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이 비추고, 별과 달이 미소 짓는 곳, 그곳이 내 마음의 고향이다”
지난 주 <어반스케처스 타이베이> 시간에 타이베이 시립 미술관에서 현재 전시중인 한 작가의 작품을 소개해드리면서 마지막으로 위의 시 구절을 읽어드렸는데요. 이 화가는 바로 타이완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교육 받고 활동한 가 도쿠라이, 중국어이름 허더라이입니다. 청취자분들께 소개해드린 이 시 구절이 일주일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 계속 곱씹어보았습니다. 아마도 현재 타이베이 시립 미술관 2층에 전시된 그의 작품들을 직접 보고 경험해서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보다 구구절절하게 와닿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대만주간신보>에서는 허더라이가 남긴 여운을 되새기며 그의 어린 시절과 화가로서 꿈을 키워온 과정에 대해 보다 자세히 알아보는 시간 갖도록 하겠습니다.
허더라이(何德來, 1904-1986)는 타이완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지 10년째가 되던 해인 1904년, 타이완의 북서쪽, 타오위안과 먀오리 사이에 있는 신주(新竹)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생활은 녹록치 않았지만 가족과 함께 지낸 시간은 그에게 있어 훗날 창작의 영감이 될만큼 따뜻한 추억이었는데요. 갓 다섯 살이 된 1908년, 소작료를 미처 납부하지 못한 허씨의 아버지는 마지못해 허더라이를 신주의 대지주인 허자이우(何宅五)의 양자로 보내게 됩니다. 입양된 허더라이는 이름도 허징장(何鏡章)으로 개명했습니다. 경제 환경도 큰 변화를 겪었습니다. 대지주의 양자가 된 허더라이는 다른 여느 타이완 아이들과 달리 일찍이 일본 도쿄로 건너가 초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9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일본 도쿄에 건너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그에게 타향에서의 유학살이는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겠죠. 어린 나이에 가족들과 떨어져 있는 것도 쉽지 않았을 뿐더러 일본인이 절대 다수인 도쿄의 초등학교에서 타이완 출신이라며 학우들의 놀림을 받는 일도 견디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림 그리는 것, 미술만이 허더라이가 타향의 유학생활에서 인정받은 유일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잘하는 것을 이 때 처음 발견한 것이죠. 5년 뒤인 1917년 졸업 후 다시 타이완으로 돌아와 현재 타이중제1고등학교(臺中市立臺中第一高級中等學校)의 전신인 타이중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이 때 자신의 원명인 허더라이로 다시 개명하죠. 그리고 이 때부터 그는 용돈으로 항상 물감을 사서 스스로 유화 창작을 해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현존하는 그의 최초의 작품도 1920년, 그가 중학교 재학 중이던 시기(1918-1921)에 나왔습니다.
중학교 졸업 후 1922년 양아버지를 설득한 끝에 일본으로 건너 간 허더라이는 3년 간의 응시 끝에 1927년 23세의 나이에 비로소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현 도쿄예술대학 유화과)에 입학했습니다. 1922년부터 1927년까지 입시를 준비하는 동안 여러 차례 시험 좌절은 물론, 타향에서의 이방인의 삶, 관동대지진 등을 겪었는데, 바로 이 때 온화한 성격에 일본 전통 악기 고토(琴)를 연주하는 히데코(秀子)라는 여자친구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일본 전통 음악계의 거장인 미야기 미치오(宮城道雄)의 문하생이기도 했던 그녀와 8년 동안의 교제 끝에 결혼하기도 했죠.
도쿄미술학교에 재학중(1927-1932)이던 허더라이는 기존의 정규 미술학교 체계와 공식적인 미술 전시의 메커니즘이 가진 폐쇄성을 깊이 체득하고, 결연히 다른 경위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공식적인 길이란 1907년부터 일본 문부성에서 주최한 ‘일본미술전람회(日本美術展覽會)’로 일본 미술학도들의 등용문이었죠. 1919년부터는 ‘제국미술전람회'로 그 명칭이 바꼈습니다. 그는 미술학교에 입학하기 전에는 당시의 제국미술전람회를 동경하였으나, 어느 날 문득 자신이 작품을 제시하면 대가들의 심사위원들의 심사를 받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반 사람들은 모두 그것이 최고의 무대라고 생각하지만, 그 심사위원들은 자신이 모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적막한 느낌이 몰려와 나는 자신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고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1932년 도쿄미술학교 졸업 후 자신의 아내 히데코와 함께 고향인 타이완 신주로 돌아옵니다.
