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의 날
9월 3일 오늘은 중화민국 타이완의 군인의 날입니다. 군인의 날인 오늘 정부과 각 지역의 군부대에서는 오전 10시 각종 행사를 개최하고, 국군 신분의 군인은 휴가를 만끽할 수 있는데요.
군인의 날의 유래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제국으로 기세를 떨치던 일본의 1945년 패망과 관련이 있습니다. 1945년 8월 14일 일본의 항복을 연합국에 통보한 일본 제국은 다음날인 8월 15일 낮 12시, 쇼와 천황의 포츠담 선언 발표로 자신들의 패전을 일본과 한국, 타이완 등 식민지에 공개했죠. 그리고 9월 2일, 요코하마에 정박 중이던 미국 전함 미주리호에서 일본 대표 시게미쓰 마모루 외무대신은 정식으로 항복 문서에 서명을 하기에 이릅니다. 이렇게 일본이 스스로 ‘일본의 항복'에 서명을 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은 완전히 종결되었고요. 중화민국 타이완의 군인의 날인 9월 3일은 바로 일본의 항복을 서명한 다음 날 입니다. 일본의 패망 전 항일전쟁 기간 동안 당시 군인들이 보여준 항일저항정신을 기리기 위해 항일전쟁승리기념일인 9월 3일을 군인의 날로 지정한 것인데요.
초기에는 군인의 날이 군종에 따라 달랐습니다. 육군의 날은 7월 7일, 해군의 날은 9월 2일, 공군의 날은 8월 14일, 헌병의 날은 12월 12일 등으로요. 그러다 민국 44년인 1955년 항일전쟁승리기념일인 9월 3일로 통일, 항일전쟁의 고비에서 국가의 존립을 위해 싸운 국군의 정신을 기리고, 그 전통은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군인의 날은 과거 항일 정신을 되새기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졌습니다. 국가 안보와 주권 수호를 주요 기제로 중화민국 타이완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군인들에게는 ‘항일' 대신 ‘민주', ‘자유', 그리고 ‘평화'가 강조되고 있는 요즘이지요. 군인의 날을 맞아 라이칭더 총통이 오늘 오전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비대칭 전력을 계속 강화하면서도 국군이 더 나은 훈련과 장비, 보살핌을 받아 튼튼하고 현대화된 강철 강군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내년도 국방 예산이 계속 증액될 것이다. 우리는 타이완의 군민일체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세계에 보여줘야 한다.”라고 밝힌 데서 우리는 타이완이 경계하는 대상이 더이상 80년 전 일본이 아닌 중국이라는 걸 알아챌 수 있습니다.
1937년 중국 베이징 시의 루거우차오 사변으로부터 발발된 중국의 항일전쟁과 8년 간의 항일전쟁 끝에 얻어낸 승리에 연원을 두고 있는 군인의 날은 오늘날 타이완에서 과거와는 사뭇 다른 이념과 방식으로 기억되고 있는데요. 항일정신에서 출발해서 오늘날에는 중국의 간섭과 침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기제가 된 군인의 날을 맞아, 오늘 <대만주간신보> 시간에는 항일전쟁 시기 타이베이 출신의 한 청년이 자신이 ‘조국'이라고 여긴 중국으로 건너가 항일운동에 가담했다가 이에 실망하고 남은 인생 동안 타이완 독립의 길을 걷게 된 인물, 스밍(史明, 1918-2019)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 갖도록 하겠습니다.
타이베이 출신 부호의 아들, 일본에 반감을 품다
스밍은 타이완이 일본의 식민지였던 다이쇼 7년인 1918년, 타이베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래 린(林)씨의 5형제 중 한 명으로 태어난 스밍의 아버지는 타이중 펑위안 출신으로 일찍이 일본 메이지 대학에서 유학해 농업학자가 된 지식인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타이베이에 수 천 평의 땅이 있는 대지주였습니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그는 초등학교도 타이완인 학생들이 모인 공학교(公學校) 대신 일본인 학생 위주로 공부하는 소학교(小學校)를 다녔고, 타이완에 거주하는 일본인 중학생을 위해 설립한 최고 명문 타이베이제1중학교에서 수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인에 대한 반감은 그의 중학교 시절부터 싹트고 있었죠. 스밍의 어머니는 그가 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해 의사의 길을 가길 원했지만, 스밍은 이를 뿌리치고 중학교 수료와 동시에 집을 나와 일본으로 도피합니다. 그러고는 의사의 길과는 무관한 와세다대학 정치과에 입학하죠. 성공 궤도와는 거리가 있는 정치과인데다가, 스밍이 재학중이던 1930년대 와세다대학에서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상이 유행하고 있었고, 스밍은 이 조류를 따라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영향을 깊이 받습니다. 무정부주의 작가들의 책을 섭렵하고, 마르크스 이론에 매료되는 한편, 식민지에서 일어난 독립 운동에도 영향을 받아 반일, 반제국주의 운동에 참여하기로 결심하면서 식민주의 정책을 전공하기에 이르죠.
