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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기 발아한 타이완의 민족주의는 왜 실패했을까? (1/2)

  • 2025.05.20
대만주간신보
우미차 역사학자는 2025년 출판된 자신의 저서 에 타이완을 중국사의 일부가 아닌 타이완을 중심으로 역사를 재구성하고 해석하는 ’타이완사(臺灣史)'의 정수를 이 책에 담았다. - 사진: 보커라이(博客來)

우미차(吳密察) 역사학자이자 현 고궁박물관 관장은 올해 <대만사란 무엇인가?>란 책을 출판했습니다. 

대만사, 타이완사 연구의 선구자 중 한 명인 우 학자는 자신이 평생에 걸쳐 발표한 논문들 중 정수의 글을 선정해 이 책에 담았습니다. 그는 국립타이완대학교 역사학과를 졸업한 후 80년대 일본 도쿄대에 유학 가 일본에서 타이완을 재사유하는 학문 과정을 거치고, 본국으로 돌아와 역사학자로서 부단히 타이완의 역사를 성찰했습니다. 

그가 타이완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이러합니다. 타이완은 16세기 이래로 여러 제국의 지속적인 영향 하에 있었기 때문에, 타이완과 여러 제국 간의 충돌 그 자체야말로 타이완사를 구성하는 핵심이라고요. 타이완을 중국사의 일부가 아닌 타이완을 중심으로 역사를 재구성하고 해석하는 ’타이완사‘는 이제 역사학계에서는 물론 대중들 사이에서도 자신의 뿌리를 면밀히 이해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의 책 <대만사란 무엇인가?>에서는 타이완을 거쳐간 여러 제국들을 다루는 데 그 중 타이완 역사의 50년을 차지한 일본 식민 시대를 가장 비중있게 다룹니다. 

오늘 대만주간신보 시간에서는 우미차 <대만사란 무엇인가?> 중 가장 마지막 장인 16장 ‘일제시기 발아한 타이완 민족주의는 왜 실패했을까?’의 본문 내용을 소개하는 시간 갖도록 하겠습니다. 이 글에서 저자는 청나라때 까지만 해도 형성되지 않았던 타이완의 국가 정체성이 일제 식민 시기에 들어서 여러 식민 경험이 누적되면서 국가, 즉 민족적 국가로서의 네이션과 국가 기구로서의 국가인 스테이트를 형성할 수 있는 씨앗이 싹을 틔울 수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왜 청나라때 타이완에는 국가 정체성이 형성될 수 없었는지, 그것이 일본 식민 시기에는 왜 발아할 수 있었는지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시기를 기대합니다. 

 

(이하 글은 번역문입니다.)
 *'臺灣'은 맥락에 따라 '대만' 혹은 '타이완'으로 번역합니다.
 *'臺灣人‘ ’臺灣籍民‘ 등 일제 시기 기록에 남아 있던 용어의 경우 '대만'으로 표기했고, 그 외에는 '타이완'으로 표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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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의 국가 정체성을 되짚어보려면, 먼저 용어의 정확한 의미부터 분명히 해야 한다.

‘국가 정체성’이라는 말에서 ‘국가’는 nation(민족적 국가)과 state(국가 기구로서의 국가) 두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의미 모두를 동시에 다루는 것이 분명 필요하다.

청나라 시대에 ‘국가(state)’가 있었는가?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nation은 서유럽에서도 근대(18세기 이후)에 이르러서야 등장한 개념이다. 관련 연구는 매우 풍부하다. 중국에서의 nation-building(국가/민족 형성)은 20세기 초에야 시작된 대규모 사업이었고, 이 과정은 션쑹차오(沈松僑)의 글을 참고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20세기 초 중국의 nation-building에 이미 일본에 할양되어 식민지가 된 타이완은 참여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해, 타이완에도 만약 nation-building이라 할 수 있는 과정이 있었다면, 이는 중국과는 다른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며, 그 다른 맥락이란 곧 일본의 식민 통치다. 마찬가지로, state로서의 국가는 타이완에서는 일본 식민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출현했다.

청나라는 1683년에 타이완을 ‘영토로 편입’했지만, 청제국 자체는 우리가 오늘날 말하는 nation-state(민족국가)로 보기는 어렵다. 청나라도 일정 정도 치안 유지, 분쟁 중재 등의 기능을 수행하고 백성에게 복무와 세금을 요구했지만, 그 개입은 소극적이었다. 더 중요한 점은, 피지배민들이 그 존재를 뚜렷이 인식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것이 곧 흔히 말하는 “하늘은 높고 황제는 멀다(天高皇遠)”라는 말일 것이다.

청나라는 충분히 ‘국가’로서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는데, 이는 게으름 때문이 아니라 통치 비용에 따른 전략적 선택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국가는 사회에 개입하고, 원래 사회 내부의 작동 메커니즘을 장악하려 할 때 저항에 부딪치기 마련인데, 당시의 통치 기술로는 이러한 저항을 극복하기 어려웠고, 따라서 소극적인 통치 태도가 더 현명한 선택이었을 수 있다.

