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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의 크리스마스는 언제부터 시작했을까?

  • 2023.07.18
대만주간신보
다이쇼 10년인 1921년 12월 26일자 '대만일일신보(臺灣日日新報)'에 실린 철도호텔과 타이베이 정수여학교의 크리스마스 풍경

타이완에서 크리스마스는 한국과 같이 공휴일은 아닙니다만,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 각종 학교 입구에는 예수가 말구유에서 태어난 모형을 배치하고, 음악 교실에는 크리스마스 조화를 문앞에 걸어 둡니다. 크리스마스 전날이면 수많은 타이완의 정치인들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로 변장해 시민들과 함께 기뻐하는 것도 뉴스에서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크리스마스는 언제 처음 타이완에 들어왔고, 일제시기와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서양의 기독교 축일 중 하나인 크리스마스(聖誕節)는 당연히 종교의 역사를 통해 가장 먼저 타이완에 전해졌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일제시기 전 19세기 중반에 타이완에 온 천주교, 개신교 선교사들은 외려 크리스마스를 주요 축일로 지내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1858년 청나라가 톈진조약으로 타이완의 안핑(安平)·단수이(淡水)·지룽(基隆)·가오슝(打狗)를 조약항으로 개방하자, 스페인 가톨릭 도미니코회가 타이완에 상륙해 선교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수많은 신부가 남긴 서신을 보면 가톨릭의 주요 축일은 부활절, 예수승천절, 장미성모기념일, 그리스도 성체일로 성탄절인 크리스마스는 오늘날처럼 중요한 축일은 아니었던 것으로 확인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64년 타이완에 처음 와 일명 ‘량신부'라고도 불린 량방지(良方濟, Fr. Francisco Herce, OP,?~894年) 스페인 신부가 1866년 7월에 보낸 편지에 따르면  1865년에 크리스마스의 개념이 이미 타이완에 상륙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량신부는 "지난 크리스마스에 커자(客家) 사람들이 우리를 죽이려 했던 일을 이미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들은 우리가 만금장(萬金莊)*에 온 것이 광산을 빼앗고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서라고 악독한 소문을 퍼뜨렸다"고 말했다.

*만금장(萬金莊)은 가오슝에서 동쪽으로 약 48km 떨어진 작은 마을로, 타이완 원주민 중 마카타오(Makatao)의 원향이자, 커자인, 민난인과 산간지역의 원주민, 파이완족(排灣族)이 교역하는 교역의 중심지이자, 1860~1870년대 천주교 도미니코회가 타이완 선교에 나선 가장 중요한 거점 중 하나였음.

한편, 개신교의 경우 초기 타이완 선교활동 역사에 성탄절 기록이 거의 없습니다. 영국 장로교회의 첫 선교사였던 맥스웰(James Laidlaw Maxwell, 馬雅各, 1836-1921) 의사는 1865년 가오슝에 도착해 타이완 남부의 선교 판도를 개척했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6, 7년 후, 타이완 북부에는 유명한 캐나다 장로교회의 해외 선교사, 맥케이(George Leslie Mackay, 馬偕, 1844-1901)가 타이완에 정착했는데,  맥케이는 크리스마스를 지내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궈허리에(郭和烈)의 저서 『맥케이목사전(偕叡理牧師傳)』에 따르면 맥케이는 수업 중 타이완 학생들에게 성경에 크리스마스를 지키는 일은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을 아는 사람도 없다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유태인이 양떼를 광야로 데려온 시간은 4~10월이었고, 양치기들은 11월이면 집에 돌아갔기 때문에 천사들이 12월에 양치기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 것입니다. 따라서 맥케이가 1901년 6월에 사망하기 전까지 타이완의 북부교회는 12월 25일에 크리스마스를 경축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맥케이목사전>에 따르면 맥케이가 "크리스마스를 부정한다기 보다는 크리스마스가 세속화되기 쉽다는 것을 알고 있다”며, “그는 수난절이나 부활절이나 승천절을 반대해 본 적은 없는데, 이러한 명절들은 비교적 세속화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맥케이가 우려했던 '세속화'가 어떤 것인지 다른 기록을 보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같은 시기 타이베이의 영국 상인 존 토드(John Dodd)가 쓴 <베이타이 봉쇄기(北台封鎖記)>에 따르면 1884년부터 1885년까지 청불전쟁 기간에, 프랑스 극동 함대가 타이완 북부를 공격하여 봉쇄하였는데, 물자 보급이 타이완에 들어올 수 없었던 당시 타이베이에 거주한 유럽인들은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보낼 방법이 없다고 걱정했다고 합니다. 크리스마스 전날 밤 토드는 "명절이 다가오니 붉은 커런트, 건포도, 향연, 아몬드 열매의 맛을 보고 싶어 죽을 지경이다”라고, 25일에는 "봉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크리스마스를 즐겼다. 거대한 쇠고기, 럭셔리한 칠면조, 통통한 닭고기, 수제 푸딩, 구운 케이크, 파이 등 맛있는 음식이 식탁에 가득하다. 모두들 술을 많이 마셨으니 내일은 두통이 있을 것이다" 등 크리스마스 기념 파티에 관한 글을 남긴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즐기는 것 위주의 크리스마스가 선교사 맥케이에게 있어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던 셈입니다. 

