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완 곳곳에 랜드마크를 찾아 현지인만 아는 이야기를 알려드리는 <랜드마크 원정대> 시간입니다. 이제부터 가이드북을 버리세요! <랜드마크 원정대>를 따라 타이완 여행을 즐깁시다!
안녕하세요! 저는 <랜드마크 원정대> 진행자 안우산입니다.
지난주 지룽 정빈어항을 소개해 드렸는데 오늘은 정빈어항 맞은편에 있는 허핑(和平)섬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타이완 첫 번째 바다를 건너는 다리 ‘허핑다리’로 지룽과 연결되어 있는 허핑섬은 타이완 북부 지역 중 서양인이 최초 도착한 곳이자 중국에서 온 한족(漢族)이 지룽에서 최초 발자취를 남긴 곳입니다. 중요한 군사적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에 네덜란드인과 스페인인부터 중화민국 해군까지 여러 정권의 군대 주둔지로 쓰였습니다. 현재는 아름다운 해안 풍경과 해수를 끌어오는 천연 수영장으로 유명합니다.
관광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허핑섬은 타이완 역사를 배우는 데 아주 적합한 야외교실인데요. 16세기 한족이 오기 전에 타이완 원주민 바싸이족(巴賽族)이 이미 허핑섬에 정착했으며 이 섬을 ‘tuman’이라고 불리고 그 뜻은 ‘무녀의 섬’입니다. 특이한 기암괴석이 늘어서는 허핑섬은 마치 무녀가 만든 섬이기 때문입니다. 정빈어항 근처에 ‘tuman’이라는 카페가 있는데 가게 이름은 바로 과거 허핑섬의 명칭에서 유래합니다.
16세기 한족이 타이완으로 이주하기 시작한 후 허핑섬은 원주민 취락을 지칭하는 ‘서랴오(社寮)섬’으로 개칭되었습니다. 1626년 스페인인이 타이완 북부를 점령해 허핑섬에서 산 살바도르(Fort San Salvador) 요새를 구축했습니다. 해당 요새는 일치시기 때 군항의 증축과 2차 세계 대전 때 연합국의 폭격으로 인해 이미 없어졌고 고고 작업을 통해 많은 유물이 발견된 상태입니다.
한족, 서양인 외에 오키나와에서 온 류큐인(琉球人)도 허핑섬에 머무른 바가 있습니다. 류큐란 오키나와의 옛 명칭이자 왕국이름입니다. 허핑섬의 지도를 보면 ‘류큐 어민 위령비(琉球漁民慰靈碑)’가 있는데요. 이번주 <포르모사 문학관>에서 설명해 드렸다시피 타이완과 오키나와는 타이완인조차 모르는 아주 특별한 관계를 갖고 있고 특히 지리적 위치가 오키나와와 가까운 허핑섬은 더욱 그랬습니다.

228사건 때 학살당한 류큐인을 애도하는 '류큐 어민 위령비(琉球漁民慰靈碑)' - 사진: 허핑섬 지질공원 홈페이지
약 3만 년 전 구석기시대부터 타이완에서 류큐로 건너간 사람이 있었고 1895년 일치시기에 들어 양쪽의 교류가 빈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타이완의 경제상황은 류큐보다 더 잘 발전되어 많은 류큐인은 타이완으로 건너와 허핑섬에서 거주하게 되었는데, 이는 당시 타이완에서 최대이자 최초의 류큐 취락이었습니다. 류큐 어민들도 정빈어항에 정박해 어물을 팔았습니다. 또한 당시 일본정부는 타이완의 파인애플 산업을 국영화했는데 파인애플 농민들이 생계를 위해 류큐 야에야마 제도(八重山諸島)에 가서 황무지를 개간하고 옥토를 만들었습니다. 1945년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이 치른 마지막 상륙전인 오키나와 전투(Battle of Okinawa) 중 타이완 군인 4.5만 명이 일본군으로서 전사했습니다.
2016년 개봉한 타이완 다큐멘터리 <바다의 저편(海的彼端)>의 주인공이 바로 야에야마 제도로 이주한 타이완인 후손입니다. 일본 헤비 메탈 밴드 섹스 머신건즈(Sex Machineguns)의 베이시스트로서 활동하고 있는 타마키신고(玉木慎吾)는 할머니로부터 당시 타이완에서 야에야마 제도로 이주한 가족의 역사이야기를 알게 되었습니다. 파인애플을 심었던 신고 할아버지는 파인애플 공장의 사장을 따라 오키나와섬보다 타이완에 더 가까운 야에야마 제도로 갔는데 2차 세계 대전 때 미국의 폭격 때문에 타이완에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1947년 228사건이 일어난 후 중화민국 군인이 허핑섬에서 무차별한 학살을 감행했고 그들은 부득이하게 다시 야에야마 제도로 돌아갔습니다. 일본이 오키나와 전투에서 패한 후, 1945년부터 미국은 류큐를 점령해 미군정을 실시했습니다. 이로 인해 신고의 할아버지, 할머니처럼의 타이완인은 무국적 주민으로서 30년 동안 야에야마 제도에서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1972년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되었을 때, 신고 할아버지는 일본 국적을 취득하기 위해 중국어 성씨 ‘왕(王)’씨를 한자 모양이 비슷한 일본 성씨 타마키(玉木)로 바꿨습니다.
<바다의 저편(海的彼端)> 감독 황잉위(黃胤毓)는 2012년 타이완에서 출판된 《야에야마의 타이완인(八重山台灣人)》을 기점으로 다큐멘터리 촬영에 필요한 조사를 시작해 직접 야에야마 제도에 갔습니다. 황 감독은 “현장조사 과정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언어는 일본어도 중국어도 아닌 타이완어(台語)”라고 했습니다. 야에야마 제도로 이주한 타이완 어르신들은 중국어를 전혀 모르고 자신의 모국어인 타이완어를 듣자 온 얼굴에 웃음을 띠었습니다. 황 감독은 언어 우세를 통해 금방 현지 주민과 가까워지며 일본 연구자들이 따라오기 힘든 풍부한 연구성과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타이완어를 왜 안 배우냐는 질문에 신고는 “괴롭힘을 당할 거니까요.”라며 야에야마 타이완인의 처지를 토로했습니다.

