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월 한국과 타이완에서 공통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논란이 있습니다. 한국은 윤석열 대통령이 12.3 비상계엄 선포로 인해 ‘내란 수괴 혐의’를 받아 헌정사상 초유 현직 대통령이 구속되는 사건이 발생했고, 타이완에서는 입법원, 즉 국회에서 야당 의원들이 ‘헌법소송법’, ‘선거법’, ‘재정분배법’ 등 논란이 되는 법안들을 잇따라 통과시키자 지난 23일 라이칭더 총통이 ‘헌법소송법’ 개정안에 대해 사실상 이의를 제기하며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요청한다는 공식 입장을 표명했는데요. 공교롭게도 타이완과 한국, 한국과 타이완 모두 ‘법’ 문제가 국정 운영의 주요 논란거리고 대두되자 여야를 넘어 국가의 원수까지 개입하게 되면서 상당히 혼란스럽고 불안한 국내 정세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법원은 대개 혼란스러운 정치적 분쟁이 있을 때 이를 공정하고 정의롭게 종결할 수 있는 최후의 기관이라는 사회적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2025년 1월 타이완과 한국을 동시에 강타하고 있는 이슈인 ‘법’. 오늘 <대만주간신보> 시간에서는 타이완의 현대적 법 체계와 법원이 설립된 시기에 대해 이야기나누는 시간 갖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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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거슬러 타이완이 청나라 황제의 지배 하에 있었던 1895년 이전으로 돌아가본다. 당시 사람들 사이의 논쟁이 발생하면 사람들이 찾는 곳은 오늘날과 같은 법원이 아닌 ‘아문(衙門)’이었다. 옛날 관공서나 관청을 칭하는 용어인 ‘아문’ 중에서도 ‘아문차역(衙門差役)’은 관할 지역 내 행정 및 사법 업무를 수행하거나 수사 및 체포를 담당했다. 지금의 경찰과 법원의 역할을 동시에 하고 있었다 할 수 있다. 그러다 1895년 5월 8일, 시모노세키 조약이 발효되면서 타이완은 중국으로부터 일본에 할양되었고, 이로 인해 아문 역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같은 해 6월 17일, 일본 총독 가바야마 스케노리(樺山資紀, 1837-1922)가 타이완에서 정치의 시작을 알리는 ‘시정’을 선포하고, 10월 7일 <대만총독부 법원 직제>를 발표함으로써 타이완에 ‘법원(法院)’이라는 새로운 용어와 개념이 등장했다. 하지만 당시의 법원은 명칭만 법원일 뿐, 근대 서양 사법 기관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당시 타이완 사람들은 조국의 할양과 일본인의 지배에 큰 상실감과 고통을 느꼈고, 이에 반발해 ‘타이완민주국’을 조직해 일본의 식민 지배에 저항했다. 일본 총독부는 타이완에서의 저항을 진압하느라 바빴고, 법원의 재판관은 군인과 행정 관료들로 구성되었다. 즉, 전문 법조인이 아닌 사람들이 법원을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타이완에서 법원이 막 운영되기 시작했을 때에는 민사와 형사 사건 모두 1심제로 처리되었다. 이는 지방법원인 1심 법원, 고등법원인 2심법원, 그리고 대법원인 3심법원이 있는 근대 사법 제도의 3심제와는 엄연히 다른 양상을 띄고 있었다.
총독부는 타이완 통치 2년 차에 군정을 폐지하고 민정을 실시하기 시작하면서 1896년 5월 1일 <타이완총독부 법원조례>를 공포했다. 이 조례는 단 8개의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타이완에서 처음으로 지방법원, 항소법원, 고등법원이라는 3심제를 도입하며 근대적 사법 제도와 연결되는 계기를 마련한 조례이다. 법원 내 주요 직책인 ‘법관(法官)’, ‘검찰관(檢察官)’, ‘서기(書記)’도 이 조례 공포되면서부터 확립되었다.
같은 시기, 일본 본토에서는 법원을 ‘재판소(裁判所)’라고 불렀고, 법관은 ‘판사(判事)’, 검찰관은 ‘검사(檢事)’라고 불렀다. 타이완총독부가 ‘법원’이라는 용어를 채택한 것도 기존의 일본에서 이미 존재하고 있던 ‘임시법원’과 ‘고등법원’에서 차용한 용어이다.
