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인물이나 신, 영웅 등을 기리거나 숭배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동상. 동상은 고대 시기부터 특정 종교에서 신성을 강조하거나 혹은 전쟁에서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제작되는 경우가 많았죠. 현재 타이완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동상은 당연 장제스(蔣介石) 동상입니다. 무려 약 4만 5천 여개의 동상이 타이완 전국에 세워져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동상을 세우기 시작한 문화가 타이완에 정착한 것은 국민당 정부 이전인 일본 식민 시기부터라고 하는데요. 정치적인 고려와 함께 식민지 지배를 위한 강력한 권위의 표명이 필요했던 당시, 타이완 총독부는 짧은 시간 안에 많은 공공장소와 학교 등에 동상을 많이 세우곤 했다고 합니다.
타이완 총독부의 첫 민정국장인 미즈노 준을 기념하기 위한 동상을 1903년 원산 공원에 세운 것을 시작으로, 타이완 전역의 공립학교와 초등학교에는 이니모리 소타케와 나카모리 다케시 동상 세우는 것이 유행하게 되었죠. 이니모리 소타케는 일본 농업 전문가로, 나무를 짊어진 모습을 한 이니모리 소타케 동상을 통해 타이완 사람들에게 근면을 가르치고자 했고, 군사 전문가인 나카모리 다케시가 말을 타고 있는 동상을 통해 타이완 사람들에게 일본 천황을 옹호하도록 가르쳤습니다.
오늘 <대만주간신보> 시간에는 일제시기 타이완의 동상 문화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 갖도록 하겠습니다.
–
20세기 초 일본의 한 유명 화가였던 다테이시 테츠오미(立石鐵臣, 1905-1980)는 타이베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타이베이에서 8년 동안 살았던 그는 훗날 타이완을 회상하며 떠올릴 수 있는 기억 중 하나로 고토 신페이(後藤新平)의 동상이라고 답한 바 있다.
“초등학교를 오가던 길에 동상 아래를 지날 때면, 나는 스스로를 길가의 작은 풀처럼 여기며 묵묵히 그 거대한 존재를 우러러보곤 했다.”
다테이시의 세밀한 묘사에 따르면, 동상의 가슴에는 훈장과 기념장 11개가 있었고, 왼손에는 책을 쥐고 있었으며, 당당하게 웃고 있었는데, 부족한 섬세함이 오히려 고토의 성격이 더 잘 드러내는 것 같다고 했다.
근대화의 상징인 동상
타이완에서는 전통적으로 목각이나 석상이 종교와 관련되어 있었으나, 현대 인물을 조각상으로 만드는 개념은 없었다. 이는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 초기, 일본에서는 『서양문견록(西洋聞見錄)』이라는 책을 통해 유럽과 미국의 동상 문화를 소개하며, 서양에서는 도시 거리나 건물 옆에 위인 동상을 세워 공적을 기리고 후세에 길이 전한다고 했다.
일본의 첫 동상은 1880년(메이지 13년)에 세워진 ‘일본 무사 존중 동상(日本武尊)’으로, 일본 세이난 내전에서 전사한 고향 군인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것을 목적으로 세운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 동상은 현재 일본 서쪽 가나자와의 겐로쿠엔(兼六園) 공원에 있다. 높이 5.5m의 일본무존 동상과 일본 최초의 분수가 일본 3대 명원 중 하나로 꼽히는 겐로쿠엔의 위엄을 더한다. 이후 1888년(메이지 21년)에는 황거(皇居) 근처의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 내에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郎)의 동상이 세워졌다. 영어와 서양 군사학을 배운 오무라는 메이지 정부의 병부대보(兵部大輔, 국방부 장관에 해당)를 맡아 징병제를 수립해 일본 군대의 근대화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의 동상은 망원경을 들고 전통 하오리를 걸친 채 짚신을 신은 모습으로, 일본 정신을 지닌 서양식 인재임을 강조했다.
오무라 마스지로 동상을 설계한 오쿠마 우지히로(大熊氏廣)는 일본 최초의 서양 조각가였다. 일본은 1876년(메이지 9년) 공부미술학교(工部美術學校)를 설립하고, 이탈리아 조각가 빈첸초 라구사(Vincenzo Ragusa)를 초빙해 서양 조각을 가르쳤는데, 오쿠마 우지히로가 그의 제자였다. 그렇게 일본에서는 이미 생생한 현대 인물들이 동상으로 활발히 제작되고 있었다. 예를 들어, 1893년(메이지 26년) 게이오 의숙(慶應義塾, 현재의 게이오 대학의 전신)에 세워진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동상은 그의 교육 사업과 저술 활동을 기려 제작되었으며, 일본의 서구화를 선도한 그의 공적을 상징했다.
타이완 총독부 제3대 민정장관 고토 신페이 동상의 유행
타이완에서는 타이베이 신공원에 제3대 민정장관인 고토 신페이(後藤新平) 동상이 1911년(메이지 44년) 6월에 제작되었다. 그 이듬해 2월에는 타이난 기차역 앞, 4월에는 타이중 공원 안에도 그의 동상이 설치되었다. 동상이 막 세워진 당시 고토 신페이는 당시 만주철도의 사장으로 타이완을 떠났음에도 타이완의 동상 스타가 되었던 것이다. 타이완 총독부의 제4대 총독인 고다마 겐타로가 1898년에 취임할 당시 일본 식민 치하의 타이완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일본 내에서는 타이완을 프랑스에 1억 엔에 팔자는 제안도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독일에서 박사 과정을 마친 고토 신페이를 민정장관으로 임명하자 상황은 달라졌다. 고토는 먼저 1,000명 이상의 기존 일본 관료들을 쫓아내고, 행정을 새롭게 정비한 후, 호적 조사와 토지 조사를 시작했으며, 공채를 발행하고 전매제도를 도입했다. 그러면서 타이완은 빠르게 근대화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고토의 식민 통치 방법은 후에 깊은 영향을 미쳤고, 그 후에 사람들은 그와 그의 상관인 고다마 전 총독을 동상의 기단에 올리게 되었다.
