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살아가고 있는 우리. 한 번이라도 다른 삶을 살아볼 수 있을까요? 반복되는 삶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문학입니다. <포르모사 문학관>에서 타이완 특유의 문학 세계 속으로 함께 들어갑시다.
안녕하세요! 저는 <포르모사 문학관> 시즌2의 진행자 안우산입니다.
“문학이란 무엇인가요? 문학은 하나님이 특정인에게 내리신 천벌이겠죠.”
「文學是什麼呢?文學是上帝給特定的人物降下的天譴吧。」
타이완 문학 대가 예스타오(葉石濤)가 역사에 남긴 한마디입니다. 애서가에게 문학은 아름다운 경치와 같은 행복한 존재지만, 예스타오에게는 고통스럽고 숙명적인 벌입니다. 일본 식민지 시대 타이난 명문가 출신인 그는 17살의 어린 나이로 당시 타이완 최고의 문학 전당에 입성했으나 2차 세계대전 후 어쩔 수 없는 시대적 변화 때문에 15년 동안 글쓰기를 중단했습니다. 비록 끊임없는 독서와 공부를 통해 문학의 길을 계속 걸었지만 “우리 시대 사람은 일류 작가가 될 수 없을 운명”이라고 한탄했습니다.
타이완 문학 학자 양추이(楊翠)에 따르면, 예스타오와 같이 일본 식민지 시대 출생, 일본과 중화민국의 정권교체를 겪은 대부분 타이완 지식인들은 삶에서 두 번의 단절을 경험했는데, 첫째는 일본어 폐지 정책으로 인한 언어의 단절, 둘째는 독재체재로 인한 인생 전반의 단절이었습니다. 이들은 평생 남의 언어를 배우다 만년에야 타이완어, 하카어, 원주민어 등 모국어를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창작 에너지가 가장 왕성한 20-30대에 책 한 권, 무심코 던진 한마디에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스타오가 남긴 100권에 가까운 작품, 그리고 타이완 최초의 문학사를 보면, 그가 결코 일련의 좌절에 무너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류 작가가 될 수는 없지만 후배 작가들이 보다 좋은 환경에서 창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이겠죠. 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에는 고향 타이난의 문화경관과 길거리 음식이 잘 기록되어 있는데요. 맛집, 골목길, 백색테러 유적지 등 다양한 테마의 ‘예스타오 산책 코스’가 있을 정도로 타이난 여행에 좋은 참고가 됩니다. 네덜란드인이 타이난을 점령한 1624년을 시작으로, 올해는 타이난이 세계 무대에 등장한 지 4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타이난 시내에 위치한 타이완문학관이 인근 예스타오문학기념관과 함께 특별전시회를 열고 있는 지금, 바로 이 위대한 작가를 알아보기에 좋은 시기입니다.


타이완문학관과 예스타오문학기념관이 공동 주최한 예스타오 특별전시회 - 사진: 안우산
중학교 때부터 세계문학을 폭넓게 읽은 예스타오는 16살 때 소설을 창작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식민지 시대 타이완 문단에는 양대 산맥이라는 두 문학지가 있었는데, 각각은 사실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를 강조하는 《타이완문학(臺灣文學)》, 그리고 낭만적이고 탐미적인 표현을 선호하는 《문예타이완(文藝臺灣)》이었습니다. 당시 예스타오는 초녀작을 《타이완문학》에 기고해 가작으로 선정되었지만 잡지에 게재되지 못했습니다.

