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베이 도심은 좁은 폭의 골목길로 가득합니다. 1차선 도로 폭의 길 한켠에 두 사람이 나란히 걸을 수 있는 정도의 보행길이 있는 골목길 양 옆은 오래된 나무와 5층 이하의 가정집 건물, 그리고 작은 상점들로 차있습니다. 높고 화려한 마천루 뒤 작은 골목으로 점점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햇살 좋은 날, 처음 가보는 골목길을 두 발로 걸을 때 느끼는 설레임과 골목길 마다 서로 다른 가게들을 구경하는 재미를 선사하는 <어반 스케처스 타이베이>의 ‘골목길 시리즈’ 세 번째 시간, 오늘의 골목길은 바로 민러제(民樂街)입니다.
민러제는 오래된 원단 가게들이 모여있는 원단 거리로 유명합니다. 바쁜 일상에서 원단을 마주할 일은 거의 없죠. 완성된 옷을 사는 것도 옷 가게에 가지 않고 인터넷으로 주문하는 요즘 시대에 원단이라뇨. 민러제가 특별한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원단, 바늘과 실, 재봉 등 요즘의 일상에서는 거의 사라져버린 과거의 풍경이 이 골목길에 들어서면 되살아납니다. 민러제 33호에 있는 한 가게(23.3度美學傢飾設計)의 사장님(翟秋霞)은 오래된 재봉틀 앞에 앉아 원단에 자수를 두고 있습니다. 여러 대의 재봉틀 위는 여러 실들이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저같은 초짜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구조를 띄고 있지만, 사장님의 손은 바쁘게 돌아갑니다. 벽에는 중국의 전통 문양과 색감이 돋보이는 자수 공예품들이 걸려있고, 그 아래에는 다채로운 색감의 원단과 자수로 물들인 쿠션들도 진열되어 있습니다. 백화점 매장처럼 손님을 친절하게 일일히 맞이하는 그런 서비스는 없습니다. 그러나 가게에 진열된 각종 수공예 장식품, 그리고 사장님의 손놀림만 봐도 신뢰와 역사가 느껴집니다.
골목길을 조금만 더 걸어가면 왼편에 큰 건물의 시장이 나타납니다. 마치 서울 동대문의 평화시장 같은 느낌을 주는 오래되고 큰 건물이죠. 바로 용러시장입니다. 2010년 타이베이시로부터 주요 원단 상점으로 공식 인정된 이곳 용러시장은 원단 관련 상업과 공업이 많이 사라지고 있는 현재, 유일하게 또 여전히 확고한 위상을 띄며 자리하고 있는 시장입니다. 알고 보니, 용러시장과 그 주변 민러제가 여전히 원단 거리로 유지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일제시기 역사와 무관하지 않더군요. 과거 일본의 식민지였을 적 일본인들이 타이베이 대도정(大稻埕) 일대를 '영락정(永樂町)'으로 개칭하고 대량의 원단을 수입하기 시작하여 이곳을 타이완 최대의 수입 원단 도매지로 만들었고, 훗날 용러시장은 타이완 최대의 원단 도소매 중심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역사가 오래된 곳인 만큼, 용러시장의 외관은 기존의 붉은 벽돌 벽을 그대로 보존하여 건물 자체만으로 복고의 느낌을 불러일으킵니다. 시장 내 2, 3층에는 수백 개의 원단, 직물 상점들이 모여 다양한 색상의 옷감을 팔고 있고, 3층의 다른 한 켠에는 오래된 스타일의 전문 재봉 스튜디오도 있습니다. 앞서 소개한 민러제 33호의 가게와 같이요. 그래서 아래층에는 원단을 구입해 3층으로 가져가면 전문 재봉사의 손을 거쳐 옷을 맞춤 제작할 수도 있습니다.
지의황물 地衣荒物 Earthing Way
각종 원단 가게와 용러시장을 지나면 보다 젊은 감각의 편집샾이 등장합니다. 타이완과 일본 스타일을 결합한 수공예품 편집샾, 지의황물(地衣荒物)입니다. 가게 이름이 독특합니다. 지의황물이라… 무슨 의미일까 궁금해졌습니다. 영어로 써있는 Earthing Way를 보니 지구와 환경과 관련한 의미라는 건 지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편집샾 공식 홈페이지를 살펴보니, 지의(地衣)는 “생물이 땅을 개척할 때 처음으로 자라는 식물이자 땅의 옷”이라고 설명합니다. 여전히 이해가 잘 가지 않아 사전을 찾아보니 '지의류'(地衣類), 영어로 라이켄(Lichen)은 보통 녹조류, 혹은 청록색 세균과 공생하는 복합 유기체로, 지구상 여러 곳에 퍼져있는 강인한 장수 식물로 알려져 있더군요. 처음엔 이끼인가보다 했습니다. 그러나 지의류가 반드시 이끼는 아니랍니다. 한국 국립수목원의 설명에 따르면 지의류는 단일한 생물체가 아니라 하얀 균체의 곰팡이와 녹색, 청남색의 조류가 만나 공동생활을 하는 공생체인 ‘균류’라고 합니다. 이렇게 종류는 다르지만 서로 도움을 주며 같은 공간에서 함께 살아가는 생물을 ‘공생생물’이라고 하고요. 곰팡이가 추위나 더위, 가뭄에 견딜 수 있는 보호막이 되어 주고, 조류는 광합성을 통해 생존에 필요한 영양분을 만들어 곰팡이에게 제공하면서 공생을 하는 것입니다. 지의류의 핵심은 바로 ‘공생(共生)’이었습니다. 한편 황물(荒物)은‘잡화'를 뜻하는 일본어, 아라모노(Aramono)로 원시적인 소재를 사용하여 만든 생활용품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가게 이름인 지의황물(地衣荒物 Liechen Aramono)은 자신의 땅을 위해 옷을 입히고, 사용하는 물건을 가장 원시적인 모습으로 되돌린다는 뜻으로, 가장 순수한 상태로 돌아가는 것과 토지를 보호하는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곳이죠.
