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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룽항, 타이완 육지의 끝, 제국 해상길의 시작

  • 2023.02.07
대만주간신보
일본 고베와 타이완 지룽을 오가는 연락선 후소마루(扶桑丸) - 사진: 오사카상선회사 발행 (《日治時期的基隆與宜蘭》2012, 46에서 재인용)

“바닷가의크고 작은 깃발이 펄럭이고, 거리마다 사람과 말의 왕래가 번성하며, …” - 소사쿠 이시자카(石坂莊作, 1870-1940)의 ‘지룽항’(基隆港)

<대만주간신보> 지난 편에서 최승희의 타이완 공연과 양수이신의 첫 도쿄 여행 이야기를 들려 드린 바 있죠. 두 이야기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장소가 한 곳 있습니다. 바로 지룽항(基隆港)인데요. 최승희가 타이완 전국 순회 공연 차 1936년 일본을 떠나 타이완으로 향하는 요시노마루(吉野丸) 선박을 타고 처음 도착한 곳, 타이중에 살던 양수이신이 1928년 일본행 선박, 미즈호마루(瑞穗丸)을 타기 위해 타이완 북쪽으로 기차 타고 도착한 곳도 바로 지룽항이었습니다. 이처럼 지룽항은 일제시기 일본과 타이완 사이의 모든 선박들이 오가는 해상 교통의 중심지였습니다. 타이완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지룽항이 타이완의 첫인상이었겠죠. 고향을 떠나 타지로 향하는 타이완 사람에게 지룽항은 타이완에서의 마지막 기억일테고요. 이처럼 지룽항은 일제시기 타이완과 일본을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제법 깊은 인상을 주는 항구 도시였습니다. 오늘은 지난 시간 다뤘던 지룽 기차역에 이어, 지룽항의 간단한 역사를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청조 말기인 1861년 청나라는 베이징 조약과 톈진 조약에 따라 타이완 관련 조문을 체결하고 단수이를 통상 항구로 개방하는 데 동의했는데요. 그로부터 2년 후 타이완 부성(府城, 오늘날의 타이난)에 주재했던 영국 영사의 추진으로 원래 단수이에 부속되어 있던 지룽항도 개항했고, 별도의 세관 관리 항무까지 설치하면서 지룽은 네덜란드 통치 시기 이후 다시 서구세계와 접촉하는 계기를 맞이했습니다. 개항 초기 미국 해군의 보고를 거쳐 이 지역에서 탄광을 생산할 수 있는 잠재력을 알아차린 서구 열강들은 1860년대 후반부터 각종 양행(怡和洋行、顚地洋行)들을 위한 창고를 항구에 설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근대화된 항구를 설치한다는 생각은 1880년대 중반에 들어 류밍촨(劉銘傳, 1836-1896)이 타이완의 순무로 부임할 때 비로소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류씨는 지룽항 준설을 주관하도록 요청했으나 새로운 항만 시설은 여전히 허술했고, 단수이가 1890년대 이미 완벽한 부두와 번영하는 하항 시가지를 개방한 데 비해, 지룽항은 일제시기 초기까지도 타이완 경제에 대한 기여가 제한적이었습니다. 당시 단수이 주재 영국 영사였던 헨리 보나(Henry A. C. Bonar)가 본국 외무부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타이완이 일본에 할양된 이듬해인 1896년 타이완 북부의 수입 무역에서 지룽은 총액의 4% 밖에 차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일본 정부는 1896년 지룽항의 군사, 교통, 무역 가치를 올리기 위해 도쿄에 ‘지룽 축항 조사 위원회’를 설치해 축항에 관한 조사와 설계에 관한 사무를 처리하기로 결의했고, 같은 해 타이베이에도 ‘지룽항 조사 사무소’를 설치해 1900년부터 본격적으로 제1기 축항 계획의 길을 닦기 시작했습니다. 영국은 일본의 축항 계획이 성공할 수 없다고 여길만큼 당시 외국은 일본의 계획을 그다지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는데, 일본 정부는 1900년부터 1945년까지 5차례의 축항 계획을 지속적으로 집행해 46,185,000엔 규모의 공사경비를 들여 지룽항의 규모를 다지는 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지룽항 축항의 의의는 단지 현대적인 항만 시설을 건설하는 데만 있지는 않습니다.  더불어 지룽 시가지를 전면적으로 개조해 항만 도시의 기능과 신시가지의 기능이 상부상조할 수 있게 된 데에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현지 일본인들은 일찍이 시문을 창작해 지룽항의 해운, 철도, 탄광 등의 산업이 발달한 광경을 칭송하고, 그 경제적 성과와 중요성을 설명하기도 했는데요. 