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당 정부가 타이완에 남하하기 전에도 타이완에서 중화민국의 국경일인 쌍십절 행사를 경축했다는 사실은 꽤나 놀라운 사실인데요. 지난 주 소개해드렸다시피 중국인 노동자를 포함한 주타이완 중국인 수의 증가로, 당시 중화민국 정부는 1931년 린샤오난(林紹楠) 총영사를 타이베이로 파견해 주타이베이중화민국영사관을 공식적으로 개관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총영사인 정옌시(鄭延禧)가 재임했던 1933년, 일제 치하의 타이완에서는 가장 화려하고 성대한 쌍십절 행사가 타이베이에서 열리게 되는데요.
타이베이 철도호텔에서 열린 1933년 쌍십절 행사
어찌된 영문인지, 1933년 쌍십절 행사는 영사관이 위치해있던 에이라쿠초(永樂町, 지금의 디화제 일대)가 아닌, 당시 타이완에서 손꼽는 고급 서양식 호텔인 철도호텔에서 거행되었습니다. 아마도 당시 총영사인 정옌시가 프랑스 유학파 출신이라 이 장소를 선택했을 가능성이 있다고도 합니다. 실제로 그의 부인이 프랑스 국적의 여성이었죠.
지금의 타이베이 기차역 맞은편에 위치해있던 철도호텔은 타이완 총독부 철도부가 직영하는 타이완 최초의 서양식 식당이자 호텔로, 타이완을 방문한 일본 황족 및 재계 인사들이 모두 이곳에 묵었을 만큼, 1908년 완공된 후 2차세계대전 미군의 타이베이 공습으로 폭파되어 사라지기 전까지 당시 타이완 최고급 호텔의 자리를 영위하던 곳입니다. 호텔 외관은 붉은 벽돌의 독일식 건물로 지어졌고, 내부는 천장높은 홀과 거대한 샹들리에, 영국제 나이프과 포크, 도자기 등으로 장식되어 서유럽 느낌을 물씬 풍기는 장소였습니다.
타이베이 철도호텔의 외관. - 사진: 위키피디아
중화민국 쌍십절 행사가 열리던 그날, 정오 전부터 손님들이 잇달아 철도호텔에 도착했습니다. 주타이완미국영사와 이탈리아 영사, 그리고 흰색 문관복을 입은 총독부 소속 각종 일본인 장관들과, 타이베이제국대학 총장까지요.
큰 회의장 안 벽에는 당시 중화민국 국기, 청천백일만지홍기가 이곳저곳에 붙어 있었습니다. 오전 11시 40분 즘 주요 손님 50여 명이 모두 입장하자, 정옌시 등 중화민국 측 인원들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일본 관리들을 마주하고 앉았습니다. 칠순을 앞둔 나이에도 위엄을 잃지 않은 타이완 출신 경제인 구셴룽(辜顯榮, 1866-1937)도 이 자리에 함께 있었습습니다. 그 외에 타이완 출신으로는 천톈라이(陳天來, 1872-1939) 타이베이차상공회 회장도 있었습니다.
천톈라이의 부친인 천저리(陳澤栗)는 원래 유명 차상인 리춘성(李天生)의 요리사였는데, 리춘성은 천저리의 검소한 성품을 눈여겨 보고는 그를 발탁했다고 하죠. 타이베이 차 업계에서 리씨 가문은 1920년대부터 점점 빛이 바래진 반면, 천씨 가문은 나날이 번창해 중화민국 쌍십절 행사가 거대하게 열린 1933년에는 타이완 차 업계의 최고가 된 천톈라이가 참석했던 것입니다.
일본 총무장관의 축사를 시작으로 쌍십절 행사가 시작했고, 이어서 정옌시 중화민국 총영사가 답사를 했습니다. 답사 후 모두 잔을 들어 건배할 채비를 마치면 일본 총무장관이 대표로 다함께 건배를 하면서 공식적인 행사는 끝이 났습니다. 이때 시계는 12시 5분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공식적인 의식은 30분도 채 되지 않았던 셈이죠.