한편, 일본 사회가 크리스마스를 처음 보낸 해는 1875년으로 알려져있습니다. 도쿄 긴자에 있는 한 여학교에서 크리스마스 축하 행사를 열고 학교에 크리스마스 트리와 산타클로스를 배치했는데요. 그로부터 20년 후인 1895년, 일장기가 날리는 땅이 되버린 타이완에서, 크리스마스는 앞서 소개한 선교사들과 달리 점차 비종교적인 경로를 통해 식민지 타이완 사회에 진입하기 시작했습니다. 

1901년 12월 24일  <대만일일신보>의 한 보도에 따르면 단수이에 소재한 각국의 세관이 크리스마스 당일엔 휴업을 하는 데 크리스마스 전날인 오늘도 대청소를 하는 관계로 휴업을 한다는 소식을 알렸고, 같은 해 12월 27일자 보도에서는 타이베이 시먼에 소재한 타이베이일본기독교회에서 25일 오후 6시 30분에 크리스마스 축하회를 개최했다고 소개합니다. 타이베이일본기독교회는 1896년 11월 일본인 전도국장 오오기미 모토이치로오(大儀見元一郎, 1845-1941)가 타이완에 처음 건너와 설립한 교회로, 이후 리춘청(李春成)의 헌금과 토지 기부로 보다 넓은 일본인교회를 설립할 수 있었습니다. 1916년 준공된 교회 건물은 현재까지도 남아있어 여전히 타이완 장로교 교인들을 위한 예배 장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일제시기 리춘청(李春成)의 헌금과 토지 기부로 1916년 타이베이에 준공된 '타이베이일본기독교회'는 현재 같은 자리에서 '타이완기독장로교 지난교회(台灣基督長老教會濟南教會)'로 이어가고 있다. - 사진: 지난교회(濟南教會) 홈페이지

다이쇼에서 쇼와 초기인 1912부터 1930년경 초까지, 식민지 타이완 사회에는 비교적 자유로운 사상들이 왕성하게 유통되며 문화의 황금시대가 펼져졌고, 이에 따라 서양 문물도 활발하게 전래되었습니다. 당시 주요 신문인 <대만일일신보>를 보면 이 시기에 크리스마스에 대한 많은 뉴스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요. 타이베이의 두 일본인 기독교 교회인 '일본조합기독교회(日本組合基督教會)'와 '일본성공회(日本聖公會)'가 '강탄제(降誕祭)'를 열고 천주교 정수여학교(靜修女學校)는 '크리스마스 축하회(クリスマス 祝賀會)'를 열었고, 종교 자체 예식에서 성가를 부르고 설교를 하는 것 외에도 악기 연주나 동화극과 같은 공연이 펼쳐졌습니다. 

신문에서도 크리스마스의 유래나 어린아이들이 선물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크리스마스를 좋아한다는 등의 내용을 소개했습니다. 산타클로스가 선물을 들고 비행기에서 착륙하려는 사진 한 장이 "오늘은 크리스마스(クリスマス )"라는 제목과 함께 신문에 실려있습니다. 쇼와 시대의 뉴스 사진에 ‘MERRY X'MAS’라는 크리스마스 영어 단어가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제국재향군인회 타이완연합지부, 즉 일본의 타이완군 사령부에서 편찬한 <헌금미담(献金美譚)>에는 1934년 ‘타이완기독청년회' 대표 리톈청(李天成)이 "지난해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국방헌금을 기부했다고 보고한 내용이 적혀있다. '크리스마스'라는 용어가 공식 문서에서도 자연스럽게 쓰일 정도로 크리스마스는 일반인의 개념 속에 깊숙이 자리 잡기 시작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행사는 전쟁 후 타이완이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 중화민국이 되어서는 보다 보편화되었습니다. 개신교 신자였던 장제스(蔣介石) 전 중화민국 총통과 송메이링(宋美齡) 부부는 크리스마스 활동에 열중했는데, 전 총통부 부시위장 천종추이(陳宗璀)의 회고록 <사림관저 30년(士林官邸三十年)>에 따르면 총통 내외가 거주한 사림관저는 크리스마스를 매우 중시해 송메이링은 12월 중순부터 크리스마스 선물을 포장하느라 바빴다고 한다. 관저는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트리를 배치하기 시작했고,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크리스마스 노래가 흘러나오며 가족 잔치가 있어 매우 떠들썩했다고 회고 했습니다.

 

참고문헌

陳柔縉. 臺灣西方文明初體驗 / 陳柔縉作. 二版. 臺北市: 麥田, 2011.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프로그램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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