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 또 비바람이 부는 타향의 도시. 물방울을 비추는 푸르스름한 가로등이 내 마음을 울리네."
타이베이시 북쪽 신베이시와 접해 있는 도시, 지룽(基隆, Keelung)을 노래하는 대표적인 곡 '항도야우(港都夜雨, 1958)'의 첫 소절입니다. 지룽은 바람이 매섭게 불고 비가 자주 오는 도시로 묘사되곤 하죠. '신주 바람 지룽 비'(新竹風基隆雨)란 말이 있을 정도로 타이완 사람들에게 지룽은 비가 많이 오는 지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비가 자주오는 것 외에도 지룽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타이완에 필요한 각종 물자들을 교역하는 대표적인 항만 도시였다는 점입니다. 타이완 북쪽 해안에 위치한 지룽은 일제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수많은 국제 선박들이 정착하고 타이완 섬으로 뻗어가는 철도 길이 시작하는 교통과 무역의 중심지로 눈에 띄게 성장했습니다. 타이완 총독부가 항만 도시 개발을 위해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결과 지룽은 일제시기 타이완 북부 지역의 가장 중요한 도시로 발전했습니다.
1895년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해 일본은 청조와 조선과의 관계를 느슨하게 만들었고, 청조는 타이완 섬을 일본에 할양해야 했습니다. 그해 6월 일본 왕족 키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 신노(北白川宮親王, 1847-1895)가 근위사단을 이끌고 시모노세키 조약에 의거해 정식으로 지룽을 점령했습니다. 일본의 타이완 통치를 반대하는 수많은 타이완 사람들이 이미 5월에 타이완민주국(台灣民主國)을 설립해 할양 결정에 반대하며 일본 통치에 저항하는 전쟁을 곳곳에서 벌였고, 요시히사 신노도 결국 이 전쟁에서 사망했는데요. (그러나 결국 요시히사 신노는 일본인에 의해 신격화 되어 일제시기 50년간 타이완 신사(현 원산대반점 위치)에 모셔졌으며, 10월 28일마다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럼에도 총독부는 해관 세무사의 관사를 비롯해 항구, 기차역, 공원, 학교 등 각종 근대식 시설들을 지룽에 짓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이 타이완을 점령한 후 3년 째 되는 해인 1898년 마카오에서 건너온 문인 쉬선티엔(徐莘田)이 지룽을 보고 남긴 글에는 당시 항일 전쟁의 참혹함 대신 양옥, 항만, 신시가지가 문인의 감성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일찍이 단수이항에 속해 있던 지룽항을 타이완 총독부가 다섯 번의 항구 건설 계획을 거쳐 개발하면서, 일제시기인 약 반세기 동안 지룽은 타이완 북쪽지역의 국방 요새이자 '제국의 현관'이었으며, 항운과 철로가 만나는 장소로서 수많은 타이완 대중들의 인생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사실 지룽은 청나라 말기부터 교통의 요지로 기능하고 있었습니다. 청나라 지방행정은 1887년 일찍이 타이완에서의 첫 철도 건설을 착공해 1891년 완공했죠. 청말 타이완 지방행정 조직을 체계화 한 류밍촨(劉銘傳, 1836-1896)의 주도로 지룽에서 타이베이까지의 철도가 완성되었고, 지룽의 부두 부근에 매표소를 설치해 일찍이 여객과 화물을 오르내리는 지역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계획한 노선과 항구 무역 기능이 제한적이어서, 열차의 여객 화물 운송 업무 경영이 좋지만은 않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1895년 일본군이 지룽을 공격하자 청나라군은 궤도를 따라 지룽에서 타이베이로 향하면서 선로를 훼손했고, 이후 일본군이 지룽을 장악한 후 화물을 실은 열차가 예상치 못한 산비탈로 가 60명의 노동자가 어쩔 수 없이 기차를 미는 일이 발생하자, 일본 신문에서는 타이완 기차를 '거꾸로 미는 기차'(後推火車)라고 조롱하기도 했습니다.
