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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기 중국에서 ‘민족 투사’로 활약한 타이완 의사 옹쥔밍(翁俊明)

  • 2025.05.06
대만주간신보
1913년, 타이완 청년들이 위안스카이 암살 목적으로 베이징으로 향하기 전 타이베이신공원(현 228 공원)의 한 카페에서 사진을 찍었다.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에 있는 인물이 옹쥔밍이다. - 사진: 민보

1893년 타이난에서 태어난 한 소년은 만 세 살에 한자를 익혔고, 열세 살 전까지 경서를 읽었으며, 글을 지으며 시를 쓰는 수재였습니다. 그러나 출생 후 얼마되지 않아 시작된 일본의 식민 통치 하에 그는 총독부 교육 체제 하에서 성장해야만 했습니다. 당시 타이완 전국에서 가장 총명한 인재들이 모인다던 타이완 유일의 의과학교인 ‘총독부 의학교’에서 공부해 의사 자격증을 딴 그는 타이완에서 환자들을 돌보며 안락하게 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반일(反日)’ 민족운동에 가담해 타이완을 넘어 중국으로까지 진출합니다.  

옹쥔밍(翁俊明, 1893-1943). 그는 끝내 타이완의 해방을 보지 못한 채 1943년에 사망했습니다. 1893년에 태어나 1943년에 사망하기까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짦은 50년이라는 한 생애동안 그는 타이완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국적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자신과 민족의 운명을 전복시키고자 의사이자 민족운동자로서 사활을 걸며 살았습니다. 

오늘 <대만주간신보> 시간에서는 옹쥔밍의 생애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시간 갖도록 하겠습니다.

타이난 수재에서 총독부 의학교 졸업생으로

타이난의 한 한의학 집안에서 태어난 옹쥔밍은 세 살 때 글자를 익히고, 여섯 살 때부터 그의 아버지이자 한의학자인 옹샤오환(翁紹煥)으로부터 시문과 한학을 배웠습니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옹 가문에서 처음 타이완에 온 시조는 정성공(鄭成功)의 군대에서 복무했던 한의사라고 합니다. 그는 타이난 스먼자오(石門腳)라는 곳에 정착했고, 옹쥔밍은 대를 이어 한의학을 공부한 집안에서 태어났죠. 

그러나 그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타이완은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그는 집안에서 배웠던 전통적인 한학이나 시문 대신 일본식 근대 교육 체제 하에서 훈련을 받아야했습니다. 1905년 타이난 제1공학교를에 입학했고, 1909년에는 타이베이에 소재한 타이완의 유일한 의학전문학교, 총독부 타이베이 의학교에 진학해 서양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타이완 의학의 아버지’라고 알려져있는 타이완 1호 의학 박사 두총밍(杜聰明)과 동문으로 총독부 타이베이 의학교에서 함께 서양의학을 공부했습니다. 동급생이었던 두총밍과는 단순히 학우일 뿐 아니라, 중서의학을 통합하겠다는 큰 뜻을 함께 품은 동지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중국 동맹회 가입과 위안스카이 암살 시도

의학 공부를 하던 시기, 이때부터 옹쥔밍은 중국 정치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1910년 5월, 의학교 재학 중 중국 푸젠성 출신 유학생이자 중국 혁명동맹회 푸젠 분회의 회원인 왕자오페이(王兆培)의 소개로 그는 중국혁명동맹회에 가입했고, 의학교 내에 동맹회 타이완 연락소를 설립했습니다. 옹쥔밍은 혁명 사상을 전파하고 장웨이수이(蔣渭水)를 비롯해 당시 타이완의 의학교와 국어학교 학생 76명을 핵심 회원으로 끌어들이는 등 조직 확장에도 책임을 맡았죠.

중국 동맹회에 가입한 청년들 사이에서 혁명 열기가 뜨거웠습니다. 중국에서 위안스카이(袁世凱)가 황제가 되려 한다는 소식에 결국 분노를 참지 못하고 암살을 결의하기까지 하는데요. 장웨이수이의 주도로 옹쥔밍과 당시 세균학을 연구하던 두총밍이 선출되었고, 1913년 두 사람은 일본 고베를 통해 중국 베이징으로 들어가 한 저수지에 콜레라균을 풀어 위안스카이를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의학교를 졸업한 옹쥔밍은 결국 1916년 중국 샤먼으로 건너가기에 이릅니다. 

샤먼에서의 활동과 일본과의 연결

샤먼으로 건너 가기 1년 전 그는 타이난 지역의 부유한 유지의 장녀와 결혼했고, 이듬해인 1916년 가족을 데리고 중국 샤먼으로 이주해  자신의 이름을 건 ‘쥔밍병원(俊明醫院)’을 개원했습니다. 타이완에서 의사 자격증을 취득한 옹쥔밍은 샤먼의 일본 영사관에서 발급한 의사 면허증을 보유해 샤먼에서 의사로서 생계를 이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딸의 회고에 따르면, 쥔밍병원은 서양식 병원이었지만 처방하는 약은 한약일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특정 질병에는 양약보다는 한약이 더 적절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죠.

