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기에도 타이완에서 중화민국의 국경일인 쌍십절 행사가 열렸다고요? 2024년 중화민국 쌍십절을 맞아, 2주간 일제시기 타이완에 거주했던 중국인 현황과 1933년 타이베이에서 성대하게 열린 쌍십절 행사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 갖도록 하겠습니다.
커구이(柯圭)는 비천한 막노동꾼으로, 그가 1900년 중국 푸젠(福建)을 떠나 일본 식민 체제 하에 있던 타이완 섬 북부 지룽(基隆)에 왔을 때, 이미 세월이 훌쩍 흘러 그의 나이는 서른이 되었습니다. 그를 고용한 ‘남국회사(南國公司)’는 오늘날 외국인 근로자(이주노동자) 중개상과 같은 곳인데, 당시 타이완 총독부가 합법적인 업자를 몇 군데 지정, 허가하여 전문적으로 중국 노동자를 타이완으로 끌어들이고 있었습니다. 2년 전인 1898년, 타이베이에 온 중국인 노동자만 9천여 명, 이미 일을 마치고 중국으로 돌아간 노동자는 7천여 명이었습니다. 매일 평균 40~50명의 중국인 노동자들이 지룽 항을 드나들었습니다. 커구이는 이렇게 고생하며 왔다갔다하는 고향 사람들의 뒷모습 분명 많이 보았을 것입니다. 1930년 3월 2일 일요일, 타이베이에서 30년 간의 일을 마친 그는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날 새벽, 오사카 상선주식회사 소유의 호잔 마루(鳳山丸) 기선은 이미 지룽항에 정박하여 닻을 올리고 남중국으로 향해가려 하고 있었습니다. 서른 살이 되던 해 타이완에 온 그는 예순한 살의 노인이 되어서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죠. 친구가 즐거운 마음으로 그와 함께 배를 탔는데, 왠일인지 그는 갑자기 쓰러져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당시 타이완 신문의 작은 한 꼭지에는 간단하게 몇 줄로 커구이의 이야기를 다뤘습니다. 마치 묘비명처럼 그가 고향을 떠나 고생한 일생에 대한 발자취를 남겨두는 것과 같이요.
일제시기 타이완으로 건너온 중국인 노동자
커구이와 같이 ‘외국인’의 신분으로 일본 식민지 타이완에 거류하고 있으나, 얼굴과 신분이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았던 중국인 근로자 수가 상당했다고 합니다. 그 수는 해마다 증가하여 1936년에는 절정에 이르렀는데요. 1920년 타이완 전체의 중국인 노동자는 약 2만 명이었고, 1930년에는 약 5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1930년대 동안 타이완의 한 거리에 서서 사람들을 보면, 백 명 중 대략 한 명이 당시 중국, ‘중화민국’의 국민이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죠.
1910년대 당시 타이완의 노동시장은 여러모로 노동 인력이 부족했다고 합니다. 그해 지룽의 한 탄광촌에서는 300명의 중국인 노동 인력을 광산으로 고용했습니다. 탄광 일뿐만은 아니었습니다. 중국인 노동자 중 어떤 사람은 찻잎을 따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목수나 재봉사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타이완 인력거꾼의 대부분은 중국에서 온 사람들이었다고 하죠. 19세기 말, 한 신문은 타이베이의 인력거꾼은 타이완인이 거의 없다면서 ‘청나라 취안저우(泉州) 후이안현(惠安縣) 터우베이향 항(頭北鄉航)에서 항해해 온 사람이 다수를 차지한다’고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1930년대에 이르자, 서로 다른 지역 출신의 중국인 노동자들이 타이완 시장의 다양한 직업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더욱 커졌습니다. 인력거꾼은 대부분 푸젠성 푸톈(莆田)이나 셴유(仙游) 지역에서 왔고, 솥을 땜질하거나 우산을 만드는 사람은 대부분 저장성 원저우(溫州) 출신이었습니다. 산둥성 출신 사람들은 체격과 외형이 뚜렷하여 창파오(長袍)와 같은 긴 두루마기를 입고 길을 따라 천을 파는 상인들이 많았습니다. 푸저우 사람들의 기세가 가장 컸는데, 이들은 특히 손재주가 좋아서 타이완 사람들이 옷을 만들고 음식을 요리하며 수염을 정리할 수 있는 각종 가위나 칼 등을 수공업으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1937년 일본이 도발적으로 중국을 침략한 7.7사변이 일어나자, 당시 타이난에 있던 4천여 명의 중국인 노동자들은 깜짝 놀라 불안해하며, 약 천 명 이상이 타이완을 떠나갔는데, 이 때 타이난의 양복점, 시계점의 60%이 감소할 정도였다고 하죠. 당시 중국인들이 타이완 시장에서 특정 분야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중국에서 온 노동자 중 대부분은 남자였지만, 여성도 전혀 없지는 않았습니다. 전매국과 같이 담배를 제조하는 담배 공장에는 약 400여 명의 여공들이 담배를 궐련으로 만들어 상자에 넣는 일을 담당했는데, 그 중 중국 여자가 적어도 7명이었다고 합니다.
