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완이 청나라의 한 지방에 속해있었을 당시, 법을 어기거나 죄를 짓는 사람들은 청나라 율법에 의거해 처벌을 받았습니다. 청나라의 형벌 제도인 오형 제도에는 사(死)·유(流)·도(徒)·장(杖)·답(答)이 있는데, 지금의 법 체계와 가장 다른 부분은 유기징역이라는 것이 없었고, 선고가 되면 일정한 유예기간 없이 바로 형이 집행되었다는 것입니다. 장형의 경우, 그 자리에서 대나무로 된 곤봉을 맞았고, 도형의 경우, 댐이나 큰 건축물을 건설하는 노동 현장에 죄인을 유배보내 짧게는 1년에서 길게는 3년동안 노동을 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사형은 말그대로 그 자리에서 죄인을 죽게 하는 것이고요. 따라서 지금과 같이 몇 년, 혹은 몇 십 년 간 감옥에서 옥살이를 하는 풍경이 청나라 때에는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청나라 때 감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용도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감옥의 역할이 아닌 아직 판결이 나지 않은 죄수들이나 사형 집행, 유형이나 도형 집행을 기다리는 죄수들이 잠시 구금하는 역할로 기능했었죠. 당시 타이완의 한 감옥을 시찰한 청말 후난 순무단 관원은 상소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고 합니다. “이 감방은 어두컴컴하고 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아 죄인들이 질병에 걸리면 상황이 많이 가엽다. 타이완에서는 돈을 내고 투숙하는 여인숙에까지도 돼지와 닭이 동숙하는데, 간악한 죄인을 구금하는 감옥은 얼마나 나을까”라고 말이죠.
타이완이 1895년 일본에 할양되면서, 타이완을 식민지로 소유한 일본은 20여년 전 자신들이 먼저 제도화한 서구식 형벌 제도를 타이완에서도 도입하기에 이릅니다. 1872년(메이지 5년)부터 일본은 ‘유기징역'을 기초로한 징역법을 실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타이완을 점령하자마자, 일본은 먼저 징역을 도입했죠. 그래서 일본 정부는 일본군에 저항하는 타이완 민병들을 징벌하기 위해 유기징역을 선고했으나, 아직 감옥을 짓지 못한 나머지 임시법원이나 경찰서 유치장 등에 그들을 임시로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896년 2월, 타이완 최초로 근대적 형벌 제도에 기초한 ‘타이베이 감옥(臺北監獄)'이 들어서면서 타이완의 형벌 제도는 새로운 풍경을 띄게 되었습니다.
타이베이 감옥이 일제시기 타이완 최초의 근대식 감옥이라지만, 건물은 청조가 남긴 관아를 개조한 것이라 시설은 매우 누추했습니다. 그래서 탈옥이 자주 발생하거나 죄수가 감옥 안에서 질병에 걸려 병사하는 일도 빈번했다고 하지요. 그래서 총독부는 1899년 타이베이, 타이중, 타이난 세 곳에 신식 감옥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타이완 총독부 세관사무관을 역임했던 이데 키와사(井出季和太)는 이 신식 감옥을 “유럽과 미국의 최신식 설계에 따라 옥 내 감방의 배치가 부채꼴 모양으로 배열되었다”라고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井出季和太, 《台灣治績志》1937)
신식 감옥의 설립만큼이나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은 형벌을 집행하는 제도와 관념이었습니다. 청나라를 비롯해 중국의 전통적인 형벌의 목적은 징벌과 보복으로, 사람을 죽인 죄인은 사형으로, 노략질한 죄인에게는 매를 가하는 등, 그래도 마땅하다라고 여겼죠. 그러나 서양의 근대식 형벌은 죄인의 회개와 재생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따라서 감옥에서 몇 년 간 옥살이를 통해 죄를 뉘우칠 수 있는 시간을 주어 출소 후 사회에 유익한 존재로 살아갈 것을 기대하죠. 따라서 일제시기 타이완의 감옥에는 ‘교회사(教誨師)’라고 해서 감옥 안에 있는 수형자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통해 교화하는 역할을 하는 직업이 있었습니다. 물론 교회사는 모두 일본인이었고, 당시 감옥에는 일본어를 못하는 타이완인이 대다수였던지라 말이 통하지 않아 교화의 효과가 제한적이었지만요.
감옥에 창문이 생긴 것도 작지만 인권과 위생을 중시하는 서구식 관념이 반영된 결과입니다. 앞서 언급했듯, 청나라 때 타이완에 있던 감옥은 창문이 전혀 없는 암흑천지로 공기마저 잘 유통되지 않아 죄인이 머무는 동안 그의 생사가 결정되기도 했는데요. 일제시기에 세워진 감옥에서는 수형자들을 대상으로 매일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거나, 변소의 변기를 매일 두 번 이상 청소하고, 식기나 복장, 침구 등에 햇빛을 쬐어 소독하는 활동이 요구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데 키와사(井出季和太) 씨의 글에 따르면 1897년, 즉 신식 감옥이 생기기 전 감옥 내 사망률이 47%에 달한 반면, 신식 감옥이 지어진 이후인 1902년에는 3%, 그 이듬해에는 2%까지 떨어졌다고 합니다.