그래서 청나라 시대 타이완 사회는 정부와 서로 “잊고 지낸” 상태였다고도 볼 수 있다. 관청이 치안 유지나 분쟁 중재 등의 기능을 충분히 제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문제들은 종족 집단(문중), 비밀결사, 무장한 지역 유지들, 혹은 관에서 인정한 신사 계급 등에 의존하여 해결되었다. 특히 타이완은 청제국의 변경 개척 사회였기 때문에, 종족이나 신사 계급은 별로 발달하지 않았고, 무장 유지와 결사체가 더욱 중요해졌다.

‘국가(state)’의 출현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 국가 수립에 박차를 가했고, 1895년 타이완을 영유한 후 설치한 타이완 총독부는 일본 본토의 근대 정부 형식을 본뜬 식민지 정부였다.

이 식민 정부는 먼저 타이완 전역에서 무력 진압을 통해 치안 확보에 나섰고, 전통적으로 무장 유지와 신사들이 담당하던 치안 유지 기능을 행정 관청과 경찰 기관이 장악하게 되었다. 특히 1920년대 이후에는, 그동안 외부 정치 세력의 통치를 거부하던 산악 지대까지 거의 완전히 정복하게 되었다.

타이완 총독부는 타이베이에 총본부를 두고, 계층적 구조의 지방 정부를 설치하여 행정력을 섬 전역에 미치게 했다. 행정 기관뿐 아니라 치밀한 경찰망과 학교 체계를 통해 지방 말단까지도 효과적인 통치 범위 안에 포섭했다. 이처럼 일본의 식민 통치는 대만 역사상 처음으로 ’정부(state)’를 수립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때 비로소 대만에는 실질적으로 기능하는 정부가 생긴 것이다.

근대 정부로서 타이완 총독부는, 타이완 사회에 존재하던 군벌식 무장세력과 자치적 분쟁 조정 기능을 제거하고, 폭력을 독점했으며, 개인과 사회에 대한 강제력 및 사회 자원의 재분배 기능도 효율적으로 수행했다. 타이완 주민 입장에서는, 이렇게 구체적으로 ‘정부’를 체감한 것은 처음이었다.

‘한족(漢族)’과 ‘대만인’

청나라 시대 타이완 주민들은 정부의 존재를 뚜렷하게 인식하지 못했지만, 1895년 타이완이 일본에 할양되는 사건과, 서부 지역 전역을 휩쓴 ‘청을 위한 싸움’(일명 ‘항일무장 봉기’)은 타이완 주민들에게 ‘버려짐’ 혹은 ‘왕조 교체’라는 역사적 충격을 안겨주었고, 공동의 역사 경험을 하게 만들었다.

이후 등장한 일본 식민 통치는, 일상 속에서도 뿌리 깊은 통치의 존재감을 가져다주었고, 차별과 강제 권력이 내포된 식민 체제였다. 동시에 일본인은 타이완인이 스스로 “나는 누구인가”를 자문하게 하는 타자(他者)로 기능하였다.

“우리는 일본인이라는 타자에 대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단지 ‘일본인이 아닌 사람들’이라는 소극적 정의에 머물지 않고, 근대 정부(총독부)의 통치 및 교육 정책, 경제·산업의 근대화, 그리고 전국적 교통망 구축과 제도 통일 등은 타이완 주민 사이에 스스로를 ‘하나의 집단’으로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 식민 정부는 행정적으로 식민지 주민을 ‘본도인’(한족 중심)과 ‘번인’(원주민)으로 나누었다. 국적법 혹은 호적법적 관점에서 보면 ‘대만적민(臺灣籍民)’이라는 호칭도 사용되었다. 타이완 주민들도 스스로를 ‘대만인’과 ‘번인’으로 구분했는데, 여기서 ‘본도인’ = ‘대만인’ = ‘(타이완에 거주하는) 한족’, ‘번인’ = ‘원주민’이라는 인식이 확립되었다.

이러한 집단 호칭은 일본 식민지 관리의 행정 구분과 인종주의적 편견을 반영한다. 특히 ‘한족’이라는 개념은 유식 계층(지식인)만이 사용하는 용어였고, 일반 서민층은 ‘한족’이라는 개념 자체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한족’이라는 용어는 혈통에 기반한 분류 원리에 따른 것이며, 동시에 자신들을 ‘일본인(大和, Yamato)’ 또는 ‘원주민(高砂, Takasago)’과 구분하고, 또 중국의 한족과 연결된 정체성을 의식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반면 ‘대만인’이라는 명칭은 단순히 일본 식민 통치자와 자신들을 구분하기 위해 사용되었지만, 혈통주의적 배제로 인해 원주민을 포함하지 못하고, 심지어 ‘객가인’(하카족)과 같은 언어 집단에 대한 고려도 없었다.

하지만 ‘대만인’이라는 명칭은 지리적 범위와 피식민이라는 공통 경험 위에 형성되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원주민까지 포괄할 수 있는 정체성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내포하고 있었다.

 

(다음 주에 이어집니다.)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프로그램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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