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살아가고 있는 우리. 한 번이라도 다른 삶을 살아볼 수 있을까요? 반복되는 삶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문학입니다. <포르모사 문학관>에서 타이완 특유의 문학 세계 속으로 함께 들어갑시다.
안녕하세요! 저는 <포르모사 문학관> 시즌2의 진행자 안우산입니다.
어제 5월 19일은 타이완 ‘백색테러 기억의 날(白色恐怖記憶日)’이었습니다. 1949년 5월 19일 발령, 다음날인 5월 20일 0시에 시행된 계엄령, 그리고 이에 따른 타이완 가장 어두었던 백색테러 시대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백색테러는 일반적으로 죄익세력이 주동하는 ‘적색테러(Red Terror)’와 구분한 우익세력이 벌이는 테러를 가리킵니다. 역사적으로는 1795년 프랑스 혁명 기간에 혁명파에 대한 왕당파의 보복에서 비롯되었는데, 당시 프랑스 왕가의 상징색은 백합의 백색이었습니다. 타이완에서는 일본 식민지 시대 반정부인사들이 일본 정부의 강압적 통치를 칭하는 데 처음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계엄령은 국가가 전쟁, 쿠데타, 폭동 등 비상 사태에 처해 있을 때 군사령관이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을 행사하는 일시적인 조치로 규정하고 있으나, 당시 독재 정권이 권력을 유지하고 반대세력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악용되었습니다. 1947년 타이완 전역에서 일어난 민중봉기인 2.28사건에 이어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국민당은 대륙수복을 준비하고 중국공산당의 침투를 막기 위해 타이완에 또 한 차례의 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국민의 기본권이 약 40년 동안 국가폭력에 의해 유린당했으며, 수많은 타이완 지식인들이 학살되면서 심각한 인재 단층과 사회 전반의 정치적 무관심을 초래했습니다.
백색테러 기억의 날이 지난 4월 18일 정식으로 제정되기 전에 국가폭력, 민주화, 자유에 관한 기념일은 2월 28일 ‘평화기념일(和平紀念日)’, 1989년 분신자살한 타이완독립 운동가 정난룽(鄭南榕)을 기념하는 4월 7일 ‘언론의 자유의 날(言論自由日)’, 그리고 계엄령을 해제하는 7월 15일 ‘해엄기념일(解嚴紀念日)’만 있었고, 백색테러를 위한 기념일은 없었습니다. 타이완인에게 큰 아픔으로 남아 있는 백색테러를 기리기 위해 500여 명의 피해자, 피해자 유가족, 사회단체, 학자와 전문가가 지난 3월 11일 정치범 교도소였던 징메이인권단지(景美人權園區)에서 ‘백색테러 기억의 날 발의대회’를 열었습니다. 5월 19일을 선택한 이유는 계엄령 선포일 뿐만 아니라 1986년 5년 19일 계엄령 해제를 호소한 ‘5.19녹색행동’, 그리고 1989년 5월 19일 정난룽 장례식에서 분신자살한 사회운동가 잔이화(詹益樺)를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에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은 지난 3월 21일 백색테러 기억의 날 준비위원회를 접견한 자리에서 관련 기념일의 제정을 긍정하며 행정부에 후속조치를 당부했습니다.
