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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 일기예보의 역사

  • 2024.07.23
대만주간신보
일제시기 때 사용한 일본 초기 온도계인 '한란계(寒暖計)'.

23일 화요일인 오늘, 태풍 ‘개미’의 북상으로 타이완, 특히 타이완 북부 지역은 초비상입니다. 현재 필리핀 동쪽 해상에서 타이완과 중국 대륙 방향으로 북상하고 있는 태풍 ‘개미’는 24일(내일) 타이완 동쪽 해상을 거쳐 타이완 북부를 관통할 것으로 예상되는데요. 타이완 정부는 태풍의 상태에 따라 타이베이를 포함한 신베이, 지룽 등 타이완 북부 지역에 내일 24일과 25일 양일 간 태풍으로 인한 임시 휴가 조치를 취할 수도 있다고 예고한 상태입니다. 태풍이 자주 발생하는 타이완에서는 예전부터 6월이 되면 태풍이 기승을 부려 타이완 사람들은 여름이 다가오면 태풍 걱정에 늘 일기예보에 귀를 귀울여왔는데요. 몇 년 만에 타이완 섬을 관통하는 태풍이 찾아와 사람들은 오늘도 일기예보를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태풍이 기승을 부리는 여름에 일기예보가 없는 생활은 상상할 수도 없죠. 그런데 일기예보라는 현대 문물이 있기 전 타이완 섬에 살던 선조들도 날씨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나름의 예측법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1697년 청나라 관원이었던 욱영하(郁永河, 1645-?) 씨는 타이완 섬 사람들의 풍토와 문화를 설명한 <비해기유(裨海紀遊)>에서 17세기 타이완 사람들이 태풍을 어떻게 예측했는지 기록하고 있는데요. “태풍을 점치는 사람들은 매번 풍향을 예의주시하며 항상 경계한다. 예를 들어 여름에는 남에서 북으로, 가을과 겨울 그리고 봄에는 북에서 남으로 바람이 부는데 7월에 북상하는 바람이 주로 태풍이다”라고요. 옛부터 타이완 속담에는 ‘(음력) 6월 초하루에 천둥이 치면 그 해 태풍은 매우 적을 것(六月初一,一雷硩九颱)’이고, ‘(음력) 7월 초하루에 천둥이 치면 그 해에는 태풍이 많이 온다(七月初一,一雷九颱來)’라는 말이 있을 뿐만 아니라, ‘소는 비를 부르고, 돼지는 바람을 부른다’는 옛말처럼 동물의 반응으로 날씨를 예측하기도 했습니다.    

바람의 방향을 읽고, 가축들의 동향을 살피며 태풍의 재해를 예측했던 300년 전 타이완 사람들. 백 여 년이 흘러 19세기 말이 되자 타이완에서도 ‘온도계’라는 것을 사용해 온도를 측정하고 기록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때는 일본의 기세가 청나라에까지 미치기 시작할 무렵인 1874년 2월, 일본 내각은 청나라 정부의 정령이 타이완 남부의 원주민 지역에까지 미치지 못하고 주권을 보유하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하며, 타이완 정복을 결정, 같은 해 5월에 타이완 남부 헝춘(恆春)을 점령하기 시작합니다. 식민지를 염두해두고 종군하던 당시 일본군은 대략 500명이었는데, 이 안에는 승려, 기자, 장인 등 각계각층의 인력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일본 이민자들을 위한 짐 안에는 182종의 서양식 식물도 들어 있었죠. 함께 종군한 야전 의료대는 순수한 구호 작업 외에도 매일 정오 타이완 현지 기온을 관측하고 기록에 남기는 일도 했습니다. 이것이 타이완 최초의 온도 기록입니다. 

당시 일본 군의관은 온도계를 뜻하는 일본어인  ‘한란계(寒暖計)’를 사용하여 헝춘의 기온을 측정하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18세기 초 독일인이 유리관에 수은을 담는 온도계를 발명한 이래 온도계는 유럽 전역으로 퍼지게 되었고, 일본에서는 19세기, 즉  도쿠가와 막부 말기 시대 때부터 한난계를 제조하기 시작했습니다. 

