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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파리 올림픽] 체육, 체력 증진을 위한 '운동'의 시작

  • 2024.07.30
대만주간신보
1932년 로스엔젤레스 제10회 하계 올림픽에 출전한 장싱셴(張星賢) 선수. 장 선수는 올림픽에 진출한 최초의 타이완인으로 알려져있다. - 사진: 국립타이완역사박물관

타이완 전체 인구의 95% 이상을 차지하는 한족(漢族). 타이완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한족들은 예로부터 문관을 중시하고, 무관을 경시하는(重文輕武) 전통적인 가치관이 있어 운동을 하는 문화가 거의 부재했다고 하죠. 1975년부터 1978년까지 중화민국 총통을 역임한 중국 쑤저우 출신의 옌자간(嚴家淦, 1905-1993) 전 총통은 과거 운동을 권하는 친구에게 “왜 굳이 외력을 써서 오장육부를 불안하게 하느냐?”라고 이야기했을 만큼, 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과거 베이징 대학 총장과 국민정부의 교육부 장관을 지낸 바 있는 장멍린(蔣夢麟, 1886-1964)은 1842년부터 1941년까지 중국의 역사와 자신의 반평생 인생을 그린 <서쪽으로부터의 조류(西潮)>라는 책에서 당시 중국이 서구에 비해 자연 과학이 발전되지 않은 원인 중 하나로 중국 학자들이 손으로 무언가를 하지 않고, 육체 노동을 경시하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청나라 말, 타이완 섬에 살던 한족들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몸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사회 계급이 낮은 사람들의 ‘노동’이나, 한족이 아닌 원주민들의 전통적인 수렵활동이 전부였죠. 지방의 유지나 한국의 양반과 유사한 한족의 신사(士紳) 계급은 집에서 아편을 피우며 시를 읊거나 글을 쓰는 등 육체를 움직이는 행위는 기본적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간혹 지주 집안의 사람들이 무예를 배운다면 그것은 같은 영토에 사는 원주민과의 전투에서 스스로를 방어해 자신의 영토를 지키기 위함이었죠. 

이처럼 타이완의 한족, 특히 상류층 사람들은 운동을 해서 몸을 관리한다는 개념보다는 오히려 몸을 움직이지 않아야 안전하다고 여겼습니다. 

타이완의 대표적인 갑부 집안인 반차오 린가(板橋林家)의 린슝징(林熊徵, 1888-1946)은 타이완 총독부의 평의원을 역임하고 화난은행(華南銀行)을 설립한 사람으로, 그는 린가 집안의 장손으로 태어나 할머니의 총애를 받아, 영유아기 때부터 고려삼(高麗蔘)을 먹어 살이 찐데다가, 할머니는 손자가 넘어질까 노심초사하는 마음에 집안의 하인을 시켜 매일 그를 부축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9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혼자 걸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하죠.   

일제시기 타이중에서 태어난 셰둥민(謝東閔, 1908-2001) 전 부총통은 그의 회고록에서 자신의 위에 형이 한 명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일찍이 세상을 떠나게 돼 다음에 태어난 자신을 가족들은 극진히 돌봤다고 기억하며, 특히 조부모님들은 같은 마을의 보통 아이들처럼 개울에 가서 수영을 배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청나라 말, 타이완에서 소위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외국인이었습니다. 전도 목적으로 단수이(淡水)로 온 캐나다 국적의 맥케이 목사는 매일 단수이 앞바다에 가서 수영을 했고, 영국의 선원은 단수이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며, 그 외 타이완에 온 외국 상인들은 크리켓 경기를 하곤 했다죠. 그러나 이런 공놀이를 알지 못한 타이완 사람들에게는 무용지물이었습니다. 심지어 많은 수의 여성들은 여전히 전족이라는 족쇄에 묶여 걷기 조차 힘든 상태였죠. 

육체를 사용하는 ‘무’를 경시하는 문화가 청나라 말, 심지어는 일제시기까지도 가족 내력으로 자리하고 있던 타이완 사회에 저항할 수 없는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일본의 식민통치를 통해서 말이죠.  

