 《문우통신》이 1958년 정부의 압박으로 폐간된 뒤에도 두 사람의 편지 왕래는 계속되었습니다. 중자오정은 소설 《루빙화(魯冰花)》가 연합보에 채택됐다는 소식을 받자마자 중리허에게 연재 종료일을 알리고, 그 날짜까지 새 작품을 완성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그가 중리하의 신작을 연합보에 추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일은 알 수가 없습니다. 두 사람의 마지막 편지는 중자오정이 1960년 7월 23일 중리허에게 보낸 것으로, 중자오정은 답장을 받지 못했습니다. 중리허는 며칠 후인 8월 4일에 병사했기 때문입니다. 중리허의 아들 중톄민(鍾鐵民)에 따르면, 당시 부자 두 사람이 병상에 누워 있었던 데다가 폭우로 타이완 남부지역이 온통 쑥대밭이가 되었고, 편지를 받고도 답장을 쓰지 못했습니다. 중자오정은 장례식을 참여하러 중리허의 집에 처음 갔을 때 중리허가 죽기 전에 쓴 원고지를 봤는데, 원고지에는 핏자국이 가득찼습니다. 그 후 수십 년 동안 자신이 중리허를 재촉하는 것은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고 생각하며 깊은 죄책감에 얽매여 있었습니다.
절친을 잃은 후 중자오정은 약속대로 중리허의 유작 《비(雨)》를 연합보에 추천했고, 동시에 돈을 모아 소설 출판 계획을 추진했습니다. 연합보의 연재를 통해 독자를 확보해서 그런지 단편소설집 《비》는 빠른 시일 내에 매진되었고, 중자오정은 이 돈으로 이전에 출판할 수 없었던 중리허의 장편소설 《리산농장》을 출간했습니다. 《문우통신》 작가진의 노력으로 중리허는 별세 후 점차 영향력을 발휘해 문단의 긍정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1983년 모금을 통해 가오슝(高雄) 메이농(美濃)에 있는 중리허 생가는 중리허기념관으로 개축되었습니다. 이는 타이완에서 시민단체에 의해 세워진 최초의 문학 박물관이자 첫 본성인 작가 박물관이며, ‘타이완문학’을 말하는 것조차 국가전복죄로 여겼던 1980년대에 본성인 작가의 근거지로 지금 타이완의 국가급 문학 박물관인 타이완문학관과 유사한 역할을 했습니다.
“만약 내가 더 멀리 보았다면, 이는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서 있었기 때문이다(If I have seen further, it is by standing on the shoulders of Giants)” 영국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의 말처럼, 중자오정과 중리허를 비롯한 작가들이 없었다면 일본 식민지 시대부터 쌓아온 문학 전통도, 1970년대 타이완 현지 이야기를 다루는 향토문학도, 지금 우리가 자랑하는 타이완문학도 없었을 겁니다. 선조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우리는 지금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습니다.
엔딩곡으로 메이농 출신 하카인 린성샹(林生祥)과 중융펑(鍾永豐)이 중리허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노래 ‘山歌一唱鍾理和’를 띄워드리며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포르모사 문학관>과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으로 RTI 한국어 방송의 안우산이었습니다.
▲참고자료:
1. 鍾理和、鍾肇政,《逆流:鍾理和與鍾肇政書信錄》。
2. 朱宥勳,《他們沒在寫小說的時候:戒嚴時期台灣》。
3. 朱宥勳,「史上最「純文學」的友誼——讀《逆流:鍾理和與鍾肇政書信錄》」。
4. 鍾理和數位博物館。



Rti 중앙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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