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완의 대표적인 영화 시상식, 진마장의 6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지난 주 무사히 막을 내렸습니다. 타이완에서 영화는 그 어떤 장르의 예술 보다 사람들의 일상과 기억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장르인데요.
최근 한국에서도 마침 영화 한 편이 크게 흥행중이죠. 바로1979년 12.12 군사반란을 다룬 영화, <서울의 봄>인데요. 코로나 이후 영화관 인구가 급감해 침체되어 있던 영화 시장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12.12 군사반란 당시 하나회라는 육군 내 사조직으로 대표되는 반란군과 이를 진압하고자 한 진압군 사이의 극적인 전투와 그로인한 한국 정치의 변화를 다시금 되돌아 보게 한다는 점에서 영화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영화 <서울의 봄>은 오는 12월 15일부터 타이완에서도 상영될 예정이라고 하니, 저는 타이완에서 개봉하는 첫 날 놓치지 않고 보러가려고요.
지난 주부터 <대만주간신보>에서 시작한 일제시기 타이난 외곽의 항구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 의사 우신롱(吳新榮)이 당시 타이난 시내를 중심으로 영화를 접한 이야기에 계속 이어나가봅니다.
“역에 도착하여 시간을 보니 시간표가 바뀌어 저녁 7시에 셔틀버스가 없다하여 다시 원래의 장소로 돌아가 기다렸다. 마지막 셔틀버스는 8시였으나, 회사의 관리 미흡으로 종업원이 태만하여, 마침내 9시가 넘어서야 차를 몰게 되었다. 이때 훈련 공습 경보가 발령돼 출발 시간이 또 지연됐다. 마침내 출발하였다. 서항에 도착하자 또 공습을 만났다. 시간은 이미 12시가 가까워졌고, 나는 어쩔 수 없이 걸어서 타이난까지 가기로 마음먹었다. 함께 걷던 사람들은 배가 고프거나 너무 피곤해서 걷지 못해 잠시 쉬었는데 나는 더 이상 지원차를 기다릴 수 없다며 모두에게 계속 걷자고 제안했고 두 사람만 나와 함께 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염수계(鹽水溪)에 이르러서는 이미 시냇물이 범람하여 통행이 불가능하였다. 그때 멀리서 굉음이 들려 화물차인 줄 알았는데 지원차였다. 안심하고 타이난까지 직통으로 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 가솔린차는 육군묘지 앞에서 또 고장이 났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다. 어두운 밤에 어둠을 더듬고 시내로 나갔다. 시내에 도착하니 새벽 3 시였다.”
영화를 보기 위해 저녁 6시 무렵 동네를 출발한 우신롱은 다음 날 새벽 세 시가 되어서야 시내에 도착했습니다. 우신롱과 같이 시내 외곽의 시골동네에 살던 과거 일제시기의 문화인들이 타이난와 같은 시내에 한 번 나가는 일이 이렇게나 어려웠습니다. 교통이 편리해진 오늘날에는 공감하기 어렵죠. 먼 길을 떠나는 나그네 마냥 시내로 가는 길은 시골에 있는 문화인이나 일반주민들에게 있어서 말그대로 ‘탈출’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시내에 도착한 우신롱은 드디어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볼 수 있게 됩니다. 우신롱은 영화가 문화인으로서 일상생활에서 꼭 실천해야 할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932년부터 의사활동을 시작한 그는 이듬해 ‘청풍회(靑風會)’라는 조직을 만들어 타이완인의 문화를 향상시키는 데 이바지하기 위한 활동을 병행했는데요. 그는 영화를 문화교양을 습득하기 좋은 수단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염세적인 인생관의 꿈에서 깨어나 건설적인 사회관으로 나아가라!
숙명론적 공상에서 변증법적 실재로 돌진하라!
슬픈 노래는 과거와 함께 묻어라!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즐거운 소리와 삶의 리듬뿐이다.
동지들이여! 우리는 지식의 교환에 의존하지 않고 우리의 교양의 수준을 높여야 합니다.
우리는 인간답게 살기 위해 문화의 은혜를 요구하며, 우리 가리청풍회는 그것을 위해 행동할 것입니다.”
(1933년 11월 8일 우신롱을 비롯한 청풍회 회원들의 창립선언문)
청풍회 회원들은 영화를 보기 위해 타이난 시내에 계속해서 드나들었습니다. 영화가 끝난 후에는 2차, 3차 모임을 가지며 밤늦게까지 먹고 마시며 영화 이야기를 계속 나누었죠. 1937년 각종 전쟁 동원과 경제적인 통제로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압박감이 있는 상황에서 이들은 ‘부성', 즉 타이난에서 이렇게 영화를 보며 이야기나누는 것을 통해 위안과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우신롱은 19세기 말 러시아 작가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5대 장편 소설 중 첫 번째 소설인 <죄와 벌>을 영화로 접합니다.
