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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솟은 굴뚝, 일제시기 설립된 타이완 설탕공장

  • 2024.04.09
대만주간신보
1900년 12월 설립된 ‘타이완 제당 주식회사(臺灣製糖株式會社)'의 모습. 높이 솟은 긴 굴뚝은 일제시기 타이완의 산업과 공업을 상징한다. - 사진: 국가도서관 타이완기억(臺灣記憶)

규모 7.2의 화롄 4.3 지진으로 9일 현재까지 총 13명이 사망하고 1146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강한 지진 규모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사상자가 적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이번 지진인데요. 아직까지도 연락이 닿지 않는 사람이 6명 있어 중앙재난대응센터에서는 이들을 수색하기 위해 지금도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인명 피해는 적었지만, 이번 지진으로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뜻밖의 사고가 있어 눈길을 끕니다. 바로 타이완 중남부 윈린현에 소재한 후웨이 설탕공장(虎尾糖廠)의 굴뚝이 무너진 것입니다.  

지진이 발생한 4월 3일 오전, 가동은 되지 않지만 100년 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떤 후웨이 설탕공장의 기다란 굴뚝이 끊어졌습니다. 높이 45미터, 지름 5미터의 굴뚝 상단 1/3이 끊어져 옆 작업장으로 떨어졌고, 마침 출근하고 있던 직원이 이를 목격해 굴뚝이 절단된 순간을 영상으로 촬영했습니다. 후웨이 설탕공장 공장장은 부러진 굴뚝이 약 45미터 정도 떨어지는 과정에서 다행히 상주하거나 접근하는 직원이 없어 인명피해 없이 공장 건물만 파손되었다고 전했습니다.    

이번 화롄 4.3 지진으로 단절된 이 굴뚝은 윈린현 설탕공장의 랜드마크이자, 일제시기 초기인 1908년 가동을 시작한 이래 무려 제2차 세계대전의 폭격마저 피한 바 있는 소위 불굴의 건축물이었는데, 이번 화롄 4.3 강진은 견디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대만주간신보 시간에는 이번 강진으로 굴뚝이 손상된 후웨이 설탕공장을 비롯해 1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타이완의 설탕공장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 갖도록 하겠습니다. 

후웨이 설탕공장의 굴뚝처럼 타이완에서는 약 40~50미터 길이에 달하는 높은 굴뚝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2월 27일자 방송에서 소개해드린 과거 주조공장이었던 타이베이 화산에도 50미터 높이의 기다란 굴뚝이 있습니다. (2024.02.27 타이베이 화산이 과거 양조장이었다고?!) 일제시기였던 1931년 일본 총독부의 전매국이 타이베이 양조장 옆에 보일러를 설치하면서 이 굴뚝을 건설했는데요. 높이 50미터에 달하는 굴뚝의 길이는 당시 총독부 건물에 버금가는 높이여서 타이베이의 산업과 공업을 상징하는 일종의 진보적 랜드마크가 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화산뿐만 아닙니다. 일제시기 담배제조공장이었던 현재 송산문화창의원구에도 36미터 높이의 기다란 굴뚝이 있습니다. 역시 공장 옆 보일러실 굴뚝으로 당시 타이베이의 산업화를 상징했습니다. 

굴뚝이 있는 곳에는 공장이 있고, 공장은 일제시기 타이완의 새로운 산업의 상징이었습니다. 특히 절정기에는 국가 외화의 70%까지 벌어들인 적이 있는 설탕공장은 일제시기 신식 설탕 산업의 발전과 뗄레야 뗄 수 없습니다. 사탕수수 재배가 불가한 일본의 지리적 환경과 달리 타이완에서는 17세기부터 사탕수수을 경작해 사탕수수 즙을 압착해 설탕을 생산하기 시작했었죠. 마침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이어 주요 해양 세력으로 떠오른 네덜란드가 명나라와 일본과 무역하기 위해 동아시아로 왔고, 네덜란드가 1624년 타이완을 점령하자 타이완의 사탕수수 재배에 관심을 기울이며 개발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네덜란드인들은 타이완의 사탕수수 생산을 적극 장려하기 위해 중국으로부터 1만 여 명의 노동력을 데려왔으며, 중국와 인도네시아에서 물소와 황소를 가져와 밭을 갈고 화물을 싣는 용도로 사용했습니다. 이렇게 생산된 사탕수수는 유럽은 물론 가까운 일본에도 판매하며 네덜란드의 주요 대일 무역 상품 중 하나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네덜란드 식민 시기 기초적인 산업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타이완의 사탕수수 사업은 이후 정성공 시대에도 계속 이어졌고, 청나라 때가 되자 타이완의 사탕수수 생산량은 최고조에 달하게 됩니다. 19세기 중반 톈진조약과 베이징 조약으로 타이완의 주요 항구, 안핑과 단수이항을 통상항으로 개방하게 되면서 외국인들이 타이완에 와 무역을 할 수 있었는데, 통상 개방 후 설탕은 타이완 수출의 주요 상품으로 등극했던 것이죠. 통계에 따르면 1880년 타이완의 설탕 생산량은 72,849톤, 수출량은 64,240톤으로 생산과 수출량 모두 최고치를 기록했습니다. 