1874년 5월 타이완 남부 헝춘을 점령한 일본군은 몇 달 지나지않아 말라리아와 같은 풍토병에 저항하지 못한 채 8월 중순 무렵 병사의 대부분이 병에 걸리는 일이 벌어지고 맙니다. 이 틈을 타 중국이 일본을 타이완 섬에서 퇴출시키려 했고, 일본은 중국에 약간의 군자금을 요구한 후 타이완을 떠났죠. 타이완 최초의 온도 기록은 일본군이 헝춘을 떠나면서 끝이 났는데, 1874년 총 5월에서 11월까지 7개월 간의 온도가 매일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청나라 정부에서 과학 기구를 이용한 기상 관측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청나라 말, 서방 열강에 개항하고 통상을 하면서 중국에는 세관이 생겼는데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개항이 많아질수록 세관의 세수가 줄어드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러자 베이징 정부는 이후 외국인을 초빙해 세관을 관리하게 했죠. 그러자 세관 관련 제도가 수립되고 철저하게 관리가 되기 시작하면서, 관세는 청나라 조정에서 토지세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수입이 되었습니다. 외국 세관원 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영국 국적의 로버트 하트(Robert Hart, 1735-1911)입니다. 1858년 광동 해관 세무사에 취임한 이래 1863년 총세무사까지 맡으면서, 약 50년 가까이 총세무사로서 중국의 관세를 관리했습니다. 

로버트 하트 총세무사는 타이완의 기상 예측과도 상당히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많은 서양 과학자들은 구미 제국의 식민 확장의 날개를 타고 세계 각지로 날아와 연구를 하던 19세기. 하트도 과학에 대한 열정이 있었습니다.그는 중국 연해 세관과 등대지기들에게 매일 기상을 관측해 매월 홍콩 기상대에 보고하도록 명령했습니다. 1885년 무렵 타이완의 지룽, 단수이, 안핑, 가오슝의 4개 세관과 펑후 시위(西嶼)와 어롼비(鵝鑾鼻) 등대도 홍콩 기상대가 제공한 측정기구를 이용해 타이완 섬의 기상을 관측하고 발송하기 시작했죠. 

1895년, 일본이 타이완을 지배하기 시작하자, 타이완의 기상 발전은 새로운 경지에 들어서게 됩니다. 첫 번째 변화는 1896년 12월 1일부터 베이징 정부의 세관의 도움을 받지 않고, 기상관측소의 옛 이름인 ‘측후소(測候所)’를 타이완 섬 곳곳에 직접 건설해 기상 관측망을 형성한 것이죠. 당시 일본은 7개의 정식 측후소 외에도 파출소, 상수도 공장, 학교, 우체국 포함 타이완에 무려 78곳에 달하는 기상관측망을 설치했습니다. 

일본이 타이완을 점령하기 앞서 이미 일본 섬 내에서 자체적인 기상 관측망 설치에 박차를 가한 바 있습니다. 서구의 현대화 발자취를 따라잡으려고 노력한 결과이죠. 1875년(메이지 8년) 일본은 처음으로 외국에서 측정기구를 주문하고, 영국의 전문가를 초빙하여 도쿄에 첫 ‘기상대’를 설치했습니다. ‘도쿄 기상대’를 시작으로 10년이 지나자 전국의 기상 관측소는 이미 74곳에 이르렀죠. 그리고 1883년부터 6월부터 일본 정부는 자신들이 관측한 기상 자료를 도쿄 시내 파출소를 경유해 일반 민중들에게 공고하기 시작했습니다. 

타이완을 점령한 일본 정부, 즉 총독부 측은 1896년 8월 11일 타이베이 측후소(현 중앙기상대의 전신)를 설립하고 이듬해 9월 이후 총독부 신문에 기상을 관측하는 ‘관상(觀象)’란을 열어 타이베이 측후소에서 관측한 ‘본섬 기상예보와 날씨 개황 및 폭풍경보 등"을 게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신문에 매일 날씨가 게재되는 문화가 정착했습니다. 일제시기 대표적인 관방신문인 <대만일일신보(臺灣日日新報)>에는 1896년 6월 17일 창간일부터, 신문 1면 머리맡에 "한난 작일 정오 97도(寒暖昨日正午九十七度)"와 같이 한 줄로 날씨를 알렸습니다. 이때 온도 표기는 ‘화씨’로, 화씨 97도는 섭씨 36도 정도입니다. 100여 년 전 6월 중순에도 타이베이는 36도에 달할 정도로 상당히 무더운 날씨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제시대에 태풍경보가 발령되었습니다. 물론 스마트폰으로 경보가 오는 지금과 달리 당시에는 우체국이나 파출소 등의 '신호소(信號所)'를 통해 알려졌죠. 경보 방법이 재미있습니다. 높은 막대기에 빨간 공을 걸면 폭풍이 올 것을 나타내고, 빨간 원뿔을 걸면 보다 긴박한 폭풍 경보를 나타냅니다. 밤이 되면 빨간 공 신호 대신 빨간 등불로 대체되는데, 빨간 등불이 두 개가 되면 이는 원뿔에 해당하는 신호였다고 합니다. 

 

►참고자료

   郁永河<裨海紀遊>

   周明德 <臺灣氣象事業之肇始>

   <臺灣日日新報>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프로그램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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