일본 식민지 시대 타이완 문단 양대 산맥이라 불리는 두 문학지 《타이완문학(臺灣文學)》과《문예타이완(文藝臺灣)》 - 사진: 안우산
실패를 맛본 후 다른 잡지로 눈을 돌려 《문예타이완》의 문예 살롱에 참여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교복을 입은 예스타오는 《문예타이완》 편집장 니시카와 미쓰루(西川満)를 만나 그의 인정을 받았고, 고등학교 졸업하자 보조 편집자로서 《문예타이완》에 입사했습니다. 예스타오를 좋게 본 니시가와 편집장은 예스타오의 시야를 넓히기 위해 그를 고급 레스토랑에 데려가 이국적 요리를 많이 맛보았는데, 미식의 도시 타이난 출신인 예스타오는 타이난 음식이 훨씬 맛있다고 생각했지만 이 덕분에 견문을 확실히 넓혔습니다. 지식인들 사이에서 교류가 활발한 분위기도 훗날 예스타오의 창작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예스타오가 정리한 자신의 작가 연보를 보면, 1951년 27살 때 “사정이 생겨 초등학교 교직을 그만둔 뒤 두문불출하고 3년간 집에서 독학했다”라는 서술이 있고, 그 후 십여 년 동안 아무런 작품도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민주화 이후의 자료에 따르면, 당시 예스타오는 감옥에 있었죠. 출옥 후에도 지울 수 없는 전과 기록 때문에 구직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타이완의 통치자가 일본에서 중화민국으로 변하는 순간, 그의 작가 생애는 사형선고를 받은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중화민국 정부가 타이완을 접수하자 일본어 글쓰기를 전면 금지했기 때문입니다. 이어 국공내전 패배에 따른 백색테러는 그를 끝없는 구렁텅이로 밀어넣었습니다. 1947년 228사건 때 지금의 타이완문학관 앞에서 총살당한 탕더장(湯德章) 변호사의 마지막 모습도 지켜봤습니다. 이는 앞서 언급한 당시 지식인들이 겪은 두 번의 단절입니다. 앞날이 암울했던 이 시절에 예스타오는 자이(嘉義)와 가오슝(高雄)에서 교직을 맡았고, 1967년 가오슝 줘잉(左營)으로 이사했지만 그의 대부분 작품은 여전히 타이난을 배경으로 했습니다.
이 암흑의 세월을 환하게 비춘 사람은 예스타오와 함께 1925년 생으로 훗날 타이완문학의 양대 산맥이라 불리는 중자오정(鍾肇政)입니다. 젊은 나이에 문단을 놀라게 한 예스타오와는 달리, 중자오정은 1960년에야 소설 《루빙화(魯冰花)》를 통해 인지도를 얻었습니다. 정부가 추진한 반공문학에 맞서 약세에 처한 타이완계 작가들을 결속시키기 위해 중자오정은 1965년 10권의 《본성 작가 작품집(本省籍作家作品)》을 편찬했습니다. 여기의 본성(本省)이란 1945년 후 중국에서 온 외성인(外省)과 상대한 타이완 토박이입니다. 예스타오는 이 작품집을 보고 희망의 빛을 발견했습니다.
1980년대 타이완 본토의식이 대두하기 전에 타이완문학은 부재했고, 중국문학만 있었습니다. 작가이자 문학평론가 주요우쉰(朱宥勳)에 따르면, 1970년대 타이완대학교 중국어문학 연구소에 유학한 일본인 대학원생 오카자키 이쿠코(岡崎郁子)가 타이완문학을 주제로 석사논문을 쓰기로 했는데, 교수가 주제를 듣자 “타이완문학? 타이완에는 언제 문학이 있지?”라고 되물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예스타오는 중자오정 등 본토 작가들과 함께 타이완문학을 세우기로 결심했습니다. 소설 창작을 다시 시작하는 것은 물론, 문학평론에 주력하면서 타이완 문학사 구축에 나섰습니다. 또한 2차 세계대전 이후 단절된 일본 식민지 시대의 문학전통을 보완하기 위해 일본어 작품을 대거 번역해 타이완 문단으로 도입했습니다. 주요우쉰은 “타이완문학과가 없던 시절에 예스타오는 학과 자체였다”며, “아랍, 아프리카 문학까지 섭렵하고 오늘날 우리가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독서량이 엄청났다”고 평가했습니다.

다양한 언어로 번역된 예스타오의 《타이완문학사》 - 사진: 안우산
예스타오가 세상을 떠난 후 4년이 되는 2012년, 타이난시정부는 예스타오의 출생연도와 같은 1925년 세워진 타이난산림사무소를 예스타오문학기념관으로 개축했습니다. 붉은 벽돌로 지은 이 건물은 예스타오의 나이와 같고, 따뜻한 분위기도 꽤 비슷합니다. 문학관은 예스타오 생전 쓰는 책상과 침대를 가오슝에서 운반해 전시하고 있습니다. 오는 10월 6일까지 열리는 특별전시회에서는 예스타오가 썼던 원고지, 펜, 시계, 안경 등 소중한 유물을 관람할 수 있습니다.
문학기념관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의 ‘달팽이 골목(蝸牛巷)’도 놓치면 안되는 중요한 장소인데요. 예스타오는 명문 출신이지만, 2차 세계대전 후 정부의 토지정책 때문에 집안형편이 어려워졌습니다. 생계를 위해 온 가족은 큰 집에서 작은 집으로 이사해 쪽방살이를 시작했습니다. 새 집이 소재한 좁다랗고 구불구불한 이 골목은 예스타오로부터 ‘달팽이 골목’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습니다. 타이난시정부의 추진으로 달팽이 골목은 예스타오를 기념하는 문화단지로 탈바꿈했고, 골목 곳곳에서 귀여운 달팽이 조형물과 벽화를 볼 수 있습니다. 예스타오가 살던 집도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달팽이 조형물로 가득찬 달팽이 골목 - 사진: 안우산
문학을 좋아하는 천진난만한 젊은이에서 타이완문학의 토대를 마련한 대가로, 예스타오는 평생을 바쳐 부재했던 타이완문학을 구축했습니다. “땅이 없다면 어찌 문학이 있겠는가?(沒有土地,哪有文學?)” 예스타오가 남긴 또 하나의 말씀입니다. 문학은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자 인간이 걸어온 기록입니다. 때문에 신이 내린 천벌처럼 아플 수도 있죠. 예스타오를 비롯한 본토 작가들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도 타이완만의 이야기를 할 수 없었을 겁니다.
엔딩곡으로 예스타오가 좋아하는 노래, 프랑스 음악가 클로드 드뷔시의 ‘달빛(Clair de Lune)’을 띄워드리며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포르모사 문학관>과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으로 RTI 한국어 방송의 안우산이었습니다.
▲참고자료:
1. 朱宥勳,《他們沒在寫小說的時候:戒嚴台灣小說家群像》。



Rti 중앙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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