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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칠세부동석?! 일제시기 타이완의 남녀유별 문화

  • 2025.01.21
대만주간신보
'젠중(建中)’의 전신인 타이베이제1중학교와 ‘베이이뉘(北一女)'의 전신인 타이베이제1고등여학교. -사진: 左岸文化出版

타이완 전국을 대표하는 명문 고등학교가 있습니다. 바로 ‘젠중(建中)’이라고 불리는 타이베이시립젠궈고등학교(臺北市立建國高級中學)와 ‘베이이뉘(北一女)'라로 불리는 타이베이시립제1여자고등학교(臺北市立第一女子高級中學)입니다. 100년 넘은 역사를 자랑하는 두 고등학교는 각각 남고와 여고 중 타이완에서 가장 명문으로 꼽히는 학교입니다. 2003년 11월, 남학교와 여학교를 대표하는 두 명문고 간의 농구 시합이 사상 처음으로 열려 타이완 전역을 뜨겁게 달군 적이 있습니다. 신문은 두 학생들의 치열한 농구 경기 장면을 사진으로 실으며, “젠중과 베이이뉘 창립 100년 만의 첫 대결”이라고 소개했죠. 

당시 남녀 성대결이란 점에서 화제를 끌기도 했지만, 100년 넘은 역사를 자랑하는 두 학교가 2000년대가 되어서야 공식적으로 함께 운동경기를 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에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남학생과 여학생이 한 체육관에서 이렇게 가까이 접촉하며 운동경기를 하고 서로 응원을 주고받는 모습은 두 학교가 갓 설립되었을 때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죠. 

오늘 ‘대만주간신보’ 시간에는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도 다가갈 수 없었던 일제시기 타이완의 남녀학생들의 문화에 대해서 소개하는 시간 갖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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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중’과 ‘베이이뉘’란 학교가 설립된 일제시기, 당시의 학생들도 오늘날과 같이 열정적이었지만 사회적 기준과 잣대는 남녀학생을 철저히 분리해 강제로 떼어놓았다. 

1929년 <대만민보(臺灣民報)>는 “타이난제2여고에서 운동회를 열었을 때, 학생의 부모 형제는 초대장을 지참하면 학교에 들어올 수 있었지만, 일반 남성은 입장이 금지되었으며, 특히 또래 남고생은 절대로 출입이 불가했다”고 보도했다.

일제시기 당시 타이완 전국의 3대 직업학교로 손꼽혔던 자이농업학교(國立嘉義農業專科學校)의 졸업생이자 전 대만성 체육회 이사였던 천원옌(陳文炎, 1925년생)은 구술 역사책에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2학년 때 4학년 선배 장톈장(蔣天降)과 함께 몰래 자이여고(嘉義女高)의 운동회를 보러 갔어요. 당시 남학생들은 여학교 운동회를 관람할 수 없었는데, 우리는 여자 학생들의 운동 종목이 어떤 것인지 궁금했죠. 자이여고의 울타리는 낮은 오렌지자스민(七里香)나무 덤불로 되어 있었는데, 그걸 헤치고 들어가서 봉황목 나무에 올라가 몰래 봤어요….”

그러나 얼마지나지 않아 일본인 교사가 자이여고에 몰래 들어온 학생들을 잡으러 왔고, 천원옌과 선배는 결국 발각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자이농업학교는 3일 동안 교무 회의를 열었고, 가장 심각한 처벌인 퇴학까지 고려되었다. 하지만 한 일본인 교사가 “남학생들이 볼 수 없는 운동회라면 애초에 열지 말았어야 한다”고 문제를 제기하며 다른 교사들의 공감을 얻어, 결국 두 학생은 처벌받지 않고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1940년경에 일어난 이 사건은 당시 타이완의 여학교와 남학교 사이의 구별이 얼마나 엄격했는지 말해준다. 

사실, 남녀가 구별되어 공식적인 자리에 함께 하지 못하는 역사는 타이완이나 일본, 동아시아를 넘어 유럽에서도 존재했다. 알렌 구트먼의 <여성운동사>에 따르면, 근대 올림픽 창시자인 피에르 드 쿠베르탱은 1896년 아테네 올림픽을 개최하며 전 세계의 젊은이를 초대했는데, 여기서 “젊은이”에는 여성이 배제되어 있었다. 여성이 참여하면 “관중들이 경기를 보러 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보러 올 것”이라는 이유로 강력히 반대했던 것이다. 30년간 여성의 올림픽 참여에 저항한 쿠베르탱은 결국 1937년에 되어서야 “여성들이 원하는 스포츠를 하게 하되, 공개적인 장소에서는 하지 못하게 하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1913년 독일 천주교 주교들은 여자들이 대낮에 체조 경기를 하는 것을 강하게 비난했고, 14년 후에도 남성 관객이 몰릴 것을 우려해 여성 체조 대회를 완전히 취소하기도 했다고 한다. 

