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를 통해 일본 천황이 아프다거나, 그의 손녀 아이코(愛子)가 일본 왕족과 귀족들만 디닌다는 학교, 가쿠슈인(学習院)에서 괴롭힘을 당했다는 등 일본 황실에 대한 소식을 접할 때가 종종 있죠. 한국에서나 타이완에서나 오늘날의 사람들은 이런 소식을 국제 뉴스 지면에서 접하는 옆나라 이야기로 여기고 말죠.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타이완이 일본의 식민지였던 일제시기때만해도 일본의 황실 가족 소식은 타이완인의 생활에 적지 않은 희로애락을 가져다주는 사회 속에서 꽤나 가까운 존재였습니다.
타이완 땅을 밟은 최초의 일본 왕족은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 친왕(北白川宮能久親王, 이하 요시히사 친왕)입니다. 1895년 청나라가 타이완을 일본에 할양하자 타이완에는 항거 열풍이 거세게 불었고, ‘타이완 민주국’을 결성하여 일본의 수령을 무력 항거하려 하였는데요. 그러자 일본 측은 근위사단을 파견해 타이완을 정벌하기에 나섰습니다. 당시 사단장이자 육군 중장이었던 요시히사 친왕도 타이완을 정벌하기 위해 왔었죠. 그러나 5개월 만에 타이완에서 사망하면서 그의 죽음은 한동안 수수께끼로 남았습니다.
물론, 일본 사람들에게 요시히사 친왕의 죽음은 결코 신비롭거나 미스테리한 수수께끼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5월 말에 일명 ‘산티아고(Santiago)’라고도 불리는 타이완 가장 동쪽, 삼초각(三貂角)에 상륙한 후, 남쪽으로는 자이(嘉義)까지 정벌을 하던 사이 급성 말라리아에 감염된 나머지 고열이 지속되어 결국 10월 말에 타이난에서 병사했는데요. 병사한 직후인 11월 3일은 마침 메이지 천황의 탄신일이었던지라 그의 상을 치룰 수는 없었고, 11월 5일이 되어서야 공식적으로 그의 죽음을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타이완 사람들은 그렇게 단순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죠. 타이완에 처음으로 온 일본 왕족이 타이완에 온지 5개월 만에 죽자, 타이완 도처에서 요시히사 친왕의 여러 사인이 암암리에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병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타이완인 의군의 손에 죽었다고 말이죠. 심지어 여러 지역 별로 요시히사 친왕의 사인에 대한 이야기는 엇갈렸습니다.
그가 죽은 지 30년이 지나서야 태어난 타이완의 유명 작가 중자오정(鍾肇政, 1925-2020)은 그가 초등학생 시절인 1930년대 학교 선생님이 요시히사 친왕은 “탁수계(濁水溪, 타이완에서 가장 킨 하천)를 건너다가 토비(土匪, 타이완 반항군)으로부터 부상을 당했다”고 가르쳤다고 했습니다. 타이난의 유명한 유지 홍예성(洪葉生, 1867년생)도 1895년부터 1901까지 타이완인의 항일 운동을 기록한 그의 책(『영대해망기(瀛台偕亡記)』 )에서 요시히사 친황이 탁수계 남쪽의 윈린(雲林)지역에서 중상을 입었다고 기록하고 있죠.
그런가하면, 탁수계라는 하천을 기준으로 북쪽에 위치한 장화(彰化) 지역에서는 요시히사 친황이 장화 팔괘산(八卦山) 포대의 대포에 맞아 죽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한편, 자이에서는 자객이 길가의 린터우나무에 숨어 빙랑을 캐는 긴 낫으로 요시히사 친왕의 목을 베 죽였다고하는 보다 극적인 사인이 떠돌기도 했습니자. 또 어떤 사람들은 요시히사 친왕의 부인이 두 번이나 신주에서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신주(新竹)야말로 일본 황족의 슬픔의 땅이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요시히사 친왕의 사인이 타이완 각 지역에 남아있는 전설과 같이 항일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지, 아니면 전염병인지 그 사실 여부와는 별개로 이후 타이완 땅을 밟은 일본 황실의 일가들은 확실히 몇몇 타이완 사람들의 항일 감정을 격상시켰습니다.
