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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사(南洋史)를 전공한 첫 타이완 여성, 장메이후이(張美惠)

  • 2025.06.10
대만주간신보
장메이후이가 학생 시절 잡지에 일본명 하세가와 미에(長谷川美惠)로 기고한 글. - 사진: 국립타이완문학관(國立臺灣文學館)

1945년 8월 이후, 타이완은 통치 체제의 대전환을 겪었습니다. 일본 식민 정부 이후 타이완을 접수한 새로운 정권은 국가의 힘을 동원하여 타이완의 과거를 의도적으로 단절시켰습니다. 전후 반세기 넘도록 타이완의 학생들은 학교에서 타이완 역사를 배울 수 없었고, 그 결과 현재 요직에 있는 많은 인사들조차 타이완 역사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타이완에서 손꼽히는 명문대학인 국립타이완대학 역시 이러한 역사 인식 단절의 일환에 있다고 저우완야오 교수는 말합니다. 타이완대학은 학교의 역사를 1928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보고, 올해 97주년을 기념하고 있지만, 정작 학생들과 교직원들은 100년이 다 되어가는 학교의 역사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알지 못한다고 말이죠. 

오늘 <대만주간신보> 시간에서는 국립타이완대학의 전신인 타이베이 제국대학 역사학과를 졸업한 장메이후이(張美惠, 1924~2008)라는 학생을 중심으로 타이완 체제 전환기 국립타이완대학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 갖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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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메이후이, 그녀는 타이베이 제국대학 역사학과에서 남양사(南洋史)를 전공한 ‘유일’한 여학생이었습니다. 타이완에서 네덜란드 문헌을 활용해 논문을 쓴 ‘최초’의 인물일 가능성도 높죠. 그는 일제시기, 즉 타이베이 제국대학 시기에 대학에 입학해 정부가 바뀐 뒤인 1947년 졸업합니다. ‘최초’, ‘유일’이란 타이틀 만으로도 그녀를 조명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일제시기 고등교육을 받은 신여성

장메이후이는 1924년 9월 9일 타이베이 주 지룽군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장원반(張文伴, 1898-?)은 타이완 총독부 의학교를 졸업한 후 타이베이 다다오청(大稻埕)에서 산부인과를 개업했고, 어머니 셰한(謝漢)은 타이완의 첫 가톨릭 학교인 징슈(靜修)여학교를 졸업했으며, 천주교 신자였습니다. 이러한 배경 덕분에 장메이후이는 어려서부터 꽤나 완성도 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1929년 사립 타이베이 유치원에 2년간 다녔고, 1931년 타이베이 제1사범학교 부속 소학교에 입학, 1937년에는 타이베이 제1고등여학교에 진학했습니다. 당시 타이완 여성으로 고등여학교를 졸업하는 것만으로도 드문 일이었는데, 그녀는 더욱 높은 학문을 향해 나아갑니다. 1941년 4월 일본 도쿄의 세이신여자학원 고등전문학교에 진학했습니다(후에 세이신여자대학[聖心女子大学]으로 개명). 국문과로 입학했으나 나중에 역사학과로 전과했죠. 세이신여자학원 역시 천주교 성심회 계열의 학교로, 일본 황후 미치코도 이 학교 출신입니다.

도쿄 세이신여자학원에서 타이베이 제국대학으로

1942년 5월 1일, 장씨 가문은 일본식 성씨 ‘하세가와(長谷川)’로 개명하였고, 장메이후이는 ‘하세가와 미에(ミヱ)’라는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광복 1년 전인 1944년, 그녀는 세이신여자학원 재학 중 타이베이 제국대학 역사학과에 지원해 타이완으로 돌아옵니다. 

당시 일본제국은 총 9개의 제국대학을 일본 본토와 더불어 서울 경성과 타이완 타이베이에 세운 바 있었습니다. 이 중 도쿄 제국대학과 교토 제국대학은 여학생을 받지 않았으며, 도호쿠 제국대, 홋카이도 제국대, 규슈 제국대 등만 일부 여학생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타이베이 제국대학은 여성의 입학을 허용했었죠. 1931년, 첫 여성 본과생 오오모리 마사히사(大森政壽)가 문학부 영문학 전공으로 입학하여 입학 당시 신문에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1928년부터 1945년까지 본과생으로 입학한 여학생은 총 9명이었는데, 이 중 타이완인은 3명뿐이며, 모두 1944년에 입학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장메이후이입니다.

장메이후이는 세이신여자학원 재학 중 연구 잠재력을 보였고, <민속대만(民俗臺灣)>이란 잡지에 ‘타이완의 가정생활’(상/중/하)을 비롯해 ‘조모의 죽음을 회고하며’ 등의 글을 기고했고, 천주교의 타이완 선교에 관한 짧은 글도 실었습니다. 이처럼 전쟁 전 여성으로서 학술적 색채의 글을 잡지에 발표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타이베이 제국대의 남양사 강좌를 개설한 이와오 쇼이치(岩生成一, 1900-1988) 교수를 따라 해당 학과에 진학하게 됩니다.