가게 안을 들어가면 자연친화적인 색감과 소재의 일상용품들이 가게 네 면을 채우고 있습니다. 나무, 도자기, 금속, 향 등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심플하면서 감각적인 공예품들이 눈길을 끕니다. 한켠에는 부엌에서 사용하는 각종 사이즈와 모양의 그릇과 수저들이 소재와 색감에 따라 분류되어 있습니다. 시간이 오래 지난 골동품의 컵과 컵받침과 지금은 잘 사용하지 않는 체온계, 저울, 작은 빗자루와 쓰레받기도 인상적입니다. 과거에는 일상용품으로 자주 사용했지만 전자제품에 익숙해진 요즘엔 더 이상 마주할 일이 없던 소품들을 대면하는 기분이 좋습니다.
가게 또 다른 한 켠엔 옷과 목도리, 양말 등 의류도 있습니다. 특별히 의류의 소재를 인공적으로 염색하지 않아 그 색감이 눈과 마음을 편안하게 합니다. 사용하는 원단 자체도 자연스러운데다가 신체를 일부러 조이거나 몸에 딱 붙는 스타일의 디자인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가장 자연스럽게 몸에 걸칠 수 있는 옷, 내가 서 있는 땅을 크게 거스르지 않는 옷, ‘지의’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길 수 있는 의류들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조명도 이 가게의 빼놓을 수 없는 구경거리 입니다. 전통적인 모자이크 유리 공예와 접목한 작품을 이용하여 “느림(慢), 아낌(惜), 새로움(新)”의 가치를 추구한다는 타이완의 쩐쩐스테인드글라스랩(真真鑲嵌玻璃研究所) 수제 고급 조명품은 고혹적이면서 우아한 분위기를 선사합니다.
소성외 小城外 CityNorth
원단 가게들이 모인 민러제의 지의황물 가게 2층에 소재한 작은 카페 겸 바인 소성외(小城外)는 낮에는 카페로, 밤에는 바로 운영하는 가게입니다. 민러제 골목길에서 원단과 각종 용품들을 구경하고 나서 긴장을 풀기 좋은 곳이죠.
6인석 길이의 바 테이블 앞으로 각종 양주들이 진열되어 있고, 그 뒤로는 서너개의 작은 테이블이 있습니다. 여느 카페와 크게 다를 것 없어보이는 이 곳의 분위기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소재는 바로 앤티크한 가구와 작은 테이블 위에 올려져있는 스탠드 조명입니다. 나무결이 거의 보이지 않고 짙은 갈색을 띄는 월넛 원목으로 각종 문과 바 테이블, 주류장을 만들어놓았고, 앤티크함이 살아있는 각종 쇼파와 의자들이 놓여있습니다. 결정적으로 사람 키 보다 큰 골동품 자명종과 중세 성당을 연상시키는 스테인드 글라스로 만든 각종 간접 조명들이 이 가게를 안정감 있으면서 개성있게 만들어줍니다.
역사가 오래된 민러제 골목길에 젊은 세대 예술가와 활동가들의 숨결이 조금씩 스며들고 있습니다. 그 조화는 지금까지 매우 성공적이라 생각합니다. 특히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미학의 가치를 잃지 않고 있는 점이 이 골목길의 가장 큰 매력입니다. 이 작은 골목길을 걷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역사와 자연, 인간과 환경의 조화와 공생을 충분히 체득하고 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엔딩곡으로 소설가가 되는 게 꿈이라는 국립대만대학교 경제학과 출신 싱어송라이터 장한전 (張涵真, Hannah Chang)의 2018년 곡 “옷 계속 사도 돼(一直買衣服, Buy it, Girl!)"를 들려드립니다. 직장 생활이나 인간 관계 등 일상에서 힘든 일을 대면했을 때 마음에 드는 예쁜 옷을 한 번 사면 구겨졌던 마음이 사르륵 녹는 여자의 마음을 대변하는 곡입니다.
"나도 계속 옷을 사고 싶진 않지만 느낌이 오면 참을 수 없어. 계속 옷을 산다고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진마 왜냐면 오늘 나 몸이 안 좋거든. 머리 아픈데다 토도 나올 것 같아 병원 대신 쇼핑하러 갈거야. 많이 걸어도 힘들지 않아 힘들면 앉아서 인터넷 쇼핑을 하면 되지."
그리고 그녀는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제발 나를 막지말아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내 마음을”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Rti 중앙방송국
Rti 중앙방송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