당시 지룽의 소사쿠 이시자카(石坂莊作, 1870-1940)가 남긴 ‘지룽항’(基隆港)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소사쿠 이시자카는 메이지 29년인 1896년 기자 신분으로 일본 군대와 함께 타이완에 처음 방문했습니다. 이듬해 타이베이에 거주하며  ‘대만일일신보’(臺灣日日新報) 기자로 일하다 1899년부터는 지룽으로 파견되어 남은 평생을 지룽에서 살았습니다. 소사쿠는 지룽에 ‘소사쿠 야학교’(石坂夜學校, 8년 뒤 지룽 야학교로 개명함)를 설립해 무료로 타이완 학생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고, 1909년에는 2층짜리 목조 건물의 ‘소사쿠 문고’라는 도서관을 짓기도 했습니다. 일본 정부가 설립한 ‘타이완 총독부 도서관’ 보다 무려 6년이나 먼저 설립되었죠. 그는 ‘지룽항’ (基隆港) 외에도,  ‘우리의 지룽항’(ありが基隆港), ‘지룽항 범론’(汎論基隆港) 등 지룽에 살면서 이 지역과 관련된 다양한 책을 남겨서, 일제시기 지룽하면 소사쿠 이시자카의 공헌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항구를 건설하는 것 외에 1896년부터 타이완총독부는 타이완과 일본 간의 무역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타이완의 대외적인 현관인 지룽에 정기항로를 개설하도록 민간 오사카상선(大阪商船) 회사에게 훈령했습니다. 일본 고베에서 출발하여 가코시마와 오키나와를 경유해 타이완 지룽까지 오는 항선의 경비를 관비로 보조했는데, 이것이 바로 일본 정부가 주관하는 일본과 타이완 연결 해상항로인  ‘명령항선’(命令航線)의 시작입니다. 1897년에는 일본우선(日本郵船) 회사에게 고베와 지룽의 직항 노선을 개설하도록 했습니다. 1902년에는 가오슝에서 출발해 지룽을 거쳐 몬지, 고베을 경유해 요코하마에 도착하는, 요코하마-가오슝 노선이 개설되기도 했습니다. 1900년대 초에 이르자 두 상선 회사는 일본과 타이완을 오가는 선박의 운항을 대부분 관리할 수 있었고, 정부가 관리하는 명령항선은 12개, 민간업자가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자유항선은 5개로 증가했습니다. 타이완의 일본상선회사는 일본 외에도 지룽에서 중국 대륙, 조선반도, 그리고 자바, 싱가포르, 필리핀으로 가는 항로도 개설했습니다. 지난번 소개했던 린셴탕(林獻堂)같이 집안이 넉넉한 타이완 사람들은 우선(郵船)을 선택해 지룽에서 배를 타고 홍콩으로 가 유라시아와 아프리카로 가는 크루즈를 타고 세계일주를 하기도 했고, 혹은 일본 인류학자 이노 카노리(伊能嘉矩, 1867-1925)와 같은 일본 학자들은 지룽항의 편리한 위치를 이용해 다른 각종 교통수단으로 전환하여 전 타이완 외딴섬 부락을 답사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1927년 6월부터 일본해군은 지룽항에 주둔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해군은 지룽을 중심으로 타이완과 일본 사이의 정기 수상 함재기 항로를 더욱 증가시켰고, 이것은 일제시기 지룽항의 기능을 해운, 육상 운송에서 군사 요충지로 한 걸음 확장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머지 않아 세계 2차세계대전이 벌어졌습니다. 군사 요충지가 된 지룽은 결코 안전하지 않았습니다.

제2차세계대전 기간에 미군은 1944년에서 1945년 사이 지룽항 주변의 중요한 군사 요충지, 창고, 해군기지, 포병진지, 기름창고시설을 잇달아 공습해 일본군의 지룽  전략배치는 완전히 무너졌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부두, 화물창고, 철근 시멘트 창고, 아시아 최대의 항만 검역소 등도 훼손되었다. 지룽의 해수면 아래로는 159척의 침몰선이 가득했습니다. 전후 중화민국 정부가 타이완의 대외 무역을 회복하고 사회 회복과 경제 재건 속도를 지연시키는 데 심각한 영향을 끼칠 정도로 그 파괴 정도가 심각했다고 합니다. 훗날 중화민국 정부 항무국 관원은 일제시기 일본 정부가 남긴 도안을 이용해 전쟁 전 축항 계획이 그린 청사진에 따라 항구 대부분의 시설을 재건했다고 합니다.

 

 

참고문헌

國家圖書館特藏組編. 《日治時期的基隆與宜蘭》. 臺北: 國家圖書館, 2012.

陳青松. <日治時期的文史瑰寶石坂莊作>,《臺灣文獻》 53(2), 235-244.

 

-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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