중국 유학까지… 날로 증가하는 재타이완 중국인 수
일제시기 타이완에는 돈을 벌기 위해 온 노동자 계층 외에 유학생들도 다수 있었습니다. 장웨이수이(蔣渭水)는 타이베이 총독부의학교 재학 당시, 중국 푸저우에서 온 후배가 한 명 있었는데, 이름은 친헝룬(秦亨潤)으로, 자비로 타이완에 와 서양식 의술을 배웠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중화민국이 선포되기 3년 전, 청나라 정부는 근대식 경찰 제도를 이해하기 위해 세 명의 유학생을 타이완에 파견해 멍자공학교(艋舺公學校)에 입학시킨 후 졸업 후 경찰관 연습소로 승격시켰는데, 그 중 두 사람은 타이완에서의 고생을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 그만두었으며, 린페이쿤(林培堃)이란 유학생만이 학업을 무사히 마치고 푸젠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일제 치하 타이완에 '중화민국주타이베이총영사관' 설치
타이완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이 갈수록 많아지자 화교계에서는 총영사관 설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호응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1931년 3월 하순, 초대 중화민국 주타이베이 총영사 린샤오난(林紹楠, 1889-1945)은 이미 중국 푸저우에서 배를 기다리고 있었고, 타이베이에 거주하던 중국인들은 역에 가서 타이완으로 건너 올 린 영사를 성대하게 영접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마침 타이완해협의 풍랑이 세차서 배가 출항하는 시간이 계속 지연되었습니다. 당시에는 휴대폰도, 페이스북도 없었으니, 총영사가 도대체 언제 지룽항에 도착할 지는 며칠 간 미지수였죠.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다 3월 27일 저녁 무렵이 되자 린 초대 중화민국 주타이베이 총영사는 마침내 지룽에 도착했습니다. 당시 타이베이에 거주하는 중국인 무리의 우두머리 역할을 하던 린양촨(林揚川)이 앞으로 나와 그와 악수했습니다. 린샤오난이 입은 검은색 예복 외투는 옷자락이 무릎까지 닿을 정도로 길었고, 당시 마흔한 살인 그에게 린양촨은 “마치 서른 살처럼 보인다”고 말하며 분위기를 돋우었습니다. 그는 해리포터가 쓰는 정원형의 뿔테 디자인을 가진 로이드(Lloyd) 안경을 끼고 있었습니다. 이 안경은 당시 미국 코미디언 해럴드 로이드(Harold Lloyd)가 착용한 붉은 뿔테 안경이 1920, 30년대 일본에서도 한창 유행했었죠. 전쟁 전까지 타이완인 착용한 안경의 99%도 이 모델이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지룽 항변에서 린샤오난은 타이베이에 거주하는 중국 교포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무사히 도착했고, 지룽의 유명한 후나베쓰 여관(船越旅館) 2층에 가서 잠시 쉰 후 타이베이 시내 행 기차를 기다렸습니다. 이때 수 많은 인파가 몰려 그에게 명함을 건네자, 갑자기 린샤오난은 지룽의 한 중국인의 초대를 받아 잠시 몸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타이베이 기차역 주변도 난리였습니다. 마치 신을 영접하는 것 마냥, 역전 광장에는 10여 대의 호화차가 줄지어 있었고, 인파는 역 안팎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차에서 내린 사람은 위안자다(袁家達) 부영사뿐, 수 많은 인파가 간절히 기다리던 린 총영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요. 린 총영사가 제때 출현하지 않은 데 대해 현장에서는 이러쿵저러쿵 의견리 분분했습니다만, 신문을 통해 인파들의 해산을 요청했을 정도로, 린 총영사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집결한 나머지 타이베이 시내에 선뜻 도착하기 어려웠다고 보여집니다.

중화민국주타이베이총영사관의 도장. 영어로 지금의 '타이베이 타이완'은 일본어와 스페인어가 섞인 '다이호쿠 포르모사(Taihoku Formosa)'라고 적혀있다. - 사진: 臺灣國定古蹟編纂研究小組
이렇게 린샤오난 총영사를 시작으로, 난징 국민정부는 일본 통치하에 있는 타이완 타이베이에 총 3명의 총영사를 파견했습니다. 린 총영사가 1931년 개관한 후, 3대 총영사 궈이민(郭彝民)이 7.7 사변을 계기로 1937년 폐관하지 전, 2대총영사 정옌시(鄭延禧)가 재임했던 시기는 중화민국과 타이완의 관계가 가장 좋았던 시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1933년 중화민국의 쌍십절 국경일 행사가 타이베이에서 성대하게 열렸습니다.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Rti 중앙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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