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정이 2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타이완에서는 음력 새해 첫 날인 1월 29일 수요일을 전후로 구정 연휴 기간이 총 9일이나 되어, 많은 사람들이 이 기회를 틈타 해외 여행을 떠날 생각에 들떠있는데요. 해외 여행을 가려면 반드시 소지해야 하는 여권. 국가명이 적혀있는 하드 커버를 펼치면 사진과 함께 소지자의 이름, 국적, 여권번호 등이 기재되어 있는 국제 신분증인 요즘 여권과 달리 타이완의 첫 여권은 얇은 종이 한 장 짜리였다고 하는데요. 오늘 <대만주간신보> 시간에서는 타이완의 여권 제도가 가장 처음 시행되었던 1897년으로 돌아가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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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부터 1907년까지 타이완에서 출국하는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여권을 신청해야 했다. 모든 사람에는 타이완인과 일본인 외에도 한국인, 타이완 화교 등, 일본 제국 영토 하에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이 전부 포함된다. 1897년 1월 타이완총독부는 ‘외국여권규칙(外國行旅券規則)’을 시행, 타이완에 거주하는 일본제국신민(帝國臣民)이 해외로 나가려면 각 지방 관청에서 여권(旅券, 료켄)을 신청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시모노세키조약에 따라 타이완인의 선택적 이주 기간이 종료되자 타이완인도 해외로 나가려면 다른 제국신민과 마찬가지로 규정에 따라 여권을 발급받아야 했던 것이다. 여권은 기본적으로 1인당 1매씩 발급되었고, 발급 수수료는 50전이었다. 다만, 남편과 함께 여행하는 아내나 미성년 자녀는 예외적으로 자신의 여권 외에 남편이나 부모의 이름과 신분, 나이를 함께 기재할 수 있었다. 지금의 여권과 달리 얇은 종이 한 장짜리였던 일제시기 여권. 신청자격에는 제한이 없었고, 신청을 하려면 이름, 본적, 거주지, 세대주와의 관계, 가족명, 연령, 직업, 여행지명, 여행목적 등을 상세히 기재해야 했다.
일본인도 처음에는 타이완에서 출국을 할 경우 여권을 발급받아야했다. 그러나 일본 외무성은 1907년부터 일본인에게 여권 신청을 선택사항으로 변경했다. 타이완 출국 시 여권을 또 신청해야하는 불만이 이곳저곳에서 제기된 결과다. 물론 타이완인은 여전히 여권 신청이 필수였던 상황에서 차별 대우가 실제 행정상으로 발현되었다. 여기에 더해 타이완인이 중국으로 가는 경우에는 ‘도화여권(渡華旅券)’을 추가로 신청해야 했다. 여기에 타이완인들은 차별이라며 저항했다. 중국을 찾는 타이완인이 특히 많았기 때문이다. 총독부를 대상으로 ‘도화여권 폐지운동’까지 벌였지만, 일제가 끝날 때까지 해당 제도는 폐지되지 않았다.
여권을 신청해 해외에 다녀와 귀국을 할 경우, 여권을 반드시 총독부에 반환해야 했다. 이후 새로 출국할 때는 다시 신청해야 했다. 즉, 한 번 발급받으면 유효기간이 10년인 지금의 여권과 달리, 출국할 일이 있을 때마다 신청을 하고 심지어 반환까지 해야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던 것이다. 총독부는 여권 발급 및 반환 기록을 ‘타이완총독부여권하부표’에 꼼꼼히 정리해두었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몇 개 용어가 상당히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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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류지(寄留地): 만약 출생지가 자이(嘉義)이고, 현재 타이베이에 거주하고 있다면, 타이베이가 기류지가 된다. 지금의 거주지와 같은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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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여권: 1회 왕복 사용으로 제한되며 타이완으로 돌아온 후 기한 내에 반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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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복여권: 3년 동안 횟수 제한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여권으로, 오늘날 일종의 정기권과 유사하다.
그리고 ‘족적(族籍)’이라는 항목에는 ‘신신민(新臣民)’이라는 용어도 등장한다.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 체결 이후 2년간 타이완인들이 재산을 처분하고 이주할 수 있도록 했는데, 이 기간이 지나도 이주하지 않은 사람들은 일본의 신민(臣民)으로 간주했다. 따라서 1897년 5월부터의 기록에서는 타이완인을 일본제국 새로운 신민을 의미하는 ‘신신민’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기록했다.
그렇다면 ‘신신민’으로 명명된 타이완인들이 여권을 사용했던 가장 주요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교육과 취업이다. 타이완인의 여권 기록은 유학이나 취업을 위해 중국으로 향한 것이 대부분이다. 당시 타이완 내에는 교육기관이 현저히 부족했기 때문이다. 교육시설 자체가 부족한 데다 일본인과 달리 타이완인 자제들은 입학 정원도 제한돼 진학 경쟁이 상당히 치열했다. 당시 능력 있는 부모들은 자녀를 일본으로 유학보내기도 했지만, 대다수의 유학지는 중국이었다.
