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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사건사고, 버스와 태풍!

  • 2025.06.03

오늘날과 같이 승객을 태우는 버스는 타이베이시에서 1913년에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1년도 못 가 사라졌습니다. 어느정도 시스템을 갖춘 버스가 본격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한 것은 1919년입니다. 버스 운영 체계는 여전히 미숙했지만 말이죠. 당시 버스는 민간에서 운영했고, 버스 차량은 지금의 소형버스보다도 작았습니다. 1920년경 타이베이 시내를 돌아다녔던 버스를 보면, 차체는 높고, 타이어는 지금보다 얇았습니다. 버스 안 승객은 좌우로 마주 보며 앉았는데, 한쪽에 네 명도 제대로 앉기 어려웠을 정도로 차체가 작았습니다. ‘차’라고는 하지만 승객은 밀폐된 공간이 아닌 열린 공간이었습니다. 창문도 없었고, 지붕에는 천막을 덮어놓아, 마치 오픈카를 타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당시 버스에는 지금은 사라진 직업, 바로 ‘차장(車掌)’이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안내양’이라고 알려져 있는 차장이 타이완에도 있었습니다. 타이완도 한국와 마찬가지로 일제시기 이후 한동안 버스에 차장이 있어 승객들로부터 요금을 받고 휘슬을 불어 운전수에게 하차 신호를 알리는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제시기 전후 차장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바로 성별입니다.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일제시기 타이완의 차장은 대부분 남성이 맡았습니다. 

그런데 일제시기 남성 차장은 버스 안에서 여러 풍기문란 사건을 일으키면서 사회문제가 되었습니다. 1920년, 한 독자가 투고한 기사에 따르면, 타이베이 다다오청(大稻埕)과 멍자(艋舺)를 오가는 버스에는 여학생이나 간호사 등 젊은 여성 승객이 많았는데, 왕씨와 예씨 성을 가진 두 남성 차장이 차가 정차하거나 내릴 때 여성 승객들을 손과 발로 성추행을 일삼았다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2년 후, 버스 회사는 차장을 두는 게 문제가 많다고 판단해 남성 차장을 없앴고, 1928년 3월 12일에야 타이베이 버스에 처음으로 여성 차장을 새로 임용했습니다. 임용된 여섯 명 중 네 명은 타이완 여성이었습니다. 

그때 그 시절, 논두렁에 떨어진 버스!       

일제시기 버스와 관련해 또 다른 에피소드도 있습니다. 1924년 8월, 큰 태풍이 지나가자 도시 곳곳이 물에 잠겼습니다. 타이베이 공관(公館)에서 신뎬(新店) 사이에는 소수레와 손수레가 끊임없이 오가며 재해 복구에 필요한 자재를 나르고 있었습니다. 24일 저년 8시 즘, 가로등이 거의 없던 당시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50번 버스가 신뎬에서 13명의 승객을 태우고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버스 운전사가 소수레를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늦어버렸죠. 소수레와 버스가 부딪혔지만 다행히 큰 사고는 아니었고, 운전수는 버스를 수리할 수 있는 밝은 곳을 찾고는 다시 운전대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못가서 예상치 못했던 사고가 또 다시 일어났습니다. 수리를 마친 버스가 계속 앞으로 나아가다, 핸들을 약간 돌렸는데 차가 그대로 논두렁으로 빠지고 만 것입니다. 방금 전 소수레와의 충돌보다 훨씬 더 큰 피해를 야기했습니다. 신문에는 차체가 ‘완전히 박살났다’고 보도했습니다. 버스에 타고 있던 일본 경찰, 고다(光田) 씨는 코뼈를 다쳐 피를 흘렸고, 타이완인 승객 7명도 경중상으로 부상을 입었습니다. 큰 도로 위를 활주하는 지금의 버스와 달리 100년 전에는 다다오청이나 멍자와 같은 타이베이 주요 도심을 벗어나면 사방이 농지였고, 도로는 매우 좁았습니다. 그랬기에 작은 실수로도 차체가 바로 논두렁으로 빠져버리는 사고가 잦았던 것이죠.   
 