‘조국’ 중국과의 절연, ‘모국' 타이완과의 새로운 관계맺기
그렇게 대학에 재학 중이던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합니다. 원래는 1943년에 졸업을 해야하는 그였지만, 전쟁으로 일본 정부가 졸업예정자의 졸업 시기를 반년 앞당기도록 명령한 탓에 스밍은 1942년 9월에 학업을 마치고는 중국 대륙으로 건너가 중국 공산당 진영에 가담, 항일전쟁에 뛰어드는 선택을 합니다. 중국 상하이로 간 그는 중국 공산당 하에서 훈련을 받고, 유창한 일본어 실력으로 인해 중국 공산당 지하정보원으로도 활동했습니다. 그렇게 중국 공산당 진영 하에서 항일전쟁에 몰두하던 그가 1946년 제2차 국공내전 중 중국 공산당의 학살을 두눈으로 목격하고는 이들이 위선적이라고 여겼고, 크게 실망하기에 이릅니다. 여기에 더해 항일전쟁 중 중국으로 파견된 수많은 타이완 병사들이 중국 공산당에 의해 차별을 당하거나 민난인, 커자인의 구분을 이용해 타이완 사람들을 분열시키는 것을 목도했기에, 그는 이때부터 ‘타이완인은 중국인과 함께 할 수 없다'라고 결심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1949년, 국공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의 승리를 앞두고 그는 결국 공산당에서 빠져나와 당시 국민당의 통제하에 있던 칭다오를 거쳐, 타이완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국민당 정부도 국공내전 패배로 타이완으로 후퇴했습니다.
자신의 ‘모국'인 타이완에 돌아와 그가 택한 길은 국민당 정부에 대한 항쟁이었습니다. 그가 중국에 있는 동안 들었던 2.28 사건에 대한 진상, 그리고 그 영향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에 그는 장제스가 군사적으로 타이완을 통치하는 것에 불만을 느꼈고, 자신이 환멸을 느낀 중국 공산당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스밍은 중국 대륙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국민당 정부를 상대로 대항하기 위한 무장 단체를 설립하기로 결심, 타이베이시 외곽에서 ‘타이완독립혁명무장대'를 조직하기에 이릅니다. 산이 많은 타이베이 지형을 활용하고 일본군이 남긴 소총을 모아 장제스를 암살하기 위한 무장 혁명을 준비하였던 것이죠.
그러나 그의 결연한 의지는 얼마지나지 않아 국민당 정부에게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무장 단체를 조직하고 암살 계획을 주도한 스밍은 수배가 되었고, 결국 1952년 3월 일본으로 망명을 결심하죠. 지룽항에서 일본 고베로 가는 배에서 바나나를 운반하는 노동자로 위장한 그는 밀항에는 성공했으나, 고베에 상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경찰에 체포되 불법 입국 혐의로 수개월간 구금되었습니다. 일본 정부에 의해 구속되면 머지 않아 타이완으로 송환되어 국민당 정부에 의해 살해당할 수 있겠다 생각한 스밍은 자신의 옷 안에 면도칼을 미리 숨겨두고 자살할 준비까지 하는데요.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 일본 정부가 인도적 이유로 스밍에게 정치적 비호를 제공하였고, 같은 해 11월 석방이 되어 일본에서 체류하며 망명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스밍은 당시 타이완 경비총사령부가 그를 정치범으로 지명 수배해 ‘모국'인 타이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죠. 그의 조부모님은 물론 부모님의 장례마저도 치를 수 없는 신분이 되어버렸습니다.
스밍의 일본에서의 망명 생활이 가져 온 놀라운 변화, 그리고 그가 1993년 75세의 나이로 다시 고향인 타이완 땅을 밟았던 순간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주 <대만주간신보> 시간에 이어서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Rti 중앙방송국
Rti 중앙방송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