서양문화를 철저히 모방해오던 메이지 일본은 청나라로부터 타이완을 손아귀에 넣고는, 자신들이 스스로 근대화, 서구화 해오던 과정을 타이완 땅에 그대로 이식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 중에 하나는 바로 서양 스포츠입니다. 서구에서 유래한 각종 스포츠는 일본을 통해 타이완으로 속속 유입되기 시작했죠. 특히 근대식 학교라는 시스템을 통해 타이완 사람들은 부지불식 간에 체조, 운동회, 야구, 유도, 검도, 테니스 등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국민 체력 증진’을 위해 한창 ‘체육’이란 과목을 중시했던 일본 정부는 타이완 사람들에게도 체육 교육을 중시했습니다. 심지어는 체력검사가 학교를 입학하기 위한 자격 요건 중 하나였죠. 타이완의 최초 의학박사인 두총밍(杜聰明, 1893-1986)은 자신의 왜소한 신체로, 체력검사에서 좋은 결과를 받지 못해 당시 타이완 총독부 의학교에 붙지 못할 뻔 했다고 하죠. 당시 3대 직업학교 중 하나였던 자이농림학교 출신 천바오더(陳保德) 또한 체력검사를 통과해야만 자이농림학교의 필기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고 회고합니다. 체력검사에는 100미터 달리기, 1500미터 오래달리기, 멀리뛰기, 턱걸이 등이 포함되었죠. 초등학교 성적이 아무리 좋아도 체력검사에서 낙제할 경우 진학이 불가능했다고 합니다. 

의학교나 농림학교 외에 일반 학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타이베이에 소재한 타이베이제2중학교(현재 타이베이 명문고 중 하나인 청공고등학교[成功高中]의 전신)를 나온 장차오잉(張超英, 1933-2007) 전 외교관은 당시 입학 경쟁이 매우 치열했는데, 어려서부터 몸이 약하고 병이 많았던 자신은 체력검사가 걱정 돼 집 마당에 철봉을 놓고 그 밑에 모래 더미를 깔아 연습했다고 회고하며, 이때 실수로 넘어져 손목이 탈골돼 이 때 이후로 양 손목의 크기가 달라졌다고 말했습니다.

학생들의 체력과 운동이 입학시험에서만 중요한 건 아니었습니다. 중학교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체육 과목을 반드시 이수해야 하고, 심지어는 체육 시간 외의 체육 활동을 별도로 연마해야 했죠. 전 경제부 차장을 역임한 양지취안(楊基銓, 1918-2004)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중학교 1학년 때면 체조나 일본 검도나 유도와 같은 무도 중 하나를 반드시 선택해 이수해야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때 성적은 학교 총성적에 들어갔기 때문에 잘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덧붙이죠.  

앞서 언급한 자이농림학교에서도 학생들은 입학 후 매년 10km 마라톤 대회를 출전해야 했고, 검도와 유도를 연습해야 했다고 합니다. 특히, 한창 날씨가 쌀쌀한 11월부터 2월까지 학생들은 아침 4시에 유도복을 입고 집결해 몇 시간 씩 유도를 연습, 2~3주 정도 매일 훈련을 지속했다고 합니다. 명분은 추위에 저항하는 체력을 가져 겨울을 두려워하지 않기 위함이었다고 하죠. 

1932년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열린 하계 올림 대회에 출전한 타이완 최초의 운동 선수, 장싱셴(張星賢, 1910-1989) 역시 그의 초등학교 시절 일본인 선생님으로부터 그의 뛰어난 운동 재능이 발견되어 축구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학교에서 축구로 운동을 시작한 장싱셴 선수는 이후 육상부에 입단해 중장거리 달리기를 연습했고, 결국 타이완 전국 대회와 일본 도쿄에서 극동아시아 대회, 그리고 1932년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열린 제10회 하계 올림픽에까지 출전하는 명예를 얻게됩니다. 올림픽 경기가 한창 중이던 1932년 7월, 400m 허들 종목 예선 1조에 출전한 장싱셴 선수는 조내 4위를 기록해 본선에는 진출하지 못했습니다만, 타이완인 최초의 올림픽 출전 선수라는 기록을 얻게 되었습니다.   

장싱셴 선수는 이후 한국의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1936년 베를린 하계 올림픽에도 출전하는데요. 비록 두 선수 모두 일제 식민 통치 하에서 타이완인,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으로 출전했어야만 했지만, 훗날 역사는 이 둘을 타이완과 한국을 대표하는 역사적인 선수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프로그램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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