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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파리 올림픽] 1900년 파리 박람회에 참가한 유일한 타이완인, 우원슈(吳文秀)

  • 2024.08.06
대만주간신보
1916년 타이완 총독부 출판물에 실린 우원슈(吳文秀). - 사진: 국가문화자료고

2024 파리 올림픽이 한창인 요즘. 지난 주말 타이완의 배드민턴 남성 복식의 리양(李洋)과 왕치린(王齊麟) 선수가 결승에서 중국팀을 이기고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파리 한복판에서 타이완의 저력을 전세계에 알렸는데요.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인 1900년. 그해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서도 지금의 리양과 왕치린 선수와 같이 타이완을 프랑스, 그리고 전세계 사람들에게 알린 한 타이완인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우원슈(吳文秀, 1873-1929). 

1900년 우원슈는 타이완인으로는 유일하게 제2차 세계대전 전에 가장 많은 인파가 몰렸다던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가하였습니다. 타이완이 이미 일본의 식민지로 넘어간 지 6년째가 되던 해이자, 당시 우원슈는 여전히 청나라때 머리인 긴 변발을 하고 있었고, 파리의 도랑에는 아직도 재를 뿌려 페스트를 예방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우원슈가 파리로 간 것은 사실 당시 일본 정부가 세계 박람회에 참가한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19세기 전반부터 서방의 각국은 국내에서 각종 박람회를 개최하기 시작했는데, 초기 박람회는 국내의 기밀 문제로 많은 사람의 참관을 엄금한 바 있습니다. 1851년, 영국 런던 에서 열린 만국박람회(Great Exhibition of Industry All Nations)가 되어서야 비로소 각국이 함께 각자의 희귀하고 진보된 기술과 제품을 가져와 서로의 안목을 넓히고, 판매하며, 홍보하는 등 공인된 최초의 세계박람회가 되었죠. 

일본은 1862년 유럽에 파견된 사절단을 통해 영국에서 처음으로 만국박람회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5년 후인 1867년 4월에 파리에서 박람회가 열리자, 일본에서도 일본의 주요 상품들을 갖고 전시회에 참가하기 시작했습니다. 1868년 이후,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자 일본인들이 대거 서양으로 진출해 과학·의학·법률·예술 등 각 분야에서 서양 지식을 배워올 것을 재촉하기 시작했습니다. 1900년 파리 박람회가 열린 당시 타이완 총독부의 참사관장 이시즈카 에이조(石冢英藏)는 세계 일주를 하여 각국의 식민 정책을 시찰하고, 바로 파리에 가서 박람회를 관람할 것을 권하였다. 따라서 타이완 총독부는 타이완의 설탕 산업을 기획한 농학박사 이토베 이나조(新渡戶稻造 · 일본 5천 엔 속 인물)를 초빙하는 등, 일본은 이미 만국박람회에 매우 열성적으로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1900년 파리 박람회가 열리자, 일본의 제품을 전시하는 일본관도 한 자리를 차지했다. 일본관에는 많은 황실의 보물들을 전시하는 ‘금당(金堂)’ 외에도 술집, 매점, 차를 파는 2층짜리 가게가 있어 일본차를 팔기도 했습니다. 1901년 2월 1일 <대만일일신보>에 실린 바에 따르면 일본 정부가 25,000엔을 보조하고 총독부도 25,000엔을 보조했으며, 타이완의 차 상인들은 55,000엔을 부담해 일본 녹차, 홍차, 그리고 타이완의 우롱차 및 포종차를 판매하기 위한 '차 판매점'을 마련했다고 설명합니다. 일본 본국 쪽에서 세 명의 위원을 파견하여 그 일을 주관하게 하였는데, 타이완 쪽에서는 당시 타이베이 차 상인 공회 회장이었던 우원슈가 책임을 진 것입니다. 우원슈는 그렇게 타이완인들이 박람회에 참여하는 첫걸음을 내디뎠습니다.

타이완의 우롱차와 포종차가 소개된 1900 파리 만국박람회의 일본관.

우원슈는 당시 서른 살이 채 되지 않은 매우 젊은 나이의 청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선발된 이유는 그의 신분 외에 그가 영어를 할 수 있었던 것과 관련이 있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1900년 파리 박람회는 4월 14일에 열렸는데, 박람회가 열리기 이전 해부터 연말 신문에서는 우원슈의 동태를 소개하는 기사들이 있었죠. 그는 엄연히 타이베이 상류층을 대표하는 주요 인물 중 한 명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원슈는 1900년 1월 20일에 타이완에서 출발했습니다. 지금같이 비행기를 탄다면야 하루 반나절이면 파리까지 날아갈 수 있지만, 당시에는 배를 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는 정말 몇 개월 전에 출발했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타이완을 떠난지 한 달여가 지난 2월 27일에야 우원슈는 프랑스 땅을 밟았습니다.

