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국회의원에 해당하는 타이완의 입법위원 파면 절차가 한창 진행중인 요즘입니다. 입법위원 파면 제도는 입법위원들이 법적 또는 윤리적으로 부적절한 행동을 할 경우, 그들의 의원직을 상실시킬 수 있는 절차를 규정한 제도인데요. 당선된 지 1년 안에 민의를 수렴한 후 심의를 거쳐 대법원에서 파면 여부를 결정합니다. 파면된 의원이 있는 지역구는 파면 절차가 끝난 이후 2~3개월 안에 다시 선거를 치뤄 입법위원을 재투표 해야 모든 파면 절차가 온전히 마무리 됩니다. 국회의원을 파면하는 제도가 없는 한국에서는 이러한 절차가 생소하고 새롭게 느껴지기도 합니다만, 타이완에서는 총선 후 1년 뒤 열리는 파면 절차가 타이완 시민들의 민심을 파악할 수 있는 또 다른 중요한 척도가 됩니다. 타이완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상당히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시민들은 파면을 원하는 위원이 있을 경우, 특정 장소에 가서 서명을 해야 하며, 파면이 결정된 후에는 새로운 후보자를 두고 재투표하는 선거를 또 다시 치뤄야 합니다. 그만큼 입법위원의 정치적 신뢰와 투명성을 증진시키기 위한 민주주의의 한 절차라고 봐야겠지요.
중화민국 타이완의 선거 역사는 역사적으로 늘 민국 원년인 1912년부터 현대까지를 다뤄 왔습니다. 그래서 일본 식민 통치 시기의 타이완 선거사는 마치 역사 속의 고립된 섬처럼 자연스럽게 외면되거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취급되었던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일본 식민 통치 시기에도 타이완 사람들은 여러 차례 선거를 경험한 바 있습니다.
오늘 <대만주간신보> 시간에서는 일제시기 타이완의 선거 문화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 갖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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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11월 22일, 타이완에서는 사상 최초의 투표가 진행되었다. (1935 타이완에서의 첫 투표, 1935년 타이완 시회 및 가장협의회 선거) 당시 타이완에서 발행되는 신문과 서적에서는 이를 ‘타이완의 첫 선거’라고 불렀다. 선거 당일, 타이베이는 가랑비가 내렸지만, 다른 지역은 비가 오지 않는 맑은 날씨였습니다. 투표를 공식적으로 시작하기 전인 이른 새벽 5시부터 유권자들이 투표소에 도착했고, 오전 7시가 되자 섬 전체에서 일제히 투표가 시작되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타이완 동부 이란(宜蘭) 루오둥(羅東)에서는 ‘폭죽 두 발을 터뜨리는 신호’로 투표를 개시했다고 한다. 오늘날의 신베이시에 속하는 신뎬(新店)에서는 75세 노인이 가마를 타고 투표소에 왔고, 중풍을 앓는 유권자도 병을 무릅쓰고 신성한 한 표를 행사했다. 이와 같은 선거 열기는 오늘날의 선거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투표소에서는 유권자의 신분을 확인한 후, 선거관리위원이 ‘투표 용지’를 배부했다. 오늘날의 투표 용지와 유사한 듯 보이지만, 당시 투표 용지에는 후보자 명단이나 후보 번호, 사진이 인쇄되어 있지 않았다. 유권자는 사전에 지지하는 후보자의 이름을 외워서 직접 기입해야 했던 것이다. 후보자 중에는 타이완인도 있었고 일본인도 있었다. 이름을 한자로 쓰거나 일본어 발음에 따라 히라가나 또는 가타카나로 표기할 수도 있었다. 판독이 가능한 한 오탈자가 있어도 유효표로 인정되었다고 한다. 도장의 위치만으로 무효표가 되버리는 지금과 비교해보면 꽤나 너그러운(?) 편이었다.
타이베이의 투표소를 보면, 나무 칸막이를 설치해 여러 개의 개별 투표 공간을 만들었으며, 옆자리 유권자와 서로를 볼 수 없도록 하여 비밀 투표의 기본 원칙을 충족시켰다. 투표소에는 붓과 먹물이 비치되어 있어, 유권자는 후보자 이름을 쓴 후 투표함에 넣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당시 선거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유권자 자격 제한이다. 만 25세 이상의 연령 요건과 6개월 이상의 거주 요건 외에도, 연간 세금 5엔 이상을 납부한 남성만이 투표권을 가질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여성과 경제적으로 취약한 계층은 선거에서 자연스레 배제되었으며, 400만 명이 넘는 타이완 인구 중 실제로 투표권을 가진 타이완인은 2만 8천 명에 불과했다. 전체 인구의 0.7% 밖에 되지 않는다.