타이완 총독부는 선박을 통해 지룽항으로 건너 온 화물을 육지로 무사히 운반하기 위해 지룽에 철도선구사령부(鐵道線區司令部)를 설치했습니다. 당시 육군 대령인 고다마 도쿠타로(兒玉德太郎, 1856-1905)가 사령관을 맡아 수송 임무를 처리하고, 지룽에서 타이베이로 향하는 철도 노선을 수정하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철도가 개선되자, 당시 타이완 문인들은 “대규모 토목공사로 터널을 뚫어, 구불구불 굴곡진 길을 화살처럼 앞으로 나아가며 승객들로 넘쳐난다”며 편리함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총독부가 1908년 지룽 기차역을 완공하면서 지룽역은 타이완 서부 종단 철도의 기점이 되었습니다. 1896년 5월 일본의 유명 선박 회사(오사카상선회사와 일본우선회사)가 타이완과 일본 간의 정기항로를 운영하기 시작하면서 기존의 역 시설로는 화물운송이나 저장의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어 총독부는 오늘날의 지룽 기차역이 있는 자리에 초대 역을 건설을 계획했는데요. 1907년 착공해 1908년 메인 건물이 완공되면서부터 지룽은 단순하고 허름한 승강장이 아니라 여객과 화물 수송의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있고, 특히 부둣가에 매단 선박이 화물을 직접 하역할 수 있도록 하는 등 교통의 중심지로서 기능하기 시작했습니다.
1919년 발행된 『일본사진첩』(日本寫真帖)에 수록된 지룽 기차역 사진에서도 지룽 기차역을 "타이완 종횡 철로의 기점"이라고 소개했죠. 기차역의 외관은 유럽풍으로, 벽돌과 타이완의 향나무를 주요 재료로 사용해 2층짜리 양옥을 쌓았습니다. 내부에는 대합실, 매표소, 점포, 여객안내소가 있었고, 대합실은 다시 1등, 2등, 3등석, 여자용 1등, 2등석으로 구분되었습니다. 대체로 외국에서 선박을 통해 타이완으로 들어오거나 타이완에서 출국하는 여행객들이 지룽을 많이 거쳐갔는데, 이곳에서 버스, 기차, 선박, 등 다른 교통 수단으로 쉽게 갈아탈 수 있었습니다. 수많은 여행객들이 오고 가는 지룽 기차역 밖에는 여관과 목욕탕이 있어 여행객들이 쉬면서 출발과 도착을 기다렸습니다. 지룽역 근처 대표적인 여관 중 하나로 '이히메칸'(依姬館)이 있습니다. 이히메칸 여관 광고가 1902년 『대만일일신보』에 처음 실린 이후 1938년까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일제시기 타이완 북부 지역의 중요 여관 중 하나였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1908년부터 1945년까지 지룽역은 타이완의 교통의 거점 중 하나였을 뿐만 아니라 일본 본토와 타이완 섬 간 항로의 발달로 인해 식민지 지배의 치적(공적, 업적)을 상징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일본 정부가 주관하는 수많은 정치 의식 및 행사들이 이곳에서 상연되었고, 많은 일본 황족, 고위 관리, 무장들이 일찍이 이곳 지룽에서 영광을 누렸습니다. 주요 군사 요충지였던 지룽은 제2차세계대전 기간 동안 미군의 연속 폭격을 받았고, 지룽역은 심하게 훼손되었다. 전쟁 후 중화민국 정부는 미국의 협조를 얻어 용병을 이용해 수송시설을 재정비하여 수년 내에 기능을 회복하도록 했고, 1949년을 전후해 중화민국 정부는 외부 원조를 얻기 위해 여객선이 접안하고 여객이 하선할 때마다 역전에서 환영의식을 주재했는데, 여기에 광복 후 1대 지룽 시장이었던 셰관이(謝貫一)가 직접 역전으로 나와 일일히 악수를 하며 주변에는 군악이 울리고 깃발이 펄럭이며 군중이 환호했다고 합니다. 그 모습이 마치 전쟁 전인 일제시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하네요.
단수이(淡水), 안핑(安平), 가오슝(打狗, 高雄)과 함께 일제시기 타이완의 4대 항만으로 손꼽히는 지룽은 일본과 타이완을 연결하는 해상로와 타이완 육로의 가교역할을 했습니다. 지룽 기차역에 이어서 다음주에는 지룽항에 관해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문헌
國家圖書館特藏組編. 《日治時期的基隆與宜蘭》. 臺北: 國家圖書館, 2012.
臺北市末廣高等小學校編. 《基隆を中心に》. 臺北: 末廣高等小學, 1924, 54.
-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Rti 중앙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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