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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조선에 소개된 타이완 1. 1930년 <매일신보>에 연재된 ‘臺灣이야기'

  • 2023.04.11
대만주간신보
매일신보 1930년 11월 6일자에 실린 '臺灣이야기' 기사 - 사진: 한국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타이완과 한국은 일본 제국의 대표적인 두 식민지였죠. 타이완은 청일전쟁 직후인 1895년부터, 한국은 한일합방 이후인 1910년부터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1945년 일본이 제2차세계대전에서 패망하면서 물러날 때까지 타이완과 한국은 각각 50년, 35년이란 긴 시간동안 일본 제국의 식민통치와 문화권 아래에서 살 수 밖에 없는 역사를 겪어야했습니다.  

궁금해졌습니다. 일본 제국의 일개 지방으로 전락한 타이완과 조선, 서로 간의 왕래는 없었을까 하고요. 냉전시대 이후로 전세계가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체제로 양분화되면서 같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진영의 국가들끼리를 보다 사이가 가까워졌듯이요. 명, 청 시대에는 중화문명의 우산 아래 있었다가, 일제시기로 넘어오면서 일본어를 사용해야 하는 유사한 운명에 처했으니, 이 두 지역 사람들은 서로 간의 소통도 그렇게 어렵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거든요. 심지어 1935년 타이베이에서 개최한 타이완박람회에는 ‘조선관'이 있어 광화문과 경복궁, 백의(白衣)조선을 컨셉으로 조선을 소개하는 코너가 있었고, 1929년 경복궁에서 개최된 조선박람회에도 역시 대만관이 있어 타이완의 열대식물, 5대산업, 타이베이 성로(台北城樓) 등을 소개했다고 합니다. (하세봉 2004) 일본 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한 비운의 역사 속에서 타이완과 조선이 서로 교류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이 생긴 셈이죠. 그래서 오늘과 다음 주 2주에 걸쳐 <대만주간신보> 시간에는 ‘식민지 조선에 소개된 타이완’ 이라는 주제로 조선의 매체에서 타이완이 어떤식으로 소개되었는지 알아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타이완에 대한 소식은 1910년대부터 당시 한국의 잡지나 신문 등의 매체에서 가끔 소개되곤 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사건, 사고 위주의 단발적인 소식들 위주였죠. 그래서 한국인들이 타이완에 관해 심도있는 정보를 알기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다 1930년대 들어서자 신문을 중심으로 타이완에 관한 연재 기사들이 실리기 시작합니다. 오늘 소개할 연재 기사는 <매일신보> 1930년 11월에 연재된 ‘臺灣이야기'입니다. 1930년 11월 6일부터 18일까지 ‘臺灣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총 13편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당시 묘사된 타이완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한데요. 11월 6일에 실린 ‘臺灣이야기’ 시리즈 그 첫 기사는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상하(常夏, 늘 계속되는 여름)의 나라 대만! 말로만 듣고 보지 못한 이 미지의 땅은 조선 사람과 별로 직접의 관계도 없고 이해의 연줄도 닫지 않아 알려고 애쓰는 사람 역시 없었던 것이다. 옷이 좀먹지 말라고 넣어두는 장뇌가 나며, 눈 같은 흰설탕이 눈쌓이듯 쌓인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있을까? 이것도 왠만한 어수눈(어섯눈)이나 뜬 사람이라야 아는 것이요, 몇 걸음 더 나가서 제법 지식적으로 안다는 사람도 메이지 27~8년 일청전역 이후 일본이 당시 청국으로부터 전승의 갚음으로 받아온 새 영토라고 알뿐일런지? 그도 이것뿐이요, 대만이란 그 땅덩어리 속 사정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여기서 ‘메이지 27~8년 일청전역’은 1894년에 발발해 이듬해에 종결한 청일전쟁을 일컫는 말입니다. 글쓴이는 1930년 조선 사람들이 타이완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음을 알리며 시작합니다. 저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왜 글쓴이는 기존에 교류도 많지 않았던 타이완에 관한 기사를 왜 이 시점에 연재하기 시작했을까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글쓴이는 첫 편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 그럼으로 이번과 같은 대만의 대반란이 일어났다 할지라도 여기에 대한 조그마한 기초지식도 없는 조선 사람들은 연일 신문에 보도되는 반란 기사를 읽고서 경의의 눈만 크게 뜰뿐인 것이다.” 

<매일신보>에 실린 13편의 연재 기사는 1930년 타이완에서 원주민들이 일으킨 최대 항일 운동 소식을 접한 글쓴이가 해당 운동의 주동자인 타이완 원주민을 조선인들에게 상세히 소개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타이완에 대한 조선인들의 무지와 연재 기사의 목적을 알린 후 저자는 중국계의 본도인과 달리 말레이계통으로 일제시기에 소위 ‘생번’, ‘숙번’이라 불리던 원주민들의 종족 수와 인구 수를 간단히 언급하며 타이완에서의 원주민의 존재를 알립니다. 그렇게 시작한 기사는 말레이계 원주민의 생김새, 특유의 문화, 음식 등에 관해 연이어 소개하면서 타이완 원주민에 관한 비교적 상세한 묘사와 사진을 통해 조선 사회에 공개적으로 타이완 원주민을 소개합니다. 예를 들어, 