첫 백색테러 기억의 날을 맞아 국가인권박물관, 신타이완평화기금회, 타이완계엄시기 정치피해자배려협회가 공동 주최한 5.19 기념행사가 지난 4월 26일 시작했습니다. 행사 포스터를 보면, 지난해 타이완문학상 금전장(金典獎)의 대상 수상작 천례(陳列, 본명 陳瑞麟 천뤠이린)의 에세이집 《잔해서(殘骸書)》를 바탕으로 디자인된 로고를 볼 수 있는데, 잔해처럼 부서진 숫자 519는 피해자들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두려움을 상징합니다. 백색테러에 관한 영화 방영부터 정치범을 수감했던 뤼다오(綠島 녹도) 교도소에서 펼쳐진 음악회까지 슬픈 역사와 아픈 기억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보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5.19 백색테러 기억의 날 기념행사 포스터 - 사진: 국가인권박물관
올해 행사에서 방영된 단편 영화 《K의 방(K的房間-關於世界的創造與毀滅)》은 실험적인 서사를 통해 타이완에서 가장 잘 팔리는 영어 문법책 《뉴 잉글리쉬 그래머(新英文法》의 저자 커치화(柯旗化)의 이야기를 다뤘습니다. 이 책은 지난 50년 동안 200만 부 이상 팔린 타이완 최고의 영문법 교과서로, “영어를 잘 배우려면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면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학생들의 필독서였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켰던 이 책과 달리 커치화는 두 번이나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1929년 가오슝에서 태어났고 어릴 적부터 부지런히 공부해 당시 일본인이 대부분이었던 가오슝제일중학교(현 가오슝제일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18살 때 2.28사건으로 인한 가오슝 3.6대학살을 목격해 정부에 대한 불신이 생겼는데요. 당시 타이베이의 봉기 소식이 가오슝에 전해지자 가오슝제일중학교를 비롯한 학교들이 3월 4일 자위대를 결성해 치안 유지에 나섰습니다. 펑멍치(彭孟緝) 가오슝 사령관이 같은 날 무력 진압을 결정했지만 출병 준비를 위해 협상을 핑계로 시간을 끌었습니다. 이틀 후인 3월 6일, 시민대표들이 회의실에 들어가자마자 체포되었고 가오슝 시내를 향한 대학살도 시작되었습니다. 군대는 집집마다 수색하며 무차별한 학살을 자행했고, 민가의 여자들까지 강탈했습니다. 3.6대학살로 수많은 무고한 시민들이 사망했기 때문에 가오슝은 2.28사건에서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은 지역의 하나로 꼽힙니다. 커치화는 학교 졸업 후 가오슝의 여러 학교에서 영어교사를 했고 미군의 통역관도 맡았습니다.
커치화의 첫 감방 생활은 중학교 때 동창과 함께 정부를 비판하는 대화에서 기인했습니다. 교도소에서 1년 반 동안 수감되었가다 1953년 석방되었고, 출소 후 가오슝 제일출판사를 설립해 영어 교과서를 출판하는 동시에 반정부인사의 저작을 몰래 출판했습니다. 앞에 언급한 인기작 《뉴 잉글리쉬 그래머》는 1960년 출판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이듬해 커치화는 과거 가르쳤던 학생의 사건에 말려들어 반란죄로 다시 체포되었습니다. 이번 형기는 1년이 아닌 15년이었습니다.
치화라는 이름은 부모의 고향인 치산(旗山)과 산화(善化)의 첫 글자를 따서 지어진 것인데요. 아름다운 의미가 담겨져 있지만 한 심문관이 그의 이름을 국기를 바꾸겠다는 뜻으로 해석해 반란 사실을 단언했습니다. 심한 구타와 심문을 견디고 12년의 형기를 마쳐 감옥에 나갔을 때 정부는 뜬금없이 3년의 형기를 추가했습니다. 심지어 1976년 출소 후에도 정부 요원들에게 미행당했고 백색테러에서 영영 자유로워질 수 없었습니다.
감옥에서 긴 세월을 보낸 뒤 사회 분위기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1979년 가오슝에서 발생한 메이리다오(美麗島)사건을 비롯한 민주화 운동이 커치화를 거리로 나서게 했습니다. 그는 타이완의 민주화, 228사건의 진상규명에 투신하면서 타이완 본토문화를 담은 서적을 대거 출판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문학 창작을 통해 타이완에 대한 사랑을 다루며 시, 소설 등 작품을 출판했고, 1992년 감방생활을 기록한 회고록 《타이완 감옥섬(台灣監獄島)》을 완성했습니다. 그는 시집 《향토의 부름(鄉土的呼喚)》의 서문에서 “혼탁한 시대에 우리가 양심과 정의감을 갖고 있다면 수수방관해서는 안 된다”며 “나는 시인이 되어 고통받는 동포들을 위해 말하고, 시대의 목소리를 쓰기로 한다”고 작성했습니다. 민주와 자유에 대한 추구는 높은 자리로 오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평생의 신앙입니다. 커치화는 지난 2002년 별세했지만 그의 정신과 거작은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엔딩곡으로 정치범이 출소 후 귀향길에 느끼는 모순의 감정을 담은 노래 우바이(伍佰)의 ‘고향으로 돌아가다(返去故鄉)’를 띄워드리며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포르모사 문학관>과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으로 RTI 한국어 방송의 안우산이었습니다.
▲참고자료:
1. 〈519白色恐怖記憶日〉,台灣獨立建國聯盟。
2. 「519白色恐怖記憶日 國家人權博物館將舉辦系列活動 以多元形式傳遞歷史記憶 深化人權理念」,國家人權博物館。
3. 「接見『519白色恐怖記憶日』籌備委員會 總統:讓下一代銘記威權統治這段歷史 繼續傳承民主前輩奮鬥精神」,總統府。
4. 〈柯旗化的一生〉,南國故鄉。



Rti 중앙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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