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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베이 화산이 과거 양조장이었다고?!

  • 2024.02.27
대만주간신보
1937년(쇼와 12) 5월 7일자 타이완일일신보에 실린 일본방양주식회사의 맥주 광고. - 사진: 타이완일일신보

주말 나들이 장소로 대표적인 타이베이의 화산(華山). 타이베이 시내 중심의 대표적인 도로인 신성베이루(新生北路)와 중샤오푸싱(忠孝復興)이 교차하고 바더루(八德路)가 시작되는 자리에 위치한 화산에는 높고 화려한 빌딩 사이로 푸르른 잔디밭이 펼쳐져 있고, 여기에 맛있는 음식점과 카페, 맥주집과 영화관에 전시장, 그리고 공연장까지 있어 타이베이의 야외 문화복합공간으로서 톡톡하게 역할을 하고 있는 장소입니다. 1년에 무려 1,000여 개가 넘는 전시, 공연이 열린다고 하니 정말 아무 날이나 잡고 가도 볼거리가 넘치는 곳이죠. 화산의 정식 명칭은 ‘화산 1914 문화창의산업원구(華山1914文化創意產業園區)’. 화산 뒤에 붙은 1914라는 숫자에 관심이 갑니다. 왠지 연도를 나타내는 듯한 1914. 이 숫자의 의미는 무엇이고, 지금의 화산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인 1914년. 타이베이 화산은 굴뚝에서 연기가 펄펄나는 양조장이었습니다.  

타이완은 따뜻한 기후에 농산물이 풍부해서 예로부터 술을 마시는 문화가 성행했다고 알려져있는데요. 그래서 집에서 술을 빚는 것은 농사를 짓는 농가들의 흔한 부업이었습니다. 가정 외에도 타이완 전역에는 수천 개의 작은 주조장이 있었는데, 대부분은 재래식 가정 공장 형태였습니다. 일제시기에 들어서자 타이완으로 건너 온 일본인들은 주류세를 징수하기 위해 주류업을 정비하면서 기존에 있던 지방의 소규모 양조장을 잇달아 전환, 합병시키는 작업에 들어갔죠.  

일본의 타이완 통치가 어느정도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한 1910년대, 고토 신페이 민정장관 이하 타이완의 일본 정부는 ‘내지연장주의', 즉 내지인 일본의 체제를 식민지인 타이완으로 연장한다는 것을 기조로 일본의 산업을 타이완으로 복제하는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흐름을 읽고 있던 한 일본 청년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타이베이에서 사업을 시작합니다. 바로 아베 미츠오(阿部三男)입니다. 아베는 타이완으로 건너 가 타이완 총독부에 주류 제조 허가증을 신청하고, 양조 가문 출신의 퇴직 관료로 일본 정부를 대신해 타이완에서 술 제조세 관련 일을 추진하고 있었던 후지모토 테츠지(藤本鐵治)씨를 찾아갑니다. 그리고는 1913년 타이베이에 ‘방양합명회사(芳釀合名會社)’라는 양조장을 설립하죠.    

이 양조장은 ‘호접란(胡蝶蘭)'이라는 최초의 타이완산 일본 사케를 만들었을뿐만 아니라 지금의 화산1914 문화창의산업원구의 원형인 양조장의 출발이기도 합니다. 

