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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1899, 타이완은행(臺灣銀行)

  • 2025.04.08
대만주간신보
1945년 이전 타이완은행 상하이 지점 건물 모습. - 사진: 위키피디아

타이완에서 발행된 최초의 공식 지폐는 1899년 9월 타이완은행이 발행한 1엔짜리 ‘타이완은행권’이다. 지폐 앞면에는 봉황 문양이 그려져있고, 뒷면에는 ‘본권은 타이완은행에서 언제든지 1엔 은화로 교환 가능. 위조 또는 변조 시 국법에 따라 엄중히 처벌’이라는 경고 문구가 삽입되어 있다. 당시 타이완에는 일본의 엔화와 구분되는 자체 통화(台幣)가 존재했는데, 1엔, 5엔, 10엔, 100엔의 지폐를 바로 타이완은행에서 발행했다. 참고로, 일제시기 지폐는 타이완 자체 통화를 사용한 반면, 동전은 타이완과 일본 내지 간에 자유롭게 통용되었다고 한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188개의 지점을 운영하고 있으며, 순자산, 총자산, 예금 및 대출 잔액 등 모든 면에서 타이완 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타이완은행(臺灣銀行, Bank of Taiwan)’은 12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일본이 타이완을 통치한 지 5년째 되던 해인 1899년에 설립된 타이완은행은 당시 타이완 총독부의 ‘중앙은행’과 같은 역할을 했다.

1945년 일본의 패망 전까지 타이완에서 공식적으로 통용되는 ‘타이완은행권’을 발행하는 핵심 역할을 한 타이완은행은 화폐 발행 외에도 일본 본토 기업의 지원을 담당했고, 이를 통해 타이완 내에서 많은 일본계 민간 기업들의 대출 채권은행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당시 일본 기업의 타이완 진출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한 곳이 바로 타이완은행이다. 1927년 일본의 한 대기업, 스즈키상점(鈴木商店)의 도산으로 타이완은행이 3억 8천만 엔 규모의 대출금을 회수하지 못해 파산 위기에 직면했으나, 타이완 총독부가 강력히 개입해 은행을 구제했을 정도로 타이완은행은 일본 정부와 연계해 타이완 경제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일본 식민 통치 시절, 100엔은 일반 월급쟁이 두세 달 치 월급보다도 많았으며, 당시 100엔짜리 지폐는 오늘날의 2,000뉴타이완달러 지폐보다도 보기 드문 것이었다. 모든 지폐의 뒷면에는 타이완 최남단에 있는 어롼비(鵝鑾鼻) 해변과 등대 그림이 인쇄되어 있었으나, 100엔 지폐의 오른쪽에는 짙은 녹색의 빈랑나무(檳榔樹)가 추가로 그려져 있어, 민간에서는 이 지폐를 덤벙대는 사람을 뜻하는 속어로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일제 식민 시기 동안 중앙은행의 역할을 수행하며, 통화를 발행하고 산업 자금을 융통하는 기능을 담당했던 타이완은행은 일본 정부의 적극적인 추진을 바탕으로 설립되었다. 1897년 3월 일본 국회에서 ‘타이완은행법(臺灣銀行法)’을 통과시키고, 같은 해 11월에 일본 정부가 ‘타이완은행 창립위원회’를 설립하면서 본격적으로 타이완은행 설립을 위한 준비 절차가 진행되었다. 타이완은행이 정식으로 설립하기 직전 일본 정부는 3,500만 엔 규모의 공채를 발행해 타이완은행이 이를 전담 판매하도록 했고, 이 자본은 이후 타이완의 철도, 항만 건설 및 토지 조사 등을 위한 재원이 되었다. 1899년 6월 타이완은행이 정식 설립되었고, 3개월 뒤 초기 운영 자본 500만 엔을 갖고 본격적인 영업을 개시했다. 

타이베이에 처음 설립된 타이완은행 본점은 같은 해 이란, 단수이, 신주, 타이중, 타이난, 펑후, 지룽 등 타이완 전국 단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지점을 개설했다. 그렇게 국내에서 지점을 늘려 확장해가던 타이완은행은 국내 지점을 개설한지 얼마되지 않은 1900년 1월 중국 샤먼에 국외 지점을 처음으로 개설했다. 

