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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시? 那卡西! 流し! 베이터우 온천숙박 문화를 중심으로 성행한 나카시

  • 2024.04.30
대만주간신보
과거 나카시 악단의 레퍼토리를 묶어 2002년 발매한 앨범의 표지. 앨범에 속한 노래는 대부분 타이완어와 일본어로 되어 있다.

조선시대 잔치나 술자리에서 노래나 춤으로 사람들의 흥을 돋우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여자를 기생이라고 불렀죠. 기생에도 등급이 있었는데, 임금 앞에서 노래와 춤을 하는 기생을 일패기생, 양반이나 과거에 급제해 직책을 얻은 문무백관을 상대하는 기생은 이패기생, 마지막으로 일반 평민을 대상으로 공연하는 기생은 삼패기생이라고 했습니다. 기생은 소위 매춘을 병행했을 것이라고 알려져있지만, 삼패기생을 제외한 나머지 기생은 매춘이 거의 없었으며, 기생의 신분은 비록 가장 낮은 천민에 해당되었지만, 높은 사람을 상대하는 고급 기생들은 예술적으로 박식했을뿐만 아니라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을 정도로 부유했다고 알려져 있죠.

이렇게 조선시대 신분계급을 중심으로 조성되있던 기생 문화는 조선의 체계와 기반이 무너진 일제강점기를 겪으면서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1916년 데라우치 총독이 일본식 공창제도를 공포하면서 한국에서도 전례에 없던 일본식 공창제가 도입되었죠. 그러면서 기생들은 ‘권번(券番)’이라고 불리는 조합에 소속되어야 했고, 이곳에 적을 두며 세금을 내면서 활동하는 허가제 하에 활동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제도 아래서 기생들은 나름의 기예를 배우며 기예증이라는 자격증도 획득해 점차 삼패에서 이패로, 이패에서 일패로 자신의 신분을 높일 수 있었죠. 정가, 잡가 등 노래 양식에 따라 기생의 구분이 있었던 과거 조선시대와 달리, 일제강점기에 들어서자 한 기생이 정가와 잡가를 모두 불렀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서양식 춤과 일본 전통악기 샤미센도 연주해야 했죠. 

일제강점기 한국에 기생이 있었다면 일제시기 타이완에는 예기(藝妓)가 있었습니다. 일본의 식민지였던 타이완의 예기들은 주로 일본인이 타이완에서 운영하던 온천여관에서 공연을 했는데, 이 시기 연출은 샤미센과 노가쿠(能樂)가 주를 이뤘습니다. 그러나 타이완 사람이 운영하는 숙박 시설은 일본인이 운영하는 시설보다 요금이 저렴하고 공연 프로그램도 타이완인의 입맛에 맞는 타이완 전통음악 난관(南管)이나 타이완어로된 유행가가 대부분이었죠. 

나카시? 那卡西! 流し!

한국의 기생이나 타이완의 예기와는 별도로, 일제시기에 들어 식민지 타이완에 처음으로 생긴 공연업이 있습니다. 일명 ‘나카시’라고 하는데요. '나카시(那卡西)'는 원래 일본어 ‘나가시(流し / ながし)’로 '물처럼 흐르는 업'을 의미합니다. 나카시란 일본에서 유래한 노래 혹은 공연 모델로, 여러 숙박시설이나 식당, 야시장 등을 돌아다니며, 음악을 공연하는 가수나 음악가, 그리고 그들의 음악 공연 방식을 일컫는 용어입니다. 나카시의 첫 공연 형태는 연주자 한 명과 가창자 한 명, 이렇게 2인 편성의 그룹이 하객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연주에 맞춰 노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점차 손님들도 이들의 반주에 맞춰 따라 부르거나 손님이 원하는 노래를 이들이 즉석에서 연주해 그들이 노래할 수 있게끔 하기도 했죠. 나카시에서 반주를 담당하는 악기는 주로 아코디언이나 기타였습니다. 그러다 점차 드럼이 추가된 작은 악단으로 바뀌었고, 이후에는 과학 기술의 발달로 전자 오르간이나 일렉트릭 기타 등이 추가되어 원하는 음향 효과를 낼 수 있게 되었죠. 

