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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타이완 식민통치 40주년 기념, 1935년 타이완박람회

  • 2023.12.19
대만주간신보
1935년 타이완박람회가 개최된 장소를 나타낸 지도. 기존에 타이베이에서만 열렸던 시정 10주년 기념일과 달리 시정 40주년 기념으로 개최된 타이완박람회는 전국 단위로 확대되어 개최되었다. - 사진: 위키피디아

연말이 되면 기념 축제들이 곳곳에서 열리죠. 여러 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우리는 생전 처음 본 사람들과 한데 어울려 축제 분위기를 한껏 즐깁니다. 비록 서로 알지 못하는 익명의 관계이지만 같은 축제를 보러 한 자리에 모였다는 사실로도 일체감을 느끼죠. 연말 축제 외에도 가수 콘서트, 국경일 행사, 음악 축제 등 익명의 다수가 한 장소에 모여 즐기는 문화가 이제는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되었습니다만,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일제시기를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꽤나 낯선 문화였습니다. 

1895년부터 타이완을 식민 지배 하기 시작한 일본. 타이완과 조선을 식민지로 삼은 후 만주까지 진출한 일본의 국력은 쇼와 초기인 1930년대 초가 되자 상당히 강해졌습니다. 180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서구 열강의 뒤를 쫓아가던 후발주자였지만, 식민 통치를 기반으로 동아시아에서 하나의 제국을 형성하기 시작했고, 유일한 비서구 제국을 일본은 만들어나가기 시작했죠. 타이완을 다스리는 성과가 곧 일본 국력의 일부였던 것입니다. 

일본이 타이완을 통치한지 40주년이 되던 해인 1935년. 일본 정부는 시정 40주년 기념 타이완박람회(약칭 타이완박람회)를 개최하기에 이릅니다. 타이완에서의 박람회 개최는 일본의 타이완 통치 성과를 대내외적으로 알리고 점검하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한편 조선에서는 이보다 조금 앞선 1929년에 시정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조선박람회가 경복궁에서 열린 바 있죠. 타이완박람최 개최의 이유에 관해 타이완박람회 사무국은 다음과 같이 남겼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식민지로서 통치상 그 효과가 드러난 통치업적은 헤아리기 힘들 정도이다. (...) 풍토병과 오랑캐와 비 많은 땅이었던 타이완에서 비적을 소탕하고 원주민을 다스린 사업이 일찌감치 전개되어, 위생설비의 개선, 교통통신기관의 정비, 관개수로의 개착, 항만 하천의 개축 등(…)” (타이완박람회사무국, 1935:1) 

즉, 타이완에서의 일본 식민 정부의 근대화 성과를 세상에 알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1935년 10월 10일부터 11월 28일까지 50일간 타이완 전국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개최된 타이완박람회는 타이완 역사상 처음있는 대규모 박람회이자 행사였습니다. 타이완 총독부는 1934년 6월 이듬해 열릴 박람회를 위해 연도 예산을 미리 편성하고, 11월에 개최 계획을 공식 확정했습니다. 사실 총독부는 1895년 타이완 통치 시작 이후로 매 10년 마다 타이베이에서 시정기념일 행사를 개최한 바 있습니다. 네 번째 시정기념일인 1935년 타이완박람회는 그 규모가 타이베이에서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일본 정부가 타이완에서 실시한 각종 성과를 다른 나라나 제국 내 다른 식민지에게 알리려는 목적이 뚜렷했습니다. 적극적인 홍보 결과, 기존 예산에 거의 두 배 가까운 금액을 주변 국가로부터 투자받을 수 있었고, 그렇게 1935년 10월 10일 타이완박람회는 성황리에 개막했습니다.  

그 규모는 방대했습니다. 당시 타이완 총독이었던 나카가와 겐조 제 16대 총독 하에 실제 집행을 담당했던 총무장관 및 지방 행정장관 등 총 2701명의 총독부 직원들이 총 동원되었습니다. 여기에 박람회를 후원하기 위해 설립한 관민합조의 ‘타이완박람회 협찬회'에는 타이완전력주식회사 사장과 타이완일일신보 사장이 각각 회장과 부회장을 맡았으며, 회원의 후원금으로 경비를 마련했습니다. 총독부는 당시 중화민국이었던 대륙의 푸젠성 성대표도 초청했습니다. 중화민국 중앙정부는 지방외교를 명목으로 푸젠성이 원정대를 이끌고 타이완박람회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했고, 그렇게 중화민국 푸젠성에서도 사람들이 참여했습니다.    