타이완에서 남녀가 접촉하는 것을 운동장에서만 금지한 것은 아니었다. 타이완 최초의 여의사인 차이아신(蔡阿信, 1896년생)은 19세에 도쿄여자의전에 입학했으나, 4학년 때 심각한 천식으로 타이완에 돌아와 한 학기를 휴학했다. 하지만 학업이 늦어질까 봐 걱정한 그녀는 총독부 의학교 교장을 찾아가 청강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했으나, 교장 호리우치 츠기오(堀內次雄)는 남녀 학생이 같은 교실에서 수업을 듣는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고, 차이아신의 거듭된 요청 끝에 이를 허락하며 남녀 분리 교육의 규칙이 잠시 깨지기도 했다. 

차이아신은 1925년에 타이중에 산부인과 병원을 설립하고 조산사 학교도 운영했다. 그곳의 학생 중 한 명인 양진자오(楊金釗)는 나중에 타이중 우펑(霧峰)의 명문가인 우펑 린가(霧峰林家)에 시집갔는데, 그녀는 명문가의 규율에 대해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할머니 생일날 하루 종일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못했습니다. 남자를 함부로 마주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조산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유롭게 나가서 일을 하겠다고 말할 용기도 없었죠.”

남녀 접촉이 금기로 여겨졌던 당시 가장 비극적이었던 이야기는 신주(新竹)의 한 중학생과 관련된 일이다. 정이중(鄭翼宗, 1913년생) 전 타이완대학 열대의학연구소 주임은 자신의 회고록(<歷劫歸來話半生>)에 신주중학교 3학년 시절 가을에 있었던 사건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친구 정추성(鄭秋生)은 일본인 여학생에게 연애편지를 보냈다는 이유로 정학을 당했다. 정학 기간에도 그 여학생의 집 근처를 서성거리자, 결국 학교는 퇴학 처분을 내렸다. 정추성과 의지하며 살던 그의 할머니는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고, 정추성도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게 되었다. 정이중은 이렇게 말했다.

“어느 날 그가 갑자기 저를 찾아와 명함을 내밀었어요. 명함을 보니 ‘정춘성(鄭春生)’이라고 적혀 있더군요. 그걸 보고 저는 너무 놀라서 등골이 오싹했습니다. 한 통의 연애편지 때문에 이런 대가를 치러야 했던 걸까요?”

자신의 이름을 정‘추’성이 아닌 정‘춘’성으로 쓸만큼 정신이 혼미해진 친구의 상태에 정이중은 한 여학생을 좋아한 대가가 너무 가혹하다고 토로한 것이다.   

 

사랑과 연애를 갈망했으나 남녀가 접촉하는 것도 불경시 여기던 당시 ‘자유 연애’는 꿈도 꿀 수 없었다. 극장에서는 남녀 좌석이 따로 나뉘었고, 젊은 부부라 할지라도 관람할 때 함께 앉는 것이 관습적으로 허락되지 않았다.

소설가 우주류(吳濁流, 1900년생)는 자신의 회고록 <무화과(無花果)>에서 자신의 젊은 시절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당시에는 ‘연애’라는 단어조차 없었습니다.” 젊은 남녀가 함께 길을 걷는 것조차 금기였으며, “단 한 번 함께 걷기만 해도 여자는 천한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온화한 성격의 문학가였던 우주류가 “천한 사람”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정도였으니, 남녀 간의 교제가 세속적인 도덕의 틀 안에서 얼마나 엄격하고 가혹하게 비판받았는지 알 수 있다. 그는 “당시 남자는 여자를 생각하면 바로 결혼으로 연결되었고, 남녀 간의 교제는 공개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으며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조차 나눌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그에 따르면, 일제시기 당시에는 “남녀가 비밀리에 대화만 나누어도 간통으로 간주되었던 시대”였다. 그래서 그는 22세가 될 때까지 여성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어느 날 그는 여학생에게서 편지를 받았는데, “가슴이 심하게 뛰고 온몸이 떨려 어찌할 바를 몰랐다”고 회상했다. “그것은 러브레터였습니다. 몰래 한 번, 또 한 번 읽었죠.” 그러나 그는 자신이 “옛 관습의 노예”라며, “결혼으로 이어지지 않는 신성한 사랑은 부도덕하다고 여겼다”고 적었다.

그의 결혼도 결국 부모에 의해 결정되었고, 그는 훗날 이렇게 한탄했다. “생각해 보면,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혼조차 제 원래의 주장을 잊어버리고, 모든 것을 운명에 맡겼습니다. 그것도 제 나약한 성격의 단점 중 하나였겠지요.”

이와 같은 시대적 억압과 불편함 속에서 대만은 점차 변화의 바람이 조금씩 불기 시작했다. 1920년대 이후 ‘연애 결혼’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전통의 벽을 깨는 것은 여전히 힘든 일이었다.

 

     ►참고문헌

        陳柔縉, 《台灣西洋文明的初體驗》, 麥田, 2011.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프로그램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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