1933년작 <여름풍경>은 타이완 신주시 동취 외곽의 한 지역인 적토기(赤土崎)를 묘사한 작품이다. 강한 바람으로 유명한 신주의 날씨를 강조하기 위해 그는 야수파와 가까운 기법을 사용해 논, 논두렁, 가옥, 숲과 하늘의 색채를 표현했는데요. 특히 작품의 배경에서 강한 바람을 맞아 왼쪽으로 기울어진 나무는 신주의 자연을 생동감 넘치게 표현했습니다.
1932년부터 1934년까지는 허더라이가 타이완 예술계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시기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 자택을 화실로 개방하고 1933년에는 ‘신주미술연구회’를 조직해 사계절 내내 신주공회당에서 미술전시회를 개최하였습니다. 당시 신주 지역의 현대 미술에 많은 노력과 공헌을 아끼지 않았죠. 신주미술연구회에는 일본인과 타이완인을 막론하고 당시 신주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화가들이 여럿 참여해, 매주 한 차례 정기적으로 모여 토론회를 갖고 스케치 창작 및 정물 사생을 위한 연수회를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1930년대 초반 허더라이는 타이완 신주 지역의 새로운 미술 풍조를 성행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위급한 위병에 걸려 치료차 1934년 일본에 돌아가야 했습니다. 아내와 함께 도쿄 메구로 구에 있는 집으로 정착한 허더라이는 이 집에서 평생을 살았으며, 이후 일본 전쟁의 여파로 타이완 미술과의 연동을 차단해야 했습니다. 전쟁의 여파가 조금 누그러진 1950년대 중반, 자신의 전시회를 개최하기 위해 잠시 타이완에 돌아온 것 외에 1986년 그가 사망할 때 까지 다시는 고향 땅을 밟지 않았습니다.

허더라이가 일본서 활동할 때 갖고 다닌 명함에는 그의 이름 석 자 아래 '출생지 타이완'이라고 적혀있다. - 사진: Rti 한국어방송 (TFAM 2층 전시실)
그가 일본에서 화가로 활동하며 갖고 다녔던 명함에는 그의 이름 석 자가 한자로 크게 적혀있고, 한자 이름 위에는 작은 히라가나로 발음, 가 도쿠라이(か とく らい)가 써있습니다. 인상깊은 것은 그의 이름 아래에 적혀 있는 내용입니다. 바로 ‘출생지 타이완 (出生地 台灣)’. 그는 자신이 타이완 사람이라는 것을 명함에 온전히 드러내며 일본에서 활동하는 중에도 자신의 출신을 잊지 않았습니다.
1973년 아내 히데코를 잃고 독거하다 이듬 해 출판한 <나의 길>이라는 시집의 마지막 구절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오늘이 끝나고 후회 없이 내일의 나날도 계속 가야 하는 나의 길”
그의 시집 전체는 '나의 길'에 멈춰있습니다. 그는 평생 정부와 관방 체제와 타협하지 않고 상업적인 이익도 거부한 채 창작의 자유에 대한 신념을 자신의 창작활동의 본질로 삼고 그렇게 평생 살아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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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더라이는 일제시대 총독부 관할하의 제도권을 통해 발돋음한 화가들과는 별도로 ‘개인’의 예술창작이 중요한 구심점으로 작동한 예술가 중 한 사람입니다. 일본의 타이완 식민 통치 시기가 끝난 후 그는 평생 일본 도쿄에 주로 거주하며 살았습니다. 1958년부터 그가 몸담고 있었던 일본 재야 예술단체 '신구조사'의 중요 운영위원으로 타계할 때까지 활동했고, 1970년대부터는 그 외의 일본의 여러 예술단체에 참여하여 그림을 보급하고 후진을 육성하는 데 힘썼습니다. 그가 남긴 시집 '나의 길'과 수 백여 점의 작품은 일제시기 타이완에서 태어나고 유년 시기를 보낸 한 청년이 결국 일본에서 생을 마감한 한 예술가의 일생을 톺아보게 합니다. 비록 일본에서 가 도쿠라이라는 이름의 화가로 살았지만, 그의 명함에 남긴 ‘출생지 타이완'은 자신의 길은 여느 일본인과는 조금 다르다는 것, 그렇기에 자신의 삶을 보다 소중히 다루고자 하는 애정을 드러냅니다. 그가 60여 년 동안 일본에 거주하면서도 귀화하지 않고 타이완 국적을 포기하지 않은 것도 그래서였을 것입니다.
참고문헌
台北市立美術館,《何德來九十紀念展》,1994.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Rti 중앙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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