타이완 나카시의 본고장, 베이터우

타이완에서 나카시 공연이 가장 성행했던 곳은 바로 온천과 숙박시설이 모여있는 베이터우(北投)였습니다. 한때 베이터우의 식당에는 각각 약 3~7팀의 나카시 악단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하죠. 나카시 악단은 식당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호텔과 같은 숙박시설로부터 전화를 받으면 바로 투입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나카시 악단의 특징

이렇게 타이완 나카시의 본고장인 베이터우에는 나카시가 한창 전성기를 누리던 1960-70년대 당시 수백 개의 나카시 악단이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타이완에서 유행했던 창작가요 외에도 일본어 노래에서 가사를 바꾼 노래도 이들의 주요 레퍼토리였죠. 나카시 아티스트들은 자신들의 주요 레퍼토리 외에도 수천 개의 노래를 미리 숙지해야 했습니다. 또한 여러 나라의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중국어·대만어·광둥어·영어·일본어 등 언어를 바꾸면서 노래를 부를 줄도 알아야 했죠. 만약에 손님이 새로운 노래를 부르면 재빨리 해당 노래의 악보를 찾아 그 노래에 맞게 연주를 하며 함께 부르는 재치도 나카시 악단에게는 상당히 중요하게 요구되었습니다.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른다고 가정해봅시다. 기계에서 나오는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다 보면 가사를 놓치거나 때로는 박자가 흐트러질 때도 있죠. 그러나 노래방 기계는 마이크를 잡은 사람이 누구든 간에 상관없이 반주 소리를 계속해서 내뱉습니다. 취소 버튼이 눌리기 전까지는요. 그러나 나카시는 다릅니다. 나카시의 장점은 바로 노래부르는 사람, 즉 손님들만의 고유한 악단이죠. 만약 손님이 노래를 부르다가 음이 떨어지거나, 혹은 박자를 놓친다 할지라도, 나카시 악단 특유의 빠른 재치로 반응해 손님의 톤에 맞게 악기 반주를 수정한다면 크게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즉 나카시 악단의 최대 장점은 현장의 반응과 손님의 노래 실력에 따라 상당히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베이터우의 식당을 누비며 물 흐르듯 돌아다니는 나카시 악단

일본의 문화에서 유래된 나카시는 1960년대 신베이터우의 번창과 함께 온천식당 산업이 발달하면서 1970년대 전성기에 이르게 됩니다. 나카시 악단은 신베이터우에 소재한 100여 개 음식점을 물 흐르듯 돌아다니며 공연하는 독특한 문화를 선보이죠. 한창 장사가 잘 될 때 단원들은 한 식당의 마지막 회 공연이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다른 식당이나 다른 룸으로 가  계속해서 공연해야 했습니다. 베이터우 산 꼭대기의 호텔부터 온천이 있는 호텔까지 나카시 악단의 공연이 계속되는 한 이곳에 머무르는 손님들은 먹거리와 함께 흥겨운 노래까지 더해지니 더할나위 없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겠죠. 

나카시의 수당도 상당했습니다. 15위안이면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었던 1960년대 타이완에서 나카시 악단은 시간당 수백 에서 천 위안 단위까지 받았습니다 그러나 나카시의 주요 수입은 정기공연료가 아닌 ‘팁’입니다. 단원들이 손님들을 즐겁게 노래하게 하면 할 수록 팁이 끊임없이 나오는데, 이때는 시간당 받는 정기공연 비용보다 훨씬 많은 수당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일제시기 신베이터우의 풍부한 온천 자원을 발견한 일본인들은 온천 개발 산업에 뛰어들면서 이곳의 온천 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 그렇게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베이터우의 온천 문화가 일제시기부터 시작된 것이죠. 이렇게 신베이터우 지역은 일본인에 의한 온천탕 문화와 이와 관련된 각종 산업이 활성되화면서 새로운  문화의 변화가 일어났고, 여기에 바로 나카시 문화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카시의 몰락

이렇게 베이터우 온천과 그 주변의 식당을 중심으로 시작된 타이완의 나카시 문화는 일제시기가 끝난 후에도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초까지 타이완의 경제 도약으로 최고조에 오르면서 전성기를 맞았지만, 1979년 베이터우 폐창(北投废娼)이 선포되면서 베이터우 온천 및 식당의 경영실적이 현저히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기계가 직접 반주를 틀어주는 노래방 산업이 흥행하기 시작하면서 사람이 직접 연주하며 노래하는 나카시 문화는 점차 희미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타이완의 나카시 문화 역사를 살펴보니, 문득 해외 북한 식당에 있는 북한 악단들이 떠오르는데요. 한국에서도 노래방이 생기기 전 직접 악기를 연주하는 악단들이 손님들의 흥을 돋우기 위해 옆에서 반주를 해주는 문화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청취자님들의 사연 기다릴게요.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프로그램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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