특히 일본인들이 중국에서 운영하는 학교가 인기였다. 대표적으로 일본이 중국에 설립한 만주의과대학과 청도의과대학에서 많은 타이완인들이 의학 학위를 취득했다. 타이완에는 총독부가 운영하는 타이베이의학전문학교 단 한 곳만 존재했기 때문이다. 약 120명 가량되는 타이완인들이 만주에서 학위와 의사 면허를 취득했고, 그 중 절반 이상은 만주에서 의사로 일했다고 한다.
타이완 총독부 외사부 관리과장이었던 오타 슈키치(大田修吉)가 발표한 1943년 12월 ‘해외 타이완인 조사(海外に於ける本島同)’ 결과에 따르면, 중국 화남지역에 24,320명, 화중지역에 7,102명, 화북지역에 967명, 만주에 990명 등 총 33,402명의 타이완이 중국에 거주하고 있었다.
여권은 교육과 취업의 기회를 찾아 출국한 기록 외에 첩보 활동의 단서도 제공한다. 특히 중일전쟁 기간 타이완인은 국민정부 및 공산당 정권과 다양한 교류를 가졌는데, 예를 들어, 타이중제1중학교를 졸업한 펑성무(彭盛木, 1902-1942)는 상하이에서 유학하며 중국 국민정부의 첩보 조직에 합류해 일본 관련 정보를 국민정부 군사 통계국에 전달하는 첩보원으로 활동했다. 군통국의 지시에 따라 왕징웨이(汪精衛) 정권에 잠입해 통역 겸 비서로 활동하며 첩보 임무를 수행하던 그는, 일본 정부에 발각되어 체포되었고, 1942년 감옥에서 처형되었다. 총독부가 갖고 있는 여권 기록을 통해 펑성무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중국을 동행했던 그의 아내와 아들의 이름도 확인이 가능하다.
물론, 여권을 사용해 세계 여행을 즐긴 타이완인들도 있다. 지난 대만주간신보 시간에서도 소개한 바 있는 일제시기 타이완 대표 지식인이자 정치인이었던 린셴탕(林獻堂)의 370일의 세계 일주 외에도 기업가 옌궈녠(顏國年)의 유럽과 미국 여행, 의사 두충밍의(杜聰明) 해외 여행 등이 그 예이다. 이들의 장기간 해외 여행이 1회 사용에 제한되는 ‘보통여권’을 통해 해결될 수는 없었다. 출발 전에 방문할 장소를 명확히 작성해야 했고, 타국을 경유할 대는 비자도 발급받아야 했다.
일제시기 여권 제도는 편리한 점이 많았지만 허점도 없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여권에 자신의 목적지를 샤먼(廈門)이라 적어놓고 실제로는 푸저우(福州)나 난징(南京)으로 가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를 제재할 방법은 없었던 것이다.
1908년 이후, 타이완인이 일본으로 가는 데에는 더 이상 여권을 신청할 필요가 없어졌다. 타이완과 일본 사이에는 몇 번이고 제한없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된 것이다. 이를 이용해 어떤 타이완 사람들은 타이완에서 여권 신청하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먼저 일본으로 간 뒤 중국으로 이동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많은 항일 인사들이 중국으로 건너갔다고 알려져있지만, 총독부가 기록하는 여권하부표에는 이들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이다.
중국 외에 타이완인들이 자주 가는 해외로는 남양(南洋), 즉 동남아시아도 있었다. 사업을 하는 타이완인들은 남양 지역으로 진출해 자신의 사업을 확장하고자 했는데, 특히 1916년경, 많은 타이완인이 상업, 사업 활동을 위해 남양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특히 당시 영국과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보르네오 섬으로의 이주가 적지 않았는데, 타이완인은 일본의 지원과 화교 네트워크에 의존해 자신의 생계를 꾸려나갔다. 1917년경에는 약 천 명의 타이완인이 일본인이 운영하던 북보르네오 고무 농장에서 일하기도 했다고 한다.
중앙연구원 타이완사연구소에는 일제시기 여권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해 데이터베이스화 해놓았다. 현재 등록된 자료만 약 20만 건이 넘는다고 한다. 일제시기 사료를 기반으로 한 데이터베이스에 특정인의 이름을 입력하면 그 사람이 출국을 신청한 이유, 목적지 등을 상세히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許雪姬,2004,〈日治時期臺灣人的海外活動—在「滿洲」的臺灣醫生〉,《臺灣史研究》,11卷2期,頁1-75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Rti 중앙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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