청일전쟁 후 일본에 양도된 이후 타이완의 설탕 산업은 다시 한 번 도약의 변화를 맞이합니다. 

앞서 네덜란드 식민 시기 때 잠깐 언급한 바 있듯이, 일본이 타이완 섬을 점령하기 훨씬 이전부터 타이완의 해상상인이나 밀수를 전문으로 하던 집단은 타이완 섬에서 명나라가 네덜란드와 거래를 했는데요. 설탕은 주요 거래품 중 하나였습니다. 그만큼 이미 몇 백 년 전부터 타이완의 설탕은 일본인들이 자주 찾는 것이었기 때문에 일본이 타이완을 통치하게 되자 타이완의 설탕 산업을 중요한 발전 산업의 하나로 여겼을 수 있습니다. 

타이완 제4대 총독으로 1898년 취임한 고다마 겐타로(兒玉源太郎, 1852~1906)는 일본에서의 재정적 지원이 넉넉치 않은 상태에서 타이완을 재정적으로 독립된 식민지로 만들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었습니다. 이때 타이완의 설탕 산업을 타이완을 재정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방안으로 강구해냅니다. 고다마 겐타로 총독은 당시 민정장관 고토 신페이(後藤新平, 1857-1929), 그리고 니토베 이나조(新渡戶稻造, 1862-1933)라는 교육자이자 농업학자와 함께 타이완의 제당업을 발전시키기로 합니다. 

고토 신페이 민정장관의 의뢰를 받은 당시 일본 최대 기업, 미쓰이 물산은 타이완에 조사단을 파견해 제당 투가를 검토했으나, 타이완에서 제당업을 발전시키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결국 타이완 총독부는 미쓰이 물산에게 고액의 보조금을 투자하기로 제안했고, 이 제안을 받아들인 미쓰이 물산은 95명의 주주로부터 자본금 100만 엔을 모아 1900년 12월 ‘타이완 제당 주식회사(臺灣製糖株式會社)‘를 설립합니다.     

미쓰이 물산이 제당회사를 창설할 때 타이완 총독부는 1만 2천엔, 이듬해에는 무려 5만 6천엔에 가까운 보조금을 지급했습니다. 총독부가 얼마나 제당산업을 간절히 원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인데요. 보조금과 주주로부터 받은 자본금을 기반으로 미쓰이 물산은 타이완 최초 신식 기계 제당 공당을 타이난에 짓고 1902년 본격적으로 생산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무렵 미국과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니토베 이나조가 삿포로농학교 교수직을 그만두고 39세에 타이완 총독부의 기술자로 부임하면서 타이완 제당 산업은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축적된 농업의 힘과 상공업의 도약이 함께 협력해야 경제가 발전하고 국가에 이상적이고 장기적인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農業本論, 1898))고 믿은 니토베 씨는 타이완 설탕 산업에서도 이를 실천하고자 했습니다. 부임 후 반 년 간 타이완 섬 전체를 시찰하며 니토베 씨는 타이완 설탕에 대한 확신을 가졌고, 대신 설탕을 생산하는 사탕수수의 품종을 개량해 수확량을 늘려 일년 내내 설탕 공장이 가동할 수 있도록 하는 안을 내놓았습니다. 그렇게 1902년 5만 5천 톤이었던 설탕 생산량은 20여년 뒤인 1925년 무려 48만 톤에 달해 약 8배 증가했고, 1930년대 중반부터는 연간 생산량이 100만톤을 넘어서며 타이완의 설탕 산업은 번영기에 접어들 수 있었습니다. 

일본의 패망 후 타이완 전국에 설립된 4곳의 제당회사를 중화민국 국민당 정부가 수용, 합병하면서 1946년 ‘타이완제당회사’를 새로 설립했고, 1950-60년대 설탕 수출량이 꾸준히 증가해 이 무렵 제당회사는 타이완의 주요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프로그램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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