타이완을 떠나긴 했지만, <타이완의학회지>나 타이완에서 발행되는 신문 등에 샤먼의 위생과 전염병 관련 글을 기고하는 등 타이완 총독부와의 관계도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샤먼에서의 병원 운영이 성공을 거두자  그는 다양한 인맥을 활용해 중국의 남북군 사이에서 정보 수집과 교섭 활동도 펼쳐가기 시작했습니다.

의료 사업 확장과 정보기관이 된 병원

옹쥔밍은 샤먼의 쥔밍병원 외에도 1923년 4월, 상하이에 병원을 설립했습니다. 여러 의사를 고용해 진료를 시작했는데, 당시 <신보(申報)>라는 잡지에 실린 병원 개원 관련 보도에 따르면 병원은 유럽·미국산 최신 의료 장비를 갖추고 있었으며, 독일에서 수입한 X 광선기와 전기치료기 등도 설치되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병원 3층에는 입원 병동도 마련되었을 정도로 규모가 큰 병원이었죠. 

이 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샤먼과 상하이에 중화의학학교도 설립했습니다. 과학적인 방법으로 한의학을 연구하고, 한약을 서구화하여 효능이 뛰어난 한약 제조공장을 만들기 위한 목적이었죠. 

중요한건 그가 의사로서의 활동 외에도 정보 수집 및 정치적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옹쥔밍은 총독부에 보고서를 제출하여, 일본에 유리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병원 설립이 효과적이라고 제안했습니다. 당시 총독부 전매국장(池田幸甚)은 “옹쥔밍 같은 인물이 열 명 있다면 많은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며, 의학교 졸업생 중 ‘동아시아 공존의 대의를 이해하는 자’를 선발해 그의 병원을 정보기관으로 활용하자고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1930년대 초, 총독부는 옹쥔밍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1932년 문서에는 그를 "성격이 음험하고, 이익을 탐하며, 필요할 경우 배신도 마다하지 않는 인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는 앞서 소개한 총독부 전매국장의 평가와는 대조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5년 총독부가 지원한 ‘샤먼 금융조합’ 에 참여하는 등 양측 관계는 완전히 단절되지는 않았습니다.

일본국적에서 중국국적으로 

그러나, 옹쥔밍은 결국 일본 국적을 포기합니다.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일본 국적을 포기한다고 선언했고, 1938년 일본군이 샤먼을 점령하자 홍콩으로 피신하는 등 일본과의 관계를 단절했습니다. 1940년에 옹쥔밍은 충칭(重慶)을 방문해 ‘타이완혁명동맹회’에 가입하였고, 국민당 중앙조직부 주자화(朱家驊)의 발탁으로 타이완성당부 준비처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명령을 받고 홍콩에 ‘중국국민당 직속 타이완당부 준비처’를 설립했으며, 1943년에는 이를 비밀리에 푸젠성 장저우(漳州)로 옮겨 ‘중정병원’을 세우고 이를 은폐 수단으로 삼아 당부 조직을 이어갔습니다. 1943년 3월 8일, 옹쥔밍은 ‘중국국민당 직속 타이완당부 집행위원회 주임위원’으로 임명되었죠. 이는 훗날 국민당 타이완성당부의 전신이자 초대 주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동지들과 포부를 나누며 두 가지 목표를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첫째는 광복 후 일본이 타이완에 설립한 ‘타이완 남방 열대 의학 연구소’를 인수하여 심화된 의학 연구를 이어가는 것, 둘째는 고향 타이난으로 돌아가 어린 시절 좋아하던 사목어(虱目魚, 밀크피시)를 다시 먹는 것. 그러나 그의 뜻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1943년 11월 18일, 음식과 함께 나온 술에 독이 타여 독살되었기 때문이죠.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타이완 의사의 생존전략

옹쥔밍의 삶은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타이완인이 어떤 이중적 정체성과 생존 전략을 가졌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실제로 일제치하에 많은 타이완 의사들이 중국에 대한 동경으로 본토로 향했다고 합니다. 개인의 동경 외에도 1900년대 후반부터 타이완 의사들이 샤먼 등지로 진출해 병원을 개설하거나, 박애회병원에 취직하는 흐름이 있었는데, 이는 단순한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총독부의 대중(對中) 정책의 일환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중일전쟁이라는 역사적 선택의 기로에서, 옹쥔밍은 중국을 선택했습니다. 그의 딸은 아버지를 회고하며, 아버지 옹쥔밍의 일생을 종합적으로 돌아보면, 혁명이 그의 주된 인생 과업이었고, 의사라는 직업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부업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의사들이 한 지역에 정착하여 환자층을 키우는 반면, 아버지는 혁명 활동으로 인해 한 지역에 오래 머물며 병원을 운영할 수 없었다고 하죠. 결국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국가와 민족주의였고, 그 다음이 개인의 의학적 이상 실현이었다고 말합니다.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프로그램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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