일제시기 타이완에서 문학가이자 사회운동가로 활동한 장슈저(張秀哲, 1905-1982)는 도쿄제국대학 대학원을 졸업한 인재였지만, 일찍이 중국에서 항일 활동을 한 죄로 타이베이 감옥에 2년 간 투옥된 적이 있는데요. 그는 자신의 회고록(「勿忘台灣」落花夢)에 당시 옥중 생활에 대해 약간의 유머가 섞인 필체로 이야기합니다. 당시 타이베이 감옥 안에는 진료소가 있었고, 그 진료소에는 일본 국적의 노의사가 한 명 있었다고 합니다.
“매일 오전, 반드시 옥내 간수 어르신에게 보고하여 신청해야 한다. 꾀병을 핑계로 의사를 찾아도 괜찮다. 네가 두통이 있다하면 네게 ‘두통 약가루'를 줄거고, 네가 감기에 걸렸다고 하면 아스피린(ASPRIN)을 줄것이야! 배가 아프다고 하면 소화제를 줄거고! 모든 요구는 반드시 들어주니까 지병에 맞게 약을 투여하면 돼. 우리는 옥중에서 항상 일부러 꾀병을 부렸는데, 이러면 10여 분 동안 밖에 나가 산책할 수 있는 기회를 한 번 더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지!”
장슈저가 투옥했던 시기는 1920년대 후반으로, 그는 옥내 진료소 에피소드 외에도 ‘입옥 시 주의사항(入獄須知)’이라고 해서 옥내 각종 일정과 운영 방식을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감옥은 ‘미결수(미선고자)’의 독방과 이미 선고를 받은 기결수의 감방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미결수의 독방에는 현대식 전등과 변소, 수도꼭지 등이 있어 언제든지 물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미결수는 가족이 보내준 어떤 옷이든 자유롭게 입을 수 있었죠. 이를 안 장슈저는 일부러 중국 전통 의상을 입어 옥내에서 불굴의 뜻을 표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돈이 있는 미결수는 외부로부터 배달을 시켜 밥을 먹을 수도 있었다고 하는데요. 이렇게 옥내에 있는 수형자나 피의자, 피고인에의 차입을 대행하는 배달 전문점(?)을 일본어로 ‘사시이레야/텐(差入屋/店)’(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한창 전쟁 중이던 1941년 감옥살이를 하게 된 유명 의사이자 훗날 ‘타이완 문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라이허(賴和, 1894-1943)도 그의 <옥중일기>에 ‘사시이레야'를 통해 각종 음식, 이를테면 초밥, 덮밥, 우동, 심지어는 차나 바나나 같은 후식 등을 받아 먹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물론 돈이 없거나 배달을 원치 않으면 교도소 내에서 제공하는 밥을 먹어도 되었는데, 또 다른 타이완의 항일 지식인 장웨이수이(蔣渭水, 1890-1931)에 따르면 당시 옥중에서 먹는 밥은 품질이 매우 떨어지는 현미여서 먹기 힘들었으나, “항상 남쪽에서 힘들게 노동하는 농민들이 고구마쌀만 먹는 것보다는 낫다라고 스스로를 달래며, 문천상(文天祥)도 솥마저 달게 여겼는데, (옥내) 밥 속의 돌이 어찌 영양품이 아니겠는가?”라고 남기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일제시기에 설치된 근대식 감옥 제도는 여러면에서 옥 중 수감자들의 인권을 비교적 고려하는 행적을 보였습니다만, 감옥 내 어둠과 고통이 많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장슈저는 일본의 한 교도관이 특정 수감자를 마음먹고 때리면 한도끝도 없이 때렸는데, 손바닥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판자를 가지고 흉악하게 그의 뺨을 때려 코피가 바로 뿜어져 나왔다고 진술합니다. 1941년 반란으로 기소되어 무기징역에 처한 어우칭스(歐清石, 1897-1945) 변호사는 <옥중음(獄中吟)>을 남겨 당시 옥중 고문의 종류에 대해 상세히 묘사했는데, 여기에는 억지로 물 먹이기(灌水), 새우처럼 두 손 두 발을 묶어놓기(龍蝦綑), 손톱과 발톱 찌르기(挾指), 비행기처럼 매달려있기(飛機) 등 잔혹한 고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우칭스는 “열여덟 개의 고문을 고루 받으며 소리를 너무 질러댄 나머지 나는 여생을 거의 잃은 듯 했다"고 남겼습니다.
감옥에 들어간지 2년 만인 1943년 심장마비로 결국 생을 마감한 라이허의 <옥중일기>에는 그가 20대이던 1920년대 한창 일본에 투쟁하던 혈기왕성함은 사라진 채, 한없이 나약해진 한 인간의 불안함과 공포, 그리고 긴장감만이 남아있습니다.
►참고문헌
陳柔縉《人人身上都是一個時代》臺北:麥田出版, 2016.
張秀哲《「勿忘台灣」落花夢》,1947. 디지털 원문
賴和 《獄中日記》,1941-1942. 디지털 원문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Rti 중앙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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