그녀는 제국대학에 입학한 후 ‘하세가와 미에’ 대신 다시 ‘장메이후이’라는 본명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전쟁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본명을 사용한 이유는 불분명합니다. 당시 전쟁 말기인 1944년, 학교 수업은 정상적으로 운영되기 어려웠으며, 역사학과 남양사 전공 6명 중 유일하게 성적을 남긴 학생은 장메이후이가 유일합니다. 

전쟁이 끝난 뒤, 타이완은 거대한 변화에 휘말렸습니다. 타이베이 제국대학은 국립 타이완대학으로 개편되었고, 장메이후이는 계속 학업을 이어갔습니다. 1947년 6월, ‘동서양고(東西洋考)에 나타난 명나라 시기 중-시암 교류에 대한 연구’라는 논문으로 졸업하였고(*시암은 태국의 옛 국호), 그녀는 타이완대학 역사학과의 첫 졸업생이자 문학부 제1기 유일한 졸업생이 되었습니다.

외성인 남성과의 결혼

졸업 후, 그녀는 역사학과 조교로 임용되었고, 동료 조교였던 부신셴(卜新賢)과 연인이 되어 1949년 결혼합니다. 하지만 부신셴은 1947년 12월 납치된 뒤 공산당 관련 혐의로 체포되고, 이듬해 2월 타이완 고등법원에 송치되고 말았죠. 장메이후이는 부신셴을 끝까지 지지했고, 면회와 서신을 통해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당시 사회 분위기 속에서 타이완인 여성과 외성인 남성의 결혼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용기 있는 선택을 했습니다.

장메이후이는 학문적 글쓰기도 계속 이어갔다. 1951년에는 <국립타이완대학 문사철학보> 제3호에 ‘명대 중국인의 시암 무역’을 발표했고, 같은 해에는 ‘신경농(辛逕農)’이라는 필명으로 <타이완풍물> 창간호에 ‘궈화이이 항란 사건 고찰’을 기고해 세 차례 연재하였다. 이는 전후 타이완인으로서 최초로 네덜란드 문헌을 활용한 논문으로 평가받는다. 그녀는 1960년 출간된 <타이완성 통지고(臺灣省通志稿)> 제3권 「정사지 · 외사편」 편찬에도 참여하였으며, 이 책은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역사 연구에서의 고요한 퇴장

장메이후이는 학계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결혼 후에는 점차 학문적 활동에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여성 학자가 지속적으로 연구 활동을 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고, 남편의 정치적 이력 역시 그녀의 경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녀는 이후 교육청, 문화단체 등에서 일하면서 사회 활동을 이어갔지만, 학문적 저술은 사실상 중단되었습니다.

그녀는 1950년대 말부터 타이완 각 지역을 돌며 향토사 및 문화 관련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1960년대에는 고적 조사와 향토 문화 보존에 헌신하며, 몇몇 지방자치단체의 문화사 편찬 작업에도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활동은 주류 학계에서는 주목받기 어려웠고, 그녀의 이름은 점차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습니다.

이제는 그녀를 다시 조명해야 할 때

그녀의 남편은 1950년대 초 결국 석방되었지만, 이후에도 정치적 이유로 줄곧 감시와 불이익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장메이후이는 그런 남편 곁을 지켰으며, 조용히 가정을 돌보며 살아갔습니다. 

1990년대에 접어들어 타이완 사회가 점차 민주화되고, 역사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해지면서 장메이후이의 존재도 일부 연구자들에 의해 다시 언급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녀 자신은 그다지 대중 앞에 나서는 것을 원치 않았고, 인터뷰나 공개석상에도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2008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조용히 살았고, 조용히 떠난 삶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타이완 여성으로서, 또 타이완 역사학의 초기 개척자로서 남긴 발자취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장메이후이는 타이완대학 역사학과의 첫 졸업생이자, 문학부의 유일한 제1기 졸업생이며, 일본제국에서 국민당정부로, 타이베이 제국대학에서 국립타이완대학으로 넘어오는 전환기 속에서 중요한 교량 역할을 했던 인물입니다.

뛰어난 언어 능력, 연구 역량, 그리고 시대를 앞선 관점을 지녔음에도, 결국 시대의 경계 속에서 묻혀버린 그녀이지지만, 타이완의 고등교육과 여성사, 그리고 역사학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장메이후이는 잊지 않고 기억되어야 할 인물입니다. 

 

   ►참고문헌
        周婉窈,〈臺北帝國大學南洋史學講座.專攻及其戰後遺緒(1928-1960)〉《臺大歷史學報》61期,2018年6月.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프로그램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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