“저녁에 환자의 귓병을 치료하고 영화도 보러 가야 하기 때문에 따로 남쪽으로 내려가서 치료 후 바로 친구를 불러와 함께 궁고좌(宮古座)에 가서 명편을 봤는데, 바로 '죄와 벌'이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창작물을 우리는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장편을 접한다.”
러시아 출신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를 영화를 통해 접한 우신롱은 영화가 세계적인 작가의 작품을 접할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이라고 소개하죠. 우신롱이 <죄와 벌>을 봤던 1940년대 초, 같은 시기 타이베이에 있는 작가들도 동명의 영화를 보며 영화를 통해 소설을 읽는 묘미를 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유명한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예술영화 외에 국책영화도 종종 보았습니다. 그 중에는 중국 만주를 배경으로 일본 정부에서 만든 영화, 1939년 리샹란(李香蘭)이 주연한 <백란의 노래(白蘭之歌, 바쿠란노우타)>가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이향란으로도 알려져있는 리샹란은 1930년대 일제강점기 만주국에서 데뷔한 영화배우이자, 가수인데요. 중국 동북부 봉천(지금의 선양) 출신의 그녀는 일본 군부의 눈에 띄면서 만주를 넘어 일본, 조선, 홍콩 등 동아시아 전역에서 활동했습니다. 일본에서는 야마구치 요시코라는 이름으로 활약했죠. 우신롱은 영화 <백란의 노래>를 본 후 다음과 같이 남겼습니다.
“오후 6시 무렵 버스를 타고 타이난으로 향했다. 일행 대여섯 명이 세계관(世界館) 영화관에 가 본 영화는 <백란의 노래>였다. 국책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만주를 배경으로 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대륙의 장관인 광활한 경치로 사람을 감동시켰기 때문이다. 비록 이 영화가 의식적 형태나 예술적 수준에서는 결코 탄복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묘사된 내용과 역사적 사실, 시대의 동태로 말하자면 꽤나 감명 깊었다.”
그는 일본 정부가 만든 국책영화 외에도 프랑스 정부에서 만든 영화 ‘아름다운 전쟁', 그리고 독일의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기록한 영화 ‘민족의 제전' 등을 보기도 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엊그제 본 프랑스 영화 ‘아름다운 전쟁’과 오늘 본 독일 영화 ‘민족의 제전'은 모두 감동적이다. 제2차 유럽 전쟁에서 독일의 감동의 승리는 프랑스의 패배와 강한 대조가 되는데, 이 영화는 올림픽을 기록했다는 차원에서 볼 만한다. 제목과 같이 여러 다른 민족들이 함께 모여 경기하는 것은 정말 위대하다. 황인종이 흑인이나 백인에 뒤지지 않는 체질을 갖고 있어 자신감을 갖게 한다. 특히 일본인의 멀리뛰기와 마라톤 우승의 순간, 거의 눈물이 날 지경이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신롱이 영화 <민족의 제전>에서 본 일본인 마라톤 선수는 일본인이 아닌 바로 한국인 손기정 선수이죠. 그러나 손기정 선수는 일장기를 달고 '손 기테이'라는 일본어 이름으로 출전할 수 밖에 없었는데요. 이처럼 여러 나라의 국책영화 상영된 1940년, 일본군은 중국에서 이미 한창 전쟁중에 있었고, 동시대에 독일군은 프랑스를 격파한 후 영국을 폭격하기 위해 출병중이었습니다. 같은 해 9월에는 일본, 독일, 이탈리아가 동맹을 맺어 군국주의가 날로 커지고 있었던 시기이죠. 따라서 이 시기 식민지 타이완에 상영된 영화들은 국책 홍보물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우신롱 그는 이러한 영화를 통해 “시대의 동태"를 파악하고 “문화와 전쟁, 역사와 국가 등의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갖기도 하지만 영화에 녹아 든 나머지 어느 순간 일본인과 동일시하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당시 타이완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식민지 지식인, 문화인들이라면 겪을 수 밖에 없었던 세계 정세와 자신의 정체성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을 드러냅니다.
다음 주 이 시간에는 영화관에서의 데이트를 매개로 우신롱이 아내를 만나고 결혼 이후에도 가정 내 오락으로서 영화와 함께 보낸 이야기에 대해 들려드리겠습니다.
► 참고문헌
陳文松 《來去府城透透氣:一九三○~一九六○年代文青醫生吳新榮的日常娛樂三部曲》 蔚藍文化, 2019.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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