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완의 일본 식민통치 시기는 총독부의 계획 하에 근대식 학교가 전국 단위로 생기기 시작한 시기이죠. 지금의 초등학교의 전신인 공학교/소학교, 중등학교의 전신인 중학교와 여자고등보통학교/고등여학교 등이 타이베이, 타이난, 타이중 등 주요 도시를 시작으로 타이완 전국에 설립되면서 학교 제도와 학생과 선생님, 학부모 등과 같이 학교 제도에 따른 다양한 사회역할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학교 교원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일본에서 건너 온 일본인 교사 외에도 타이완 학교 제도 내에서 타이완인 교사를 배출하기 시작하는데요. 타이완 출신 여교사의 성장이 특히 눈에 띕니다. 과연 타이완 여성들은 어떤 임용 절차를 거쳐 학교 선생님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들이 학교 교원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어느 정도였을까요? 그들의 월급과 대우는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는 일본인 교사, 혹은 타이완인 남교사와 차이가 있었을까요? 오늘 <대만주간신보> 시간에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타이완 여교원 수의 성장
초등학교의 전신인 공학교와 소학교가 탄생하려면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필히 있어야겠죠. 선생을 배양하기 위해 타이완에서는 여자 중등학교나 사범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에 한해서 교원 자격을 부여했습니다. 그렇다면 일제시기 타이완 출신 여교원은 대략 몇 명 정도 있었을까요? 통계에 따르면, 1903년부터 1943년 사이 타이완 여교원 수는 꾸준히 성장하는 추세를 보입니다. 1903년에는 34명이었던 교원 수가 1925년에는 457명, 1943년에는 2055명으로 급증했죠. 일제시기 여성교육이 점차 보편화되고, 여성들도 경제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여성 직업군이 늘어났고, 그에 따라 여교원의 수도 상당히 증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교원 수와 비교해볼 때 여교원의 수는 여전히 적었습니다. 중일전쟁 및 2차세계대전 발발로 인해 1938년 이후 적지 않은 타이완 남교원이 징집 대상이 되어 여교원이 상대적으로 많아졌던 시기를 제외하고는요. 총독부는 기본적으로 타이완 출신 여교원 양성에 많은 경비를 들이려하지 않았죠. 게다가 여교원 수가 전체 교원 수의 1/3을 초과할 수 없다는 규정까지 있어, 총독부는 교원 양성에 있어 제도적으로 명백하게 성차별을 두고 있었습니다.
같은 여교원임에도, 타이완 출신이냐 일본 출신이냐에 따라서도 교원 수가 현저히 차이가 났습니다. 1917년 이전에는 일본 출신 여교원이 없었음에도, 일본인 여교원 수가 끊임없이 성장하면서 1943년에 이르자 타이완 여교원 수의 3배에 이르게 됩니다. 전쟁 시기가 되자, 타이완 출신 학생을 주로 가르치는 공학교(소학교는 타이완에 사는 일본인 학생을 위주로 함)에서도 일본 국적의 교원을 채용하니, 타이완 여교원이 가르칠 수 있는 자리는 현저히 적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시기 남교원의 감소로 타이완 여교원은 뜻밖의 자리를 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일제시기 여성사 연구의 대가인 여우젠밍(游鑑明) 학자가 인터뷰한 천비진(陳碧金) 씨는 1945년 타이베이제3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타이완 은행에 채용되었는데, 당시 타이베이가 자주 공습을 받아 시 외곽의 베이터우로 피난을 갔고, 은행 일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공교롭게도 당시 베이터우 주변 한 공학교에서 교원이 출결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학교는 그녀가 제3고등여학교 출신임을 확인하고는 그녀를 즉각 채용하였다고 했습니다. 일본 국적의 남교원 자리를 그녀가 대신하게 된 것이죠. 이는 전쟁 시기이기에나 가능했던 비교적 특수적인 상황이었습니다.