2차세계대전 후 타이완은 국민당 정부에 의해 접수되었지만, 일제시기 때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법원’이라는 명칭은 여전히 유지되었다. 이는 국민당 정부가 타이완 현지 관습을 따랐기 때문이 아니라, 중국의 사법 제도 역시 같은 시기 유럽과 일본의 영향을 받아 ‘법원’이라는 같은 명칭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전통 법률 체계와 서양의 근대 법제는 근본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었다. 일본 식민 통치 중에 서양 법제 개념이 타이완에 도입되면서, 타이완 사람들의 사법 생활도 크게 변화할 수 밖에 없었다. 과거 청나라 때 아문에서 무릎을 꿇고 청원하는 방식은 사라졌고, 검찰이 형사 사건을 담당하면서 민법과 민사소송법, 상법을 아울러 이르는 현대적 ‘민사법(民事法)’ 개념이 등장한 것이다.
근대 민사법은 개인 간의 가구(가정), 혼인, 토지, 금전 등의 권리와 의무를 규율하지만, 청나라 법률은 개인 간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하는 근대적 민사법과 달리, 한 가지 형법으로 모든 민사 관계를 포괄했다. 예를 들어 돈을 빌리고 빚을 갚지 않는 문제는 단순히 채무자의 엉덩이를 매질하여 처벌하는 방식으로 해결되곤 했다. 근대적 사법 체계가 타이완 사회에 들어오기 시작한 일본 식민 통치 초기에 타이완 사람들은 변호사 비용을 판사를 매수하기 위한 뇌물로 오해하는 경우도 꽤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오해가 생긴 배경은 1867년에 타이난에 정착했던 스페인 신부 프란시스코의 서신에서 문화적 맥락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솔직히 말해서, 이곳의 지배자는 돈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며, 어떻게 주머니를 은화로 채워 부자가 될 것인가만 생각한다. 일반 백성들도 돈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관아에 고소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돈이 있더라도 반드시 원하는 결과를 얻는다는 보장은 없다. 왜냐하면 관리들이 돈을 받고도 원고를 도와주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성들은 피해를 입으면 관청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기보다는 사적으로 복수하거나 개인적인 처벌을 통해 원수를 갚는다. 여기에서는 본토인과 객가인 사이에 종종 무력 충돌이 발생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근대적 서양을 모델로 한 법원이 도입되면서 ‘변호사’라는 직업이 새롭게 등장한 것이 지금의 현대인들에게는 당연한 일이지만, 100년 전 타이완에서는 일본이 도입한 ‘변호사’라는 직업이 새롭고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었던 것이다. 일본 본토에서도 과거 서구를 여행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변호사라는 직업을 생소해하며 ‘대언사(代言師)’ 대언인(代言人)’이라고 번역하기도 했었다. 그러다 1893년 ‘변호사법’을 공포하며 공식적으로 변호사라는 명칭을 확정한 이후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타이완에서도 1900년 ‘대만 변호사 규칙(臺灣辯護士規則)’이 공포되었으며, 일본인 변호사들이 타이완에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국립대만대학교 법학과 왕타이성(王泰升) 교수가 저술한 <대만 일제시기의 사법개혁>에 따르면, 일본 식민 통치 시기 50년 동안 타이완에서 활동한 변호사의 수는 최대 177명을 넘지 않았으며, 1921년 이전까지는 타이완 출신 변호사는 한 명도 타이완에서 개업한 적이 없었다.
그러다 타이완 사회에서도 점차 변호사의 역할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변호사의 지위는 매우 높아졌다. 예를 들어, 타이완 동북부 이란(宜蘭) 출신의 변호사 천이숭(陳逸松)이 도쿄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한 뒤 1932년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고향 인근의 기차역에서는 큰 환영 행사가 열렸다고 한다. 당시 읍장도 마중을 나왔으며, 행사에서는 악기 연주와 연극 등 화려한 공연으로 변호사가 되어 돌아온 그를 반겼다.
1935년 지방의회 선거 이후에는 일본에서 법학을 전공한 타이완 사람들이 타이완 의회 중심 세력이 되었고, 변호사의 사회적 엘리트 지위도 확립되었다.
법원 내부에는 판사와 변호사 등 법조인이 있었고, 시설로는 각 재판을 진행하는 ‘법정’이 있었다. 일본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법정’이라는 용어는 ‘법률’, ‘항의’, ‘투표’ 등과 마찬가지로, 일본이 서양 문명을 도입하고 번역하면서 만들어진 일본식 한자어로, 이후 중국어에서도 직접 차용되어 계속 사용되고 있다.
일제시기 법정에서는 중요한 정치적 논쟁이 벌어질 때 양측이 법정 방청을 통해 맞섰다. 1923년 일본 총독부는 항일 운동을 이유로 대규모 검거를 단행했으며, 이때 많은 타이완 사람들이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다. 당시 법정에서는 방청권을 판매했으며, 이는 법정이 연극장처럼 운영되던 흥미로운 사례로 남아 있다. 80년 전, 법원이 극장처럼 입장권을 판매했다는 사실은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법원이 민중 영웅을 만들어내는 장소가 된다는 점에서, 과거와 현재는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Rti 중앙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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