타이완 최초의 동상, 미즈노 준 동상의 유래
하지만 일제시기 타이완에서 가장 최초의 동상은 타이베이 신공원의 고토 신페이 동상이 아니라, 타이완의 첫 번째 공원인 ‘위엔산 공원’에 세워진 미즈노 준(水野遵, 1850-1900) 동상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타이완 사람들은 미즈노 준이라는 이름을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를 전 해협교류기금회 이사장 구전푸(辜振甫)와 연관 지어 이야기하면 타이완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미즈노 준이 없었다면, 100년 동안 번영한 구씨 가문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 단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씨 가문의 기반은 구전푸의 아버지 구셴룽(辜顯榮, 1866-1937)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청나라가 타이완을 일본에 할양한 직후, 일본의 근위사단은 아오디(澳底)에서 상륙해 타이베이성을 접수하려 했다. 당시 타이완 사람들은 일본의 지배를 강하게 거부하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각기 다른 성(省) 출신의 청나라 군대는 혼란에 빠져 방화와 약탈을 일삼았고, 타이베이성은 무질서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이런 혼란 속에서 일본군은 섣불리 진격하지 못했다. 이에 구셴룽은 타이베이의 유력 상인들의 부탁을 받고, 탄원서를 들고 지룽(基隆)으로 가서 일본군에게 타이베이 진입을 요청했다.
당시 총독부 민정국장이었던 미즈노 준과 몇몇 군 고위 관계자들은 지룽으로 찾아온 구셴룽을 면담했다. 원탁에 둘러앉은 자리에서 일부는 구셴룽을 항일 지도자 유융푸(劉永福)가 보낸 첩자라고 의심했고, 어떤 이는 그를 ‘도적’이라며 몰아세우기도 했다. 당황한 구셴룽은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는데, 이때 미즈노 준만이 반대 의견을 무릅쓰고 구셴룽을 ‘의로운 민간인, 정의롭고 의협심이 있는 사람’이라 평가하며 그의 신변을 보호했다. 그리고 이 사건은 구셴룽에게 부와 명예로 향하는 열쇠를 쥐여주었다.
6개월 후, 구셴룽은 새로운 일본 정권의 주요 인사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먼저 미즈노 준과 함께 도쿄로 가서 서훈(敍勳)을 받았으며, 이후 미즈노 준은 구씨 가문이 있는 루강(鹿港)을 방문해 점심을 함께했다. 곧 구셴룽은 타이베이 보갑총국장(保甲總局長)이라는 고위 관직을 얻었고, 소금 생산·판매 독점권까지 확보해 큰 부와 권력을 누리게 되었다.
1900년, 63세의 미즈노 준이 사망하자, 구셴룽은 그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미즈노 준의 동상 건립을 주도하며 공사비 4,000엔을 기부했다. 그렇게 1903년 1월 18일, 타이완 최초의 인물 기념 동상이 탄생했다.
타이완인 동상은...?
한편, 타이완 사람이 동상으로 기념된 사례는 극히 드물었다. 부유한 가문이 개인적으로 제작해 보관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공공장소에 세운 타이완인 동상은 거의 없었다.
당시 일본식 교육을 받은 타이완 사람들은 학교에서 <기미가요 소년(君が代少年)>라는 인물을 배웠다. ‘기미가요’는 일본 국가이며, 소년은 먀오리(苗栗) 출신의 잔더쿤(詹德坤)이라는 12세 소년이다. 일본 당국은 이 소년이 1936년 4월 죽음을 맞는 순간까지 일본 국가를 부른 이야기를 수록했다. 이 이야기의 영향으로 모금 활동이 이루어졌으며, 잔더쿤 소년의 동상이 그의 모교인 먀오리 공관공학교(公館公學校) 에 세워졌다. 이 동상은 실물 크기로 제작되어 교과서에도 삽입되었으며, 일본 황국 사상을 확산시키고 타이완 사람을 진정한 일본 황민(皇民)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도를 강하게 드러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일제시기 타이완 곳곳에 세워진 다양한 동상들은 결국 두 번의 큰 시련을 겪었다. 첫 번째는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을 기습 당시, 타이완의 발전에 기여한 영국·미국 인사들의 동상이 ‘귀축영미(鬼畜英美, 잔인한 영국·미국)’라는 비난 속에 일본인들에 의해 제거되었다. 두 번째는 일본의 패전과 항복. 국민정부가 타이완을 접수한 후 이번에는 일본인 동상들이 대거 철거되고, 그 자리에는 하나둘 중국 인물들의 동상이 대신하게 되었다. 앞서 설명한 타이베이 신공원의 고다마 겐타로와 고토 신페이 동상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그 자리에는 정성공(鄭成功), 추펑자(丘逢甲), 량치차오(梁啟超), 롄헝(連橫)의 동상들이 새롭게 차지하게 되었다.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Rti 중앙방송국
Rti 중앙방송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