타이완 여교원의 차별 대우: 임용자격 취득과 교원 직함, 그리고 월급
일제시기 초기, 교원훈련을 받은 여성이라고 누구나 교원에 합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공식적으로 임용 자격을 취득하려면 교원자격을 높이는 전문 강습회를 거쳐야만 했죠. 여교원을 양성하는 공식적인 교육 제도가 없었던 일제 초기, 총독부는 매년 여름방학 마다 각종 강습회를 개최했습니다. 그러다 1919년 타이베이제3고등여학교에서 사범과를 설치하면서, 이곳을 졸업한 학생은 여교원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출 수 있게 되었죠. 그러나 남학생만 다닐 수 있던 사범학교나 중학교에 비해 고등여학교 졸업자들은 추가로 시험을 보거나 강습회 등에 참여해 자격을 취득해야만 했었습니다. 이렇게 겨우 임용 자격을 가졌지만, 타이완 출신 여교원이 맡을 수 있는 직함은 대부분 말단직이었죠. 예를 들어, 당시 처음 합격한 교원의 직함으로는 ‘교론(教論)’과 ‘훈도(訓導)’가 있었는데, 비교적 직급이 상대적으로 높은 교론은 모두 일본 국적의 교원이었고, 타이완인은 훈도만 맡을 수 있었죠. 타이완 남교원은 1910년에, 타이완 여교원은 1919년에야 처음으로 ‘교론’직을 맡기 시작했습니다.
상대적으로 타이완 여교원에게 불리했던 교원 제도는 임용 자격 취득과 직함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임금도 차이가 컸죠.
타이완 주재 미국 영사 아몰드(J.H. Amold)는 1908년 당시 타이완 출신 교원 월급이 일본 출신 교원의 1/3에 불과했다고 지적했습니다. 1920년대 들어 교원 봉급이 조정되었습니다만, 타이완 출신 교원의 대우는 여전히 적었습니다. 자격이 같은 타이완인과 일본인 교원의 초임 봉급은 동일했지만, 일본 출신 교원은 60% 더 많은 가산금과 기숙사 및 집세 수당 등을 추가로 주었죠. 게다가 타이완인 여교원은 타이완인 남교원에 비해서도 낮았습니다. 1930년대 남녀 합격 교원의 월급을 비교해보면, 3~4엔 이상 차이가 났습니다.
‘차별’ 대우에도 불구 ‘만족'했던 타이완 여교원들
이렇듯 일제시기 타이완 출신 여교원의 수는 급증했다고 하지만, 처우는 상당히 불공평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불공평한 처우에도 불구, 당시 교원에 재직했던 타이완 여성들의 불만은 그리 크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왜일까요? 여우젠밍 학자가 당시 교원에 재직했던 타이완 여성들을 인터뷰한 결과, 그들은 대부분 같은 여성인 일본 국적의 여교원과의 대우 차이에 대한 불평등을 이야기할 뿐, 타이완인 남교원의 대우와의 차이를 언급하는 경우는 적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들여다보면, 당시 제도적으로 사범학교에 갈 수 없었던 여성의 경우 고등여학교의 사범과나 강습과를 졸업밖에 할 수 없었기에, 사범학교를 졸업한 남교원이 자신들에 비해 높은 대우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여기에 더해, 당시 교원에 재직했던 타이완 여성들은 대다수 경제적 압박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도 또 다른 이유라고 여우 학자는 분석합니다. 교원이라는 직업을 가지려면 고등여학교와 같은 중등학교를 졸업해야 했는데, 이런 중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여성은 대부분 중상층 가정 출신임으로, 자신의 수입에 의지해 생활을 유지해야 하는 여성은 소수에 불과했던 것이죠.
예를 들어, 일제시기 초 여교원의 월수입은 일반적인 핵가족 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였죠. 1920년대 말, 기본 봉급이 올라가면서 가족 10명의 생계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당시 타이완 여교원의 수입은 다른 교원에 비해 가장 적었지만, 물가지수를 고려했을 때 가족의 생계는 유지할 수 있는 정도였던 것이죠. 심지어 1933년 타이베이제3고등여학교를 졸업해 교편을 맡게 된 천바오위(陳寶玉) 씨는 받은 봉급을 차곡차곡 저축해 교편을 잡은 지 3년 만에 천 엔을 저축, 가족들의 집을 장만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가장 불공평한 대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타이완 여교원은 해당 제도나 대우에 대해 큰 불만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여우 학자는 분석합니다.
타이완 출신 여교원이 일본 출신 여교원이나 같은 타이완 출신 남교원에 비해 처우가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여교원의 수입은 다른 여성 직업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여의사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급여를 받고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당시에는 전문 직업에 종사하는 여성이 상당히 적었던 시대였던 만큼, 일단 교원이란 자격을 취득하면 각별히 소중히 여겼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游鑑明,《日本殖民下的臺灣》,臺北:臺灣商務, 2022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Rti 중앙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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