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완 최초의 비행사 셰원다(謝文達, 1901-1983)와 조선 상공을 비행한 최초의 한국인 비행사 안창남(安昌男, 1901-1930).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해 일본 도쿄에서 1등 비행사 자격증을 취득한 이들의 이야기, 오늘 대만주간신보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2016년 ‘두 조국을 배회하다(徘徊在兩個祖國)’라는 제목으로 셰원다의 일대기를 출판한 셰원다의 아들, 셰동한(謝東漢)은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메이지, 다이쇼, 쇼와, 중화민국를 거쳐 그 시대의 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제게 이 때 일어난 일에 대해 출판할거냐 물으셨고, ‘너 돈 있느냐? 하지 말거라’ 하셨습니다. 자신의 일은 적게 알수록 좋다고 말씀하셨죠.”
셰원다의 아들이 이야기했듯, 타이완인 최초로 비행사 자격증을 취득한 셰원다의 귀국 이후의 삶은 그리 녹록치 않았습니다. 안창남도 그러했고요. 타이완과 조선을 대표하는 첫 비행조종사로서 탄탄대로를 걸을 것 같은 두 청년에게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1920년 타이중과 타이베이 상공을 비행하며 타이완 사람들에게 곡예비행을 선보인 셰원다. 당시 타이완 총독부 입장에서 셰원다는 ‘일본이 양성한 모범적인 타이완인’이었으나, 타이완 지식인과 학생들에게는 오히려 타이완 민족 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장본인이었습니다. 셰원다를 두고 총독부와 타이완 지식인은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총독부 내무국은 셰원다에게 새 비행기 한 대를 선물하는 것은 물론 비행 예산을 전국 단위로 모집해 그에게 성금을 후원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셰원다의 환영회에는 1천 2백 명의 많은 사람들이 출석했고 그 중 총독부 총무장관은 치사에서 “식민통치 하 타이완인은 가장 행복한 시대에 살고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같은 시기, 의사 출신의 사회운동가이자 민족자결운동가인 장웨이수이(蔣渭水, 1888-1931)는 셰원다를 타이완문화협회라는 단체에 초대했습니다. 타이완문화협회는 일제시기 타이완 지식인들이 1921년 발족한 단체로 타이완인의 정체성과 민족의식을 추구했던 단체죠. (타이완문화협회에 대해 보다 자세 알고 싶으시다면 올해 1월 16일자 방송을 다시 청취하시기 바랍니다.) 단체의 핵심가치로 첫째 ‘타이완인은 절대 차등국민이 아니다.’ 둘째, ‘타이완인의 존엄을 환기시킨다'라고 말하며 장웨이수이는 셰원다를 설득했습니다.
셰원다는 일본 천황에게 받쳐지는 타이완, 본도인의 이상적인 모델이 되는 대신, ‘타이완인'으로서의 존엄성에 가치를 두었고 결국 1921년 타이완문화협회 창립 회원 명단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1923년 2월. ‘타이베이호'라는 명칭의 비행기를 끌고 일본 도쿄 상공으로 가 수십만 장의 전단지를 살포했습니다. 전단지에는 ‘타이완인은 일본의 포악한 정치 아래서 오랫동안 신음하고 있다' ‘타이완인에게 의회를 달라’라는 내용이 적혀있었죠. 장웨이수이가 이끈 타이완문화협회의 타이완 의회 설치 청원 운동의 선봉에 셰원다가 있었던 것입니다.
타이완의회 청원단이 타이완으로 돌아온 후 장웨이수이 등 회원들은 치안경찰법 위반으로 감옥에 수감되었고, 타이완문화협회도 총독부의 압제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셰원다의 선택은 결국 총독부를 배반한 셈이죠. 당시 타이완 총독 덴 겐지로는 셰원다에게 “내가 그렇게 잘해줬는데 왜 장웨이수이와 타이완 의회 기성 동맹회 활동을 하느냐”라고 캐묻기도 했다는 군요.
결국 같은 해 4월, 셰원다는 타이완과 일본을 떠나 중국으로 향했습니다.
한편, 1922년 조선 경성 상공에서 ‘금강호'를 이끌고 무사히 비행을 선보인 안창남은 1923년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때마침 발생한 관동대지진으로 6천여 명의 조선인이 무자비하게 일본 정부로부터 학살 당하는 장면을 목격, 심지어 자신도 살해 협박을 받고 한 일본 여자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남는 일을 겪었습니다. 더이상 조선인으로서 일본에서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안창남은 1924년 조선으로 돌아왔고, 경성에 비행학교를 세워 후배들을 양성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는 않았죠. 공교롭게도 셰원다가 중국으로 가고 2년 뒤인 1925년 조선인 안창남도 중국으로 망명을 떠나게 됩니다.