식민지 타이완의 중심 도시였던 타이베이에는 총 세 개의 회의장이 있었습니다. 첫번째 회의장은 타이베이 공회당(公會堂) 주변 일대로, 지금의 중산당(中山堂)에 해당됩니다. 두번째 회의장은 타이베이 신공원, 지금의 228평화기년공원과 그 인근으로, 이곳은 주요 부스들이 설치된 가장 중요한 공간이었습니다. 첫번째 회의장이 약 1만 3천평이라면 두번째 회의장은 그의 두 배인 2만 4천평 규모였죠. 세번째 회의장은 시내에서는 조금 떨어진 타이베이시 근교, 베이터우(北投)였습니다. 지금도 베이터우는 온천 관광지로 유명하죠. 그 시작은 일제시기로 박람회에서는 베이터우 일대 온천지에 약 360평 규모의 시설을 갖춰 타이베이 내 세번째 회의장으로 사용했습니다. 이렇게 세 개의 주요 회의장 외에 분회장도 있었습니다. 대도정(大稻埕)은 일제시기 타이완 상인들이 활약했던 대표적인 상권가인데요. 대도정 특유의 타이완 본토 분위기와 건축물에 맞춰 일본 총독부에서는 이곳을 분회장으로 정해 ‘남방' 특유의 인상을 형상화 하는 장소로 사용했습니다.  

타이완박람회 개최 전 박람회 주최당국은 광범위한 홍보 작업에 들어갑니다. 홍보를 위해 제국 각지에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타이완 내부는 물론 일본과 조선의 신문에도 홍보 광고를 게재했고, 철도역 거리에는 광고 간판을 세워두었습니다. 홍보 엽서와 포스터, 전단지는 물론, 선전노래, 레코드, 표어, 라디오 방송 등 각종 홍보 수단을 동원해 타이완에서의 박람회 개최를 홍보했습니다. 특히 타이완박람회 포스터는 타이완박람회의 특징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총독부 건물로 보여지는 하늘 위로 우뚝 솟은 근대식 건물이 포스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그 아래로는 타이완의 지역성을 상징하는 사원 지붕이나 열대 야자 나무가 형상화 되어 있습니다. 

1935년 타이완박람회 포스터 - 사진: 중앙연구원 근대사연구소

박람회에는 일본 정부의 근대화 업적을 선전하는 동시에 일반 민중이 참여할 수 있는 교육과 계몽, 오락이 함께 전시되어 있어 현지인들의 많은 관심을 끌었습니다. 박람회를 개막하고 일주일 뒤인 10월 17일부터는 조선, 만주, 타이완 대항 야구경기가 타이베이 제국대학에서 개최되었고, 11월에는 육상 경기도 개최했습니다. 운동 경기 외에도 타이완 차, 수산물, 쌀 등을 홍보하는 박람회가 타이베이시 공회당에서 열렸죠. 여기에 타이완 불교와 기독교인 대회 등 종교 행사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타이완의 고산지대에 사는 다양한 부족의 원주민들을 섭외해 악기를 연주하거나 원주민 전통 춤을 선보이는 공연도 개최했고요. 타이완 민간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신이죠, 마주(媽祖)를 모시고 용산사를 출발해 총독부 앞을 지나 대만일일신보사를 거쳐 다시 용산사로 돌아오는  퍼레이드를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타이완박람회가 끝나고 박람회를 비판하는 타이완의 여론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이는 6년전 조선에서 열린 박람회가 끝나자마자 조선인의 입장에서 일본인이 주인공이 되어 개최한 조선박람회에 대한 비판이 신문에 쏟아져나온 것과는 대조되는 현상입니다. 타이완박람회과 조선박람회를 비교하며 일본 정부가 가진 식민 권력의 두 가지 면모를 분석한 하세봉 연구자는 논문에서 타이완박람회가 열린 이듬해인 1936년 발표된 소설 <추신(秋信)> 속 근대 문물에 적응하지 못한 한 나이 든 타이완 지식인이 박람회를 보자 불만 대신 일본어, 양복, 기차 등 시대의 흐름에 뒤쳐진 비애감을 강조한다는데서, 타이완인들은 목소리를 드러내 비판하는 조선인과는 확연히 다른 반응을 보였다고 분석했습니다. 박람회에 대한 비판은 오히려 타이완에 거주했던 내지인, 즉 일본인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전 타이완 총독이라든가, 전 총독 장관이라는 사람들이 한 사람도 응하지 않았다. 결국 따지고 보면 귀족원을 대표하는 무전 여행자를 제외하고는 과계를 대표하는 북도 식산국장이 손님으로서 두드러진 정도이다. 조선의 시정기념에는 전 총리가 가고, 퍽무성 사무차관이 가고 기타 조야의 면면 있는 일류인물로 크게 광채를 띠었다. 그러나 타이완에서는 어찌된 셈인지 일류인물은 거의 타이완에 오지 않는다. …” (타이완경세신보 1935, 10면, 하세봉 2004:125에서 재인용)

타이완 역사에서 1935년 박람회는 타이완을 제국과 그 외 사람들에게 대규모적으로 홍보한 최초의 사례였습니다. 여기에는 전근대화된 타이완을 일본 정부의 노력으로 성장, 발전하였으며 이제는 타이완이 근대화 반열에 올랐다는 점을 홍보하기 위한 제국의 시선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참고문헌

呂紹理 (2005).《展示臺灣:權力、空間與殖民統治的形象表述》。台北:麥田出版。

하세봉 (2004). “식민지권력의 두 가지 얼굴: 조선박람회(1929년)와 대만박람회(1935년)의 비교”, 역사와경계 제51집 111-143.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프로그램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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