그 시절에는 유럽으로 가려면 타이완에서 먼저 홍콩으로 가 배를 갈아타야 했습니다. 우원슈도 마찬가지. 그는 홍콩에 머무는 동안 인생의 큰일을 치렀습니다. 떠나기 전, 타이베이 전역에서는 이미 그가 프랑스에 가서 머리를 깎고 옷도 갈아입으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이때 머리를 깎는다는 것은 길게 땋은 머리, 즉 변발을 자른다는 것입니다. 그가 출가한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신문에 실린 우원슈는 공회에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이전에 도쿄에 갔을 때 자신의 머리가 늘어뜨려져 있는게 대단히 부끄러웠었는데, 그나마 도쿄에는 아직도 청나라 사람의 그림자가 있어 세상을 놀라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파리에 가면 청나라 사람이 거의 없는 관계로 홍콩에서 하룻밤을 머무는 동안 결연히 머리를 자르고 서양식 양복으로 옷을 갈아입었다는 것입니다.

우원슈가 파리에 가는 이유는 단순한 여행이 아닌 특별한 임무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찻잎’은 국제적으로 경쟁이 심한 무역 상품이었습니다. 스리랑카에서 생산되는 실론차와 인도차 노점이 마침 바로 맞은편에 있는데 매일같이 손님이 끊이지 않아 일본이나 타이완차 쪽도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었습니다. 일본쪽 노점에는 세 명의 일본인 위원과 우원슈가 일본인 여성과 프랑스인 여성 각 5명씩을 초빙하여 일본 옷을 입고 접대부 노릇을 하며 손님들이 들어가 차를 음미하도록 안내했습니다. 2층은 녹차 코너이고, 아래층은 홍차와 우롱차, 포종차 코너였습니다.

처음에 타이완차 판매는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우원슈는 매일 노점에 오는 사람이 3백여 명으로, 이중 가장 많이 차는 일본 홍차로, 녹차가 그 다음이며, 타이완차를 마시는 사람은 겨우 4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당시 일본 기자들은 직원들이 낸 보도에는 언어 소통이 잘 되지 않아 영어를 할 줄 아는 일본계 위원들이 우원슈의 “비정상적인” 영어와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방식에  불평을 갖고 있었다고도 합니다. 당시 일본인 위원들 사이에서 홀로 있었던 타이완인 우원슈의 처지가 꽤나 고생스러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7개월에 달하는 파리 엑스포 전시 기간 동안 우원슈의 가문인 타이베이 우씨 집안에는 중대한 이변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우원슈의 형이 병사한 것이다. 이 소식을 전보를 통해 파리에 보냈지만 우원슈는 ‘공무’를 이유로 타이완으로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어머니마저 근심이 쌓여서 병으로 돌아가시자 당시 타이완 신문에서는 "자스양행(嘉士洋行)은 우원슈가 5,000여엔 이상을 잃어 파산"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기사 제목을 "화불단행(禍不單行, 화는 홀로 오지 않고, 연이어 닥친다)"으로 해서 말입니다.

심지어 같은 해 8월에는 타이베이 차 상공회의소에서 재선거가 열렸습니다. 회장은 2년에 한 번 재임하는데, 당시 회장이었던 우원슈는 먼 프랑스에 있었으니 직접 참석할 수 없어 순순히 사직서를 부칠 수 밖에 없었죠. 그 결과 회장과 부회장, 간사장, 간사, 감사 모두 15명 선출한 자리에 우원슈의 자리는 한 군데도 없었습니다. 

여러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우원슈는 파리에서 결코 의기소침하게 있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우원슈는 매우 적극적으로 행동했음을 당시 신문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프랑스 주재 일본 공사가 자신의 명함을 파리 상류사회에 전달하여 일본차를 판매할 때, 우원슈는 직접 거리에서 선전 전단과 사진첩을 사방에 나누어 주며 전 파리 사람들이 타이완 우롱차의 진미를 알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홍보했습니다. 

하늘은 노력하는 사람을 저버리지 않는다고, 그해 타이완의 우롱차는 심사관의 심사를 거쳐, 마침내 실론차와 함께 박람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였습니다.  

우원슈, 그의 명랑하고 적극적인 성격은 다른 사람의 묘사에서도 엿볼 수 있다. 청말 쑨원의 절친한 친구인 천샤오바이(陳少白, 1869-1934)가 타이완에 갔을 때 우원슈를 만난 적이 있는데, 천샤오바이가 저술한 《흥중회혁명사요(興中會革命史要)》에서 우원슈를 "나이가 아직 서른이 되지 않았지만, 매우 노련하고 기개가 있다"고 묘사했다. <대만일일신보>는 1929년 우원슈가 병으로 사망한 후, 그가 “해학에 능하고, 재미있다. 본섬의 명사 잔치, 이 자리에 우씨가 없으니 손님들에게는 기쁨도 없다.”는 말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1900년 1월 20일에 타이완을 출발하여 11월 박람회가 폐막하자, 이듬해 1월 하순에 타이완으로 돌아왔으니, 우씨는 1900년 1년 내내 타이완의 차 산업을 위해 파리에 체류했습니다. 

100여 년 전, 전 세계의 명사들이 모인 파리 박람회에서 타이완의 차를 알리기 위한 그의 노력이 어쩌면 지금까지 타이완을 빛나게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프로그램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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