중국으로의 망명
중국으로 망명을 떠난 안창남은 상해 임시정부 요원들과 접촉해 여운형의 소개로 중국 군벌에 들어가 비행학교 교관이 되었는데요. 그가 있었던 곳은 산시성의 타이위안(太原) 이었습니다. 1911년 신해혁명 이후 중국은 군벌들이 각 지역을 지배하는 형국이 되었는데, 산시성은 국민당 계열의 군벌인 옌시산(閻錫山)이 지배하던 곳으로, 공군력을 중시한 옌시산은 산시성에 항공학교를 설립하고자 했습니다. 1등 비행사 자격을 갖고 있고 항일투쟁을 목표로 하는 안창남은 옌시산에게 중요한 존재였죠. 안창남은 산시 항공학교 초창기 주요 교관으로 ‘안호(安虎)’라는 중국이름을 갖고 활동했습니다.
타이위안에서의 활동은 안창남에게 독립운동의 시작이었습니다. 안창남은 옌시산의 후원 아래 ‘대한독립공명단’이란 독립운동 단체를 바로 이곳 중국 타이위안에서 결성했고, 훗날 중국 동북 지역에 자체 비행학교를 설립해 조선의 북쪽인 함경북도나 평안북도를 통해 국내를 진격해 일본군을 중국쪽으로 유인, 이때 중국이나 소련의 참전을 유도해 일본군과 싸워 독립을 쟁취해 낸다는 원대한 꿈을 갖고 있었죠.
그러나 안창남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1930년 4월 안창남의 사망 소식이 조선 땅에 전해졌습니다. 비행기 이착륙 도중 추락으로 사망했다는 것입니다.
한편 같은 시기 중국에 있었던 셰원다도 1925년 위에웨이쥔(岳維峻)이 군장으로 있는 허난국민2군의 항공대장으로 근무를 시작했, 이후 광저우 항공학교 교관, 국민혁명군 항공처 비행사, 국민정부군정부 항공서 제1대 비행사 등을 역임하며 국민당 군벌의 비행 교관으로 활동했죠.
우연이었을까요? 공교롭게도 안창남이 타이위안에서 사망했던 해인 1930년, 셰원다도 정찰 임무 중 포화를 맞고 추락해 두개골이 부서지고 허리를 세게 다치는 부상을 입고 맙니다. 부상으로 장거리 비행을 할 수 없게 된 데다가, 1931년 918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반일감정이 고조되면서 장제스가 중국에 있는 타이완인을 일본인으로 간주해 척결하려는 바람이 일자 셰원다는 난징에 있던 공군을 떠나 상하이로 넘어와 장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셰원다는 그 현장을 그저 목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상하이에서 교전하다 추락하는 중국 비행기를 보며 마침 제자이거나 동료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괴로웠지만 슬픈 티를 내지 못했고, 이미 일본의 세력권이 된 난징에서 일본 소년병이 지나가는 중국 아이를 폭행했으나 이를 못 본 척하고 지나가는 중국인들을 보며 치욕에 떨어야했습니다.
셰원다는 1938년 일본 헌병대에 끌려가 한 중국 국적의 사람을 감시하라는 요구를 받기도 했고, 중국의 부상이 일본과 협력할 때 비밀리에 일본 측 통역을 맡기도 했습니다. 중국의 편에도, 일본의 편에도 온전히 설 수 없었던 셰원다가 일본의 패망 후 타이완으로 돌아와 중국에서의 일에 대해 말을 아낄 수 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타이위안 군벌 옌시산의 정용 비행기를 조정할 정도로 신임을 받던 안창남이 1930년 비행 중 추락사를 했던 결정적인 이유는 상태가 좋지 않은 비행기를 몰 수 밖에 없었던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안창남의 죽음을 밝히는 최초의 자료인 타이위안 항공학교 참사 부고 기사에는 “(학교) 교장이 사리사욕을 위해 고장난 엔진을 2대 구입”했다고 고스란히 적혀있었습니다.
그렇게 타지에서 죽음을 맞이한 안창남의 묘의 비석에는 ‘용회비장(永懷飛將, 비행장교를 영원히 가슴에 묻다)’라고 적혀있었고, 81세의 나이로 타이베이에서 생을 마감한 셰원다는 자신의 아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널리 알릴 필요 없다고 당부했습니다. 셰원다 전기의 제목인 '두 조국을 배회하다'에서 '두 조국'은 중국일수도, 일본일수도, 혹은 타이완일수도 있다고 저자인 아들 셰동한은 말했습니다.

타이완에서 2019년 제작한 다큐멘터리 ‘1920을 찾아서(尋找1920)’는 일본 식민지 시절 함께 비행을 배우고 비행기를 조종해 고향 상공을 날아다니며 독립운동을 했던 셰원다와 안창남을 다룹니다. 이 다큐멘터리에는 셰원다의 일생을 다룬 전기를 집필한 아들이 직접 출현해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직접 인터뷰합니다. 29살의 나이에 미혼으로 세상을 떠난 안창남의 경우 박정규 안창남기금회회장이 출현해 그의 이야기를 대신 전해줍니다.
►참고자료
謝東漢、吳餘德,《徘徊在兩個祖國》臺北,2016。
다큐멘터리 《尋找1920》,2019。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Rti 중앙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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