“번인들의 용모와 골격은 확실히 말래이인종의 특징을 구비하여 피부는 황갈색이요, 발은 흑색직모인데다가, 수염이 적고 체모가 더욱 적은 것이 특색이며 눈은 열명이 모이면 열명이 다 쌍커풀이 저서 인류학상의 소위 말레이안(눈)인데 키는 말레이 인종으로서는 중키이나 지극은(두 팔을 양쪽으로 펴본거리) 신장에 비하야 조금 긴것이 보통” 이라던지, 

“산아의 탯줄을 끊음에는 대개 금속을 사용함을 그리고 대나무 가지를 사용하여 포의는 집안속에 파묻으며 산아의 명명은 흔히 조부모나 또는 조상의 이름을 기초로하여 생후 이삼일 중에 부모 자신이 명명함이 보통”이라며 출산 관련 문화를 소개하기도 하고, 

“실로 그들에게 출초(出草)라는 무서운 만풍이 남아있는데 출초라함은 타생 또는 출생이라고도 하여 원래는 수렵의 뜻이였으나 뒤에 이르러 번인들이 사람의 목아지를 벼 오는 행위의 명사로 변한 것”이라며 이 악품으로 인해 청조도 원주민 통치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타이완 원주민에 관한 풍속과 인습에 대한 설명이 1편부터 5편까지 이어지고, 6번째 기사부터는 1600년대 네덜란드 통치를 시작으로 명, 청, 그리고 지금의 일본이 통치하기까지 각 시대 별 원주민 관련 정책과 갈등들을 소개합니다. 네덜란드 정부는 선교를 목적으로 교회당과 학교를 건축했는데, “맹렬히 전도사업에 노력한 결과 세례를 받은 자가 2000명 예수교의 의식으로 결혼한 자가 1000명에 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번인으로서 교의를 암송하고 또 토어로 번역된 시계 신앙조목 등을 넉넉히 읽을 줄 아는자 오십명을 채용하여 교사로 임명하고 매명에 한달 ‘1레알'씩의 봉급을 준 후 각 지방에 파견하여 교화에 종사케하였다.”며 네덜란드인과 타이완 원주민 간의 비교적 평탄한 관계가 유지되었음을 언급한다. 이후 일본이 타이완을 통치하면서 교육기관도 설지하고 각 부족의 번지 개발에도 최선을 다했다며, 10번째 기사에서는 타이완총독부에서 설치한 원주민 공학교의 수업 광경 사진을 실으며

“일본인으로 번지내에서 각종의 사업을 경영하는 사람의 수요가 증가됨에 따라 이해의 충돌과 미신으로인한 출초 등으로 일본 이민의 목을 자르기도하고 또 경비원을 습격하여 무기를 탈거하는 일이 비일비재함으로써 일방으로는 그에 대한 방비기관을 설치하여 번인들을 억압하고 또 그 달은 한편으로는 번동을 교육하기 위하여 학교를 설치하여 혹은 번인에게 농업공예를 교수함으로써 개발계도의 중심을 삼어서 그들 번인의 환심을 사기에 전력을 경주케 되었다.”

라며 일본 정부의 원주민 정책과 그 동안의 행보에 대해 긍정적으로 묘사합니다. 마치 네덜란드의 사례와 유사한 것 처럼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주민들은 우사 사건을 일으켜 각종 피해와 희생자를 야기했다고 11번째 기사에서는 소개합니다. 제목에서부터 “무지몽매한 미신으로부터거나 혹은 쓸데없는 이해의 관념으로”라면서 전국적으로 타이완 원주민들 사이에서 국지적인 폭동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일반 공학교를 졸업한 번인들로서 성적이 양호한 자에게는 순사보 혹은 공학교의 조교원으로 채용도 하고 번인요양소를 설치해 번인들의 감화 및 그들의 시료기관으로 삼는 등 번인교화에 전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일본정부에서 이같이 그들의 위무와 감화에 진력을 경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번족의 반란은 시시로 꼬리를 이어 여전히 행하니(...)”  

11월 18일 마지막으로 연재된 기사의 말미에는 이번에 타이완에서 이런 분란을 일으킨 원인을 각종 추측과 풍설로 던져놓은 채 그 중에는 어떤 것이 주요 원인인지 알 수 없다며 글을 마무리했다.

1930년 11월 식민지 조선 소개된 타이완 관련 소식은 단순히 타이완 원주민에 관한 소개를 넘어 동시기에 타이완에서 벌어진 대표적인 항일 봉기인 우서사건을 알리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논조는 원주민들의 다소 미개한 풍습과 잔혹한 문화의 일면을 드러내고, 한편 일본 정부는 교육과 발전을 기반으로 한 대 원주민 정책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고 강조하면서 우서사건의 책임을 원주민들에게 돌리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기사가 연재된 <매일신보>가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였던 만큼, 일본 정부의 식민 통치에 유리한 정보와 논조를 중심으로 타이완을 조선에 소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다음주에는 그 이듬해인 1931년 8월 ‘대만기행'이란 제목으로 연재된 또 다른 기사에 대해 소개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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