이렇게 중화민국주타이베이영사관에서 공식적인 국경일 경축 행사를 치루고 나면, 타이완에 거주하는 교민들도 별도의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타이완에 거주하는 중국 사람들이 날로 증가하자, 1920년대 초반부터는 민간 의식도 상당히 성대해져서 모임을 하면 적어도 3,000명 이상이 모이고, 일본 관리들도 참가하기 시작했죠. 당시 행사 식순을 보면 애국가 부르기, 강연 듣기, '중화민국 만세' 삼창에 이어 마지막으로 술집에 가서 다함께 회식을 했습니다. 수십 대의 자동차 행렬이 타이베이에서 거리 퍼레이드를 펼치며 축하하기도 했고요. 쌍십일이 되면 자신이 운영하던 가게도 휴점을 하고 가게 입구에 빨강, 노랑, 파랑, 하양, 검정 다섯가지 색의 가로줄로 된 오색기(五色旗)를 게양하기도 했습니다. 1912년부터 28년까지 북양정부에서 사용했던 국기이죠.
북양정부 국기가 1920년대 타이완의 가게에도 걸릴 만큼, 북양정부는 과거 중국 대표를 맡았으나, 1925년 국민당이 광저우에 국민 정부를 따로 세워 대치하기 시작하고, 1928년, 광저우 정부가 북벌해 중국을 통일하자 북양정부는 사라졌고, 이때부터 타이완에 거주하는 교민들도 비로소 오색기를 게양하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1937년 이후 중일 전쟁이 발발하면서 타이완에 거주하던 중화민국 교민들은 일부 타이완을 떠났지만, 여전히 약 4~5만 명이 계속 남아 자신의 생활을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1938년 2월 1일, 중화민국주타이베이영사관의 제3대이자 마지막 총영사인 궈이민(郭彝民)마저 배를 타고 타이완을 떠나자,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아 교민들은 즉시 자신들만의 대회를 열어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세웠고, 타이헤이초(太平町,지금의 옌핑베이루[延平北路])에서는 또 다시 다섯 개의 색으로 구성된 오색기가 펄럭였다고 합니다.
1940년대에 이르자 충칭에 있는 국민정부 외에 1940년 일본 제국의 도움을 받아 난징에 설립한 왕징웨이(汪精衛) 유신정부가 설립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41년 왕징웨이 정부는 타이완에 영사관을 재건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유지했습니다.
1933년 쌍십절 행사 이전, 주타이베이 중국 교민들의 각종 모임
사실 이렇게 공식적으로 영사관이 설립되기 훨씬 이전부터 일제 치사의 타이완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은 민간 차원에서 여러 모임들을 만들었습니다. 타이완에서 일본 정부와 교섭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입장을 대표할 수 있는 기관이 절실했던 것이죠. 중화민국이 개국하기 전, 타이베이에 거주하던 중국인들은 ‘청국회관(清國會館)’을 설립하기 위해 발족해 나섰고, 광서 29년인 1903년 설립인가를 받아 '타이베이 화민회관(台北華民會館)'을 공식 발족했죠.
중화민국이 설립된 이후인 1922년에는 "화교 구락부(華僑俱樂部)"가 설립되었고, 후에 "타이완중화회관(台灣中華會館)"으로 개편되어, 이듬해인 1923년 6월 다다오청 강산루(江山樓)에서 창립총회를 열었습니다. 당시 회원은 350명이었고, 타이완 전역에는 이미 약 3만 명의 교민이 있었죠. 그리고 이들은 1923년 처음으로 중화민국 국경일인 쌍십절에 오색기를 내걸고, 당시 국가였던 경운가(卿雲歌)를 부르며 국경일 행사를 치뤘습니다.
1922년 타이베이에서의 ‘타이완중화회관’ 설립을 시작으로, 1924년 가오슝(高雄)과 타이중(臺中)에도 중화회관이 설립되었고, 1925년 푸리에도 설립되었으며, 다시 1년 후 자이(嘉義), 화롄강(花蓮港), 지룽(基隆), 타이난(臺南), 치산(旗山), 베이강(北港), 뤄둥, 먀오리, 핑둥, 이란, 두류 등 타이완 각지에 중화회관이 설립되었습니다. 그리고 1927년 3월 타이베이에서는 각지의 회관을 통합하는 제1차 대표 대회가 열렸고, '타이완 중화 총회관(台灣中華總會館)'을 설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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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모임에서 시작해 1933년 가장 화려하고 성대했던 철도호텔에서의 쌍십절 국경일 행사까지… 고향을 떠나 타이완 섬으로 건너온 중국 교민들은 자신의 고향을 두고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정권의 움직임을 멀리서 지켜봐야했고, 청나라때부터 중일전쟁 때까지 정권의 변화에 발맞춰 나름대로의 각종 모임과 행사를 치뤘습니다. 비록 정권은 수시로 바뀌었지만, 고향을 향한 그들의 마음은 한결같았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참고자료
《台灣紀事》日本時代的中華民國雙十節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Rti 중앙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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