야에야마 타이완인의 이야기를 다루는 다큐멘터리 <바다의 저편(海的彼端)> - 사진: 바다의 저편 페이스북
당시 신고 할머니는 남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야에야마 제도로 밀항했을 때 일부러 태풍이 왔던 날에 출발했는데 손을 배 밖으로 내밀기만 하면 바닷물이 만져질 정도로 위험했다고 말했습니다. 228사건이 아니었으면 그들은 국적과 목숨을 잃을 위험을 무릅쓰고 서둘러 야에야마 제도로 밀입국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류멘터리 촬영 과정에서 신고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고향 타이완을 방문했습니다. 지룽에 도착하자 습한 공기 속에 타이완 전통 향수인 밍신화로수(明星花露水)의 냄새를 맡으며 황 감독에게 “이 냄새! 바로 할머님의 냄새”라고 말했습니다. 이 순간에 바다 저편에 있는 타이완섬, 그리고 신고의 고향 야에야마 제도는 드디어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타이완과 일본 사이에 어느 쪽도 속하지 않는 야에야마 타이완인의 향수도 드디어 풀어졌습니다.
그럼 앞에 언급한 ‘류큐 어민 위령비’는 언제 세워졌을까요? 1947년 허핑섬에서 일어난 학살 사건은 서랴오사건(社寮島事件)이라 불리며 분쟁이 더 이상 없도록 서로 일깨우고 평화를 기원한다는 취지에서 서랴오섬은 평화를 의미하는 허핑섬으로 개칭되었습니다. 2010년 한 오키나와 의원이 228사건 류큐 피해자 가족을 대표해 허핑섬을 방문했는데, 지룽시청에 위령비를 세우고 싶다는 의지를 전달했습니다. 2011년 류큐 사업가 이시하라치에(石原地江) , 오키나와에 사는 타이완인 쉬광훼이(許光輝), 타이완 228사건배려총회(台灣二二八關懷總會)와 지룽시청의 기증으로 류큐 어민 위령비는 드디어 세워졌습니다. 피해자의 죽음을 애도할 뿐 아니라 당시 지룽 주민들에게 어업 기술을 전수했던 류큐 어민들을 기념하기도 합니다.
지리적, 역사적으로 매우 유사한 타이완과 오키나와는 큰 나라 사이에 끼여 있어 정체성 곤란을 겪고 있습니다. 일본인도 타이완인도 아닌 야에야마 타이완인. 일본인이면서도 일본인이 아닌 류큐인. 250km만 떨어져 있는 지룽 허핑섬과 야에야마 제도. 무서운 바다를 건너다녔던 섬나라 사람들을 위해 한 곡을 띄워드리겠습니다.
야에야마 타이완인의 이야기를 주제로 제작된 노래 ‘오키나와 블루스(OKINAWA Blues)’입니다. 해당 노래는 오키나와의 전통 악기로 연주되며 타이완과 야에야마에 떨어져 있는 연인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가수는 천성(陳昇)과 자오융화(趙詠華)입니다.
청취자 여러분, 앞으로 지룽이나 오키나와에 가실 때 이 아름다운 섬들 뒤에 숨어있는 역사를 회상하면서 여행을 즐기세요. 오늘 <랜드마크 원정대>와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으로 RTI 한국어 방송의 안우산이었습니다.
▲참고자료:
1. 阿潑,《憂鬱的邊界:一段跨越身分與國族的人類學旅程》。
2. 松田良孝,《八重山の臺灣人》。
3. 楚焱堯,「叫沖繩,還是琉球,只是名稱不同而已嗎?」,Vocus。
4. 電影啟事,「《海的彼端》:我是台灣人,來自海的那一邊」,BIOS monthly。
5. MAPLE,「《海的彼端》專訪:回家的灣生,回不去的玉木家族」,娛樂重擊。
6. 和平島地質公園。



Rti 중앙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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