일본에서도 추운 겨울인 11월부터 4월까지만 양조한다는 사케를 덥고 습한 아열대 기후인 타이완에서 생산하는 것은 기후적으로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쌀로 만든 미주나 고구마주, 샤오싱주 등을 빚어 마시던 타이완 사람들과 달리 맥주나 청주 등을 즐겨 마시는 일본인들의 수요가 점차 증가하자, 타이완 내에서도 일본에서 수입하는 대신 일본 술을 직접 만드는 양조장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일본 정부는 세금을 늘리기 위해 타이완에서 일본 술을 제조, 생산하는 것을 적극 권장했고, 1905년 말이 되자 주조세에 관한 기초적인 법안을 마련하기 시작합니다. 민간 양조업자들을 대상으로 주조세를 징수해야 하다보니 기존의 소규모 단위의 가정식 양조장은 점차 대규모 양조장으로 대체되면서, 수백 년 간 이어져오던 타이완의 전통적인 주조 문화의 생태계가 급변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앞서 소개한 아베 미츠오(阿部三男)와 후지모토 테츠지(藤本鐵治)는 바로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대규모 양조 공장을 건설하기 시작하고, 당시 타이완에는 없었던 냉각 장비를 일본에서 직접 운반했습니다. 그렇게 덥고 습한 타이완 기후를 극복해 타이완 최초의 일본 청주인 ‘호접란'을 양조하는 데 성공하죠. 여기에 모주(母酒)를 짜내고 남은 찌꺼기인 주박(酒粕)과 소주 증류도 겸했습니다. 

이렇게 타이완의 첫 일본 사케인 호접란이 성공하자 새로운 자본 투자 유치가 이루어졌습니다. 일본인 자본가인 아베 고노스케(安部幸之助)가 무려 130만 엔을 투자했고, 자신을 제1대 사장으로 한 ‘일본방양주식회사(日本芳釀株式會社)’를 설립했습니다. 기존의 ‘방양사'가 주식회사로 확대된 것이죠.

충분한 자금과 최첨단 장비로 이곳은 곧 타이완에서 가장 큰 양조장이 되었습니다. 개편 후 2개월 뒤에는 중국 푸젠성립갑종농업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타이완을 방문해 특별히 양조장을 견학 올만큼 ‘일본방양주식회사'는 타이완 총독부의 신임을 얻으며 식민지 치적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장소 중 하나가 되었죠.

그러나 이윤을 너무 추구했던 나머지, 타이완 최초 일본 사케 ‘호접란'에 점점 첨가물을 넣어 원가를 낮춰 생산하면서 사케의 품질은 떨어지기 시작했고, 과거 잘나가던 그 향기로운 술의 맛을 잃자 회사는 결국 제조 공장 가동을 중단하고 현장에 남아 있는 재고품을 정리해 판매하는 처지에 이르렀습니다. 한때 타이완 제일이었던 '일본방양주식회사'는 1920년대에 들어서자 사케 생산에 있어서는 거의 파산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죠. 

비록 향기로운 사케 양조는 시들해졌지만, 그럼에도 ‘일본방양주식회사' 규모는 날로 확대되었습니다. 1918년에는 같은 자리에 타이완산 장뇌를 가공 생산하는 공장을 추가 설립하고, 1919년에는 맥주주식회사까지 설립해 공장 한켠에서는 맥주를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장뇌, 맥주, 공업학교 등이 잇달아 이곳에 설립되면서 많은 일자리를 창출하였고, 군중, 화물, 상품 등이 끊임없이 흐르며 상업이 왕성하게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작은 사케 제조 공장에서 확대된 일본방양주식회사는 직원 수가 400여 명에 달하기에 이릅니다.  

호접란이란 사케를 비롯해 1910년대 백화제방이었던 주류 산업은 1922년(다이쇼 11년) 일본 정부가 주류 제조 및 판매를 독점, 국유화하여 정부 정책에 따라 전환되어야 했습니다. 즉 모든 주류의 제조와 판매는 모두 총독부 전매국이 책임진다는 정책이죠. 그런데 맥주는 ‘주류 전매령'에서 일시적으로 제외가 됩니다. 1919년 이미 맥주제조공장을 차린 아베는 1923년 체코의 맥아와 홉을 수입해 타이완에서 생산하는 맥주의 풍미를 조절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점차 일본에서 수입해온 맥주와 타이완에서 생산한 맥주 사이의 질과 가격 차이가 좁혀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1923년 9월 간토 대지진으로 일본 맥주의 타이완 수출량마저 감소하자 이때부터 타이완산 맥주는 타이완 시장에서 주류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타이베이 시민들의 문화공간인 화산에 타이완의 최초 일본 사케와 맥주를 제조한 양조장의 역사가 있었다니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프로그램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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