세계적으로 비교하면, 뉴질랜드 여성들은 이미 1893년에 참정권을 획득하였다. 유럽에서는 핀란드가 1906년에 가장 먼저 여성 투표권을 부여했으나, 타이완에서는 1935년까지도 여성들이 투표할 수 없었으니, 정치사적 측면에서 보자면 그 발전이 너무나 더디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971년까지도 여성 참정권을 부여하지 않았던 스위스와 비교하면, 약간의 위안은 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타이완에서는 1947년 성별에 관계없이 모든 성인이 투표할 수 있다는 조항이 담긴 헌법이 제정되면서, 1949년부터 여성도 공식적으로 투표권을 갖게 되었다.
1935년 열린 첫 번째 타이완 시의회 및 읍·면 협의회 의원 선거는 유권자 수가 매우 적었던 만큼, 당선자들의 득표 수도 많지 않았다.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대학 학생회장 선거는 커녕, 초등학교 자치회장 선거와 비슷할 정도니 말이다. 타이베이 시의회 의원 선거에서 타이완인으로서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차이스구(蔡式穀, 1884-1951)는 1,245표를 획득했고, 가오슝에서는 타이완인 최고 득표자인 양진후(楊金虎, 1898-1990)는 417표를 얻는 데 그쳤다.
그러나 선거운동의 열기는 오늘날의 선거 못지않았다. 타이베이에서 타이완인으로 두 번째로 높은 득표를 기록한 천이숭(陳逸松, 1907-2000)은 회고록에서 “공개 선거운동 기간인 10여 일 동안, 주요 전략은 정책 연설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선거운동 기간 동안 매일 2~3회, 한 번에 2~3시간씩 연설하며 총 30~40회가량 강연했다. 당시에는 마이크가 없어 온 힘을 다해 연설해야 했기에 목이 쉬기도 했다.
천이숭은 변호사였지만 예술과 문학에도 관심이 많아 문화계 인맥이 넓었다. 그가 출마하자 친구들이 선거송을 만들어주거나 악단을 조직해 지원하기도 했다. 다른 후보들은 간판을 세우거나 전단지와 소책자를 배포하고, 가가호호 방문하며 유권자들에게 지지를 호소하는 등 오늘날 선거운동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는 당시 선거전을 ‘전략이 다채롭고 기상천외한 방법이 난무했다’고 회상했다.
개표 과정은 오늘날과는 사뭇 달랐다. 선거 당일인 11월 22일, 투표는 오후 6시까지 진행되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곧바로 개표를 시작했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투표함을 수거한 뒤 개표를 다음 날로 미루었다. 개표 속도도 느려, 다음 날 오전 8시에 시작해 오후 5시까지도 끝내지 못한 지역이 있었다. 당시에는 중간에 점심시간을 이유로 개표가 중단되기도 했다.
타이완의 첫 번째 선거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다. 긍정적인 측면에서는 ‘깨끗한 선거 분위기’가 강조되었고, 부정적인 측면에서는 ‘비민주적인 구조’가 문제로 지적되었다. 일본 통치 시기 타이완인 참정권 운동의 지도자였던 양자오자(楊肇嘉, 1892-1976)는 이 선거를 “성공적이며 희망적인 사건”으로 평가했다. 천이숭 또한 “선거의 목표에 다소 가까워진 것”이라며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아무리 선거라지만, 이 선거는 근본적으로 식민지 지배하의 불평등한 제도를 반영했다. 후보자들은 일본어로 연설해야 했으며, 타이완인들이 직접 선출할 수 있는 의원은 전체 의석의 절반뿐이었다. 나머지 절반은 일본 정부가 임명했다. 또한, 유권자 수의 제한으로 인해 타이완에 거주하는 20만 명의 일본인 중 3만 명이 선거권을 가졌으나, 400만 명의 타이완인 중에서는 3만 명도 되지 않는 불공정한 상황이 벌어졌다.
<대만 근대 민족운동사(台灣近代民族運動史)>에 따르면, 타이완인들은 계속해서 지방자치와 민선 의회 구성을 요구했지만, 일본 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그 이유로 일본은 ‘타이완인이 아직 일본인으로 완전히 동화되지 않았으며, 일본어가 보편화되지 않았다’, ‘국민 교육이 미흡하다’, ‘일본인 수가 타이완인의 20분의 1에 불과해 선거를 하면 일본의 이익이 침해될 수 있다’, ‘타이완인의 민족 의식이 강해 자치권을 주면 일본과의 관계가 악화될 것’ 등을 들었다.
이러한 식민 통치 속에서도 타이완인들은 끈질기게 연설을 통해 자치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오랜 투쟁을 이어갔다. 그러나 일본 당국은 강하게 탄압했으며, 선거 개혁을 요구하는 문구가 담긴 현수막마저 경찰에 의해 철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이완인들은 최초로 자신들의 대표를 선출할 수 있게 된 이 선거를 소중하게 여겼다. 양자오자는 “우리는 타이완 사회에 새로운 환경을 창조하고 좋은 선거 문화를 정착시켰다”고 평가하며, 이 선거가 타이완 민주주의 발전의 중요한 초석이었음을 강조했다.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Rti 중앙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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