타이완은행은 일본 제국의 작은 식민지에 있는 하나의 은행에 머무르지 않고, 설립 초기부터 해외로 빠르게 지점을 확장해갔다. 1910년 이전에 이미 중국 연안 도시인 샤먼(厦門), 푸저우(福州), 산터우(汕頭)에 지점을 두었으며, 1911년에는 상하이로 진출했다. 이후 1910년대 전체를 통틀어 타이완은행은 싱가포르, 런던, 뉴욕, 인도 뭄바이의 금융가에도 지점을 설립하며 국제적인 금융 기관으로 발돋움했다. 타이완 내의 타오위안(桃園)이나 난터우(南投)보다도 먼저 해외에 진출한 셈이었다.

상하이 속 타이완은행의 흔적

오늘날 중국 상하이에는 타이완은행 지점이 두 개 있다. 불과 몇 년 전 중국 정부의 허가를 받아 설립된 것이다. 하지만 사실 오늘날에서야 타이완은행이 처음으로 상하이에 진출한 것은 아니다.

2차 세계대전 이전 타이완은행은 상하이에 깊은 발자취를 남겼다. 전쟁 전 상하이의 번영을 이야기하려면 외국인 거주지였던 ‘조계(租界)’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조계의 중심지는 ‘와이탄(外灘)’이었으며, 원래는 황푸강(黄浦江) 옆의 진흙탕이었으나, 영국인이 이곳에 건물을 짓기 시작하면서 상하이의 현대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1930년대에 이르자 와이탄에는 20여 채의 웅장하고 클래식한 고층 건물이 줄지어 들어섰다. 상하이의 랜드마크이자, 국제적인 대도시로 성장한 상하이의 전형적인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다. 이러한 대형 건물들 사이에 타이완은행 상하이 지점도 한 자리를 차지했다. 워낙 규모가 큰 다른 건물들에 비하면 타이완은행 건물은 비교적 아담한 편이었으나, 일반인이 정문에 다가가면 네 개의 굵고 긴 원형 기둥이 마치 그리스 신전과 같은 웅장함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건물 상단에는 ‘BANK OF TAIWAN’이라는 영문 표기가 새겨져 있었다.

타이완은행의 국제화와 일본인 은행장

타이완은행이 20세기 초 국제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한 데에는 당시 은행장이었던 야규 가즈요시(柳生一義, 1865-1920)의 공이 컸다. 그는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한 후, 타이완은행 부행장을 거쳐 1901년부터 10여 년간 은행장으로 재직했다. 재임 기간 동안 유럽과 미국을 시찰하며 타이완의 금융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았으며, 일본인들은 이를 기념하여 그를 위해 타이베이 신공원에 동상을 세우기도 했다. 현재 타이베이 228 공원 옆길인 공위안로(公園路)에서 샹양로(襄陽路)로 좌회전하면 공자상이 있는데, 사실 이 자리에는 원래 야규 가즈요시의 동상이 있었다.

‘야규(柳生)’라는 성은 일본에서 상당히 유명한 성이다. 에도 막부 초기, 제2대·제3대 쇼군의 검술 스승이었던 야규 무네노리(柳生宗矩)와 같은 가문에서 유래했다. 야규 무네노리는 『병법가전서』(兵法家傳書)를 저술하며 검도의 ‘무도’(無刀) 경지를 강조했으며,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의 『오륜서』(五輪書)와 함께 일본 검도의 양대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타이완은행의 은행장을 역임한 야규 가즈요시는 바로 이 검도 명문가 출신이었다.

상하이와 타이완의 문화적 교류

일본 식민 시기 타이완과 상하이는 단순히 금융 분야에서만 연관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영화와 패션 등 유행 문화 면에서도 깊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1920년대 타이베이에서 손꼽히던 고급 요정인 ‘강산루’(江山樓)의 주인 우장산(吳江山)도 상하이의 번영을 보고 감명을 받아, 대규모 투자를 통해 화려한 고층 건물을 지었다.

이처럼 타이완과 상하이는 수많은 역사적, 문화적 인연으로 얽혀 있었으며, 그 관계를 완전히 설명하기에는 한순간의 이야기로는 부족할 정도이다.

현재 이 타이완은행 상하이 지점의 옛 건물은 여전히 황푸강을 바라보고 있다. 물론 건물의 간판은 바뀌었지만 말이다.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프로그램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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