태풍이 오면 소금이 부족했다?!

1911년, 당시에도 타이완 의 여름은 여전히 무더웠고, 태풍은 한여름을 뚫고 몰려왔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의 재해 풍경은 지금과는 크게 달랐습니다. 이 해 8월 말에 닥친 태풍은 맹렬한 비바람을 동반했고, 타이베이는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당시에는 “수십 년 만에 처음 보는 일”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신뎬시 남쪽 강변 일대는 온 마을이 물에 잠겼고, 깊은 곳은 수심이 10척(약 3미터)을 넘었습니다. 지금의 1층 건물보다도 더 깊었습니다. 당시 그 지역은 아직 농촌이었고, 대부분이 대나무로 엮은 가건물에 불과해, 물난리가 나면 도망칠 ‘2층’ 같은 공간이 전혀 없었습니다. 멀리 바라보면, 피할 수 있는 높은 곳이라곤 지붕 위나 조금 높은 풀더미뿐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무 위로 기어올랐고, 어떤 사람은 대나무 끝에 매달렸으며, 또 어떤 사람은 식탁과 의자를 쌓아 올려 가족 모두가 그 위에 올라가 있었습니다.

신뎬시 북쪽의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강가의 육지가 이미 호수나 바다처럼 변해 파도가 몰아쳤고, 총독의 별장도 물에 잠겼습니다. 사방이 물로 가득한 가운데 남녀노소의 구조 요청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어떤 사람은 지붕 위에, 어떤 사람은 물속에 뜨거나 가라앉거나 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경찰이 장정들을 이끌고 작은 나무배를 저어 구조에 나섰고, 200명을 구조해 냈습니다.

100년 전, 평민들의 집은 너무 약해서 강풍과 폭우 한 번이면 견디지 못했습니다. 태풍이 지나가고 나면 집이 무너지고, 밥을 지을 부엌도, 먹을 쌀도 없어지는 사람들이 한 무더기씩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태풍 피해 이후에는 늘 자비로운 부자들이 등장했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의 신베이시 중허구에 속하는 장허좡에서는 수백 명의 이재민이 부자 린메이칭의 집으로 모두 피신했습니다. 신문에 따르면, 그의 집은 막 새로 지어졌고 “견고하여 무너지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벽돌집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린메이칭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몇 백 근의 쌀로 밥을 지어 이재민들이 굶지 않도록 했습니다.

다룽둥 쪽의 부자 천 씨도 인근 소작농을 불러 죽을 쑤게 하여,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모두에게 따뜻한 한 그릇을 제공했고, “태풍이 사람을 쓰러뜨리지 못하게 했다.” 이렇게 부자들이 쌀을 기부하고 죽을 나눠주는 것이 옛날 태풍 재해 이후의 전형적인 풍경이었습니다.

오늘날 타이완 사람들은 태풍이 지나간 뒤 단전, 단수는 간혹 겪는다면, 1929년의 타이베이 사람들은 소금이 부족한 상황을 겪었습니다. 신문에 따르면, 태풍의 영향으로 타이베이 시내에서는 “작은 가게에 가도 다들 소금이 없다고 했고, 각 가정은 매우 고통스러워했다.” 이유는 철도 운행이 중단되면서 타이난에서 소금을 운반해 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태풍이 채소값을 올리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80~90년 전, 타이베이의 주요 채소 산지는 신좡, 반차오, 스린 등이었고, 매일 대다오청 시장에 모였다가 소매로 유통되었습니다. 1924년 8월 초, 태풍이 휩쓸고 지나가자 채소 가격이 “폭등”했습니다. 신문에는 무 가격이 이렇게 보도되었습니다:

“4일에 4위안, 5일에 5위안, 6일은 교통이 끊겨 출하 없음, 7일에 6위안, 8일에 8위안.”

이 기사를 읽는 사람들마다 가슴이 두근거렸을 것입니다.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프로그램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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