1923년, 다이쇼 천황이 위독해지자 히로히토 황태자가 섭정하던 시기, 타이완을 순시하러 왔습니다. 빽빽한 타이완 여정 중 한 곳인 타이중(台中)에 들렀는데요.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 타이완의 부총통을 지낸 셰동민(謝東閔) 전 부총통은 당시 15세로 중등과정 2학년 과정을 막 수료했습니다. 그는 회고록 <귀반(歸返)> 당시 히로히토 황태자의 타이중 방문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는데요. “히로히토가 타이완에 오자 타이완인들은 처음으로 다른 민족 황실의 ‘군림(君臨)’이 가진 무거운 압박감과 각종 금지제도의 불합리한…을 느낄 수 있었다”면서 그는 2년 후 자신이 '조국(祖國)'이라고 여긴 중국 대륙 본토로 잠입해 이국 통치의 그늘에서 벗어났다고 기술했습니다.
셰 전 부총통은 또한 황태자의 타이완 방문을 맞아 타이중제1중학교 학생들이 환영행렬을 만들고 공연을 했는데, 이를 “한 달여의 시간을 들여 매일 연습했다”고 말했습니다. 타이중제1중학교를 방문한 황태자는 2층 복도에 높은 곳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운동장의 각 학교의 선생님과 학생들이 큰소리로 일본 국가를 제창하는 것을 지켜보았다고 기억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황태자의 차량 행렬이 지나가는 길가의 상점, 주택은 일제히 문과 창문을 꼭 닫아야했고, 거리의 행인도 모두 피해야 했으며, 전염병을 우려해 “사전에 각 중학교 교사와 학생에게 방역주사를 맞도록 강제했다”는 진술도 했습니다.
한편, 같은 시기 타이베이에서는 히로히토 황태자를 환영하기 위해 무려 25,000명의 제등 행렬을 만들었습니다. 수 만 명의 인파가 질서정연하게 오늘날 총통부 앞, 그리고 런아이루(仁愛路)와 신이루(信義路), 그리고 타이완대학병원 주변 거리 일대를 포위했고, 그들이 부르는 노랫소리가 타이베이 시내를 뒤흔들었습니다. 린헝다오(林衡道) 역사학자는 자신이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 막 되던 시기 일본 황태자 맞이 제등 행렬에 참여했다고 기억합니다. 그는 다이쇼 천황을 대신해 섭정하는 히로히토 황태자의 신분은 천황과 같으니 모두가 등불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2년 후, 히로히토의 동생 치치부노미야(秩父宮)가 타이완으로 여행왔을 때에는 환영 방식이 조금 달랐는데, 이 때에는 종이로 만든 국기를 가지고 타이베이 기차역 부근에 열을 지어 환영할 뿐이었다고 그는 기억합니다.
일본 황실 일가들이 타이완에 오는 것 외에도, 소수의 타이완인들이 일본에 가서 황실과 접촉하기도 했습니다. 1926년 다이쇼 천황이 승하하자, 세 명의 타이완인이 초청을 받았는데, 총독부 평의원 란가오촨(藍高川, 1872-1940)이 그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의 딸 란민(藍敏) 씨는 중앙연구원 근대역사연구소 방문록에서 그녀의 아버지가 도쿄 황궁 연회에 참석하려면 일본 상류층의 예의를 이해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한 일본인 젊은 부인을 아내로 맞아들여, 그 예를 배울 수 있었다고 진술하기도 했습니다. 출발하기 한 달 전에 집안 식구들은 여장을 꾸리기 시작하는데,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그 짐이 “큰 트렁크로 최소 12개에서 15개”나 되었다고 합니다. 란 씨는 자신의 아버지가 교토에서 다이쇼 천황 장례식에 참석하여 상례를 치렀을 때 겪었던 황당한 일을 자주 언급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날은 유독 눈이 그치지 않고 펑펑 쏟아져 한 정거장에 네, 다섯 시간씩 기다려야 했는데, 오줌이 너무 마려운 나머지 심지어는 걷지도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고요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은 타이완 사람들이 기억하는 일본 황실의 이야기에 일종의 환상도 있고, 불합리도 있으며, 한가로운 여행도, 전쟁과 정치라는 다소 무거운 주제도 있습니다. 어린 나이의 한 타이완 소녀는 당시 일본 황실의 사진을 보고는 황실 가족의 아이들이 참 예쁘다라고 기억하기도 합니다. 그 기억은 당시 자신이 서있는 사회적 위치와 처신에 따라 각기 다릅니다. 그리고 여러 기억의 편린들은 오늘날 타이완의 일제시기를 이해하는 다양한 렌즈를 제공합니다.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Rti 중앙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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