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
타이완의 소리 RTI공식 앱 내려받기
열기
:::

타이베이 출신 작곡가 장원예(江文也) 이야기 2: ‘중국’을 주제로 한 작품

  • 2024.11.25
대만주간신보
1930년대 타이완 출신 작곡가 장원예의 모습. - 사진: 위키피디아

1910년 타이베이에서 태어난 후 어린나이에 샤먼(廈門)을 거쳐 일본 나가노현으로 건너가 중등학교를 다니다 도쿄를 주무대로 성악가로 활동하기 시작, 이후에는 작곡가로 승승장구하다 1983년 중국 베이징에서 사망한 장원예(江文也, 1910-1983). 타이베이, 샤먼, 나가노, 도쿄, 베이징 까지… 20세기, 한 세기 동안 작곡가 장원예는 동아시아를 횡단했습니다. 그리고 그 여정에서 그가 경험하고 느낀 것들을 오선보에 꾹꾹 눌러담아 만인에게 음악으로 들려주었습니다. 

‘일본 국적'으로 태어나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으로 사망하기까지, 20세기 동아시아 내 각종 전쟁과 치열한 이념적 갈등 속에서 일본에서도 중국에서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작곡가 장원예를 다시 주목합니다. 오늘 <대만주간신보> 시간에서는 지난 주에 이어 20세기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타이베이 출신 작곡가 장원예, 그가 1930-1940년대 일본 제국을 무대로 타이완, 일본, 중국을 횡단하며 작곡가로서 명성을 떨치던 시기에 대한 두 번째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주목할 주제는 장원예가 ‘중국’을 주제로 창작한 작품입니다. 지난 주에는 그의 고향 ‘타이완’을 주제로 한 작품을 소개해드렸다면, 이번 주에는 장원예의 인생 후반기 동안 머문 그의 제2의 고향이자, 그가 생을 마감한 중국이 그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이야기해보겠습니다. 

-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8년, 장원예는 당시 일본의 통제하에 있던 베이징의 베이징사범학교 음악 예술 교수로 임명되었고, 일본 정부는 그를 양국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귀중한 도구로 여겼습니다. 그렇게 장원예는 자신이 일하던 베이징과 가족이 거주하는 도쿄를 오가며 몇 년을 생활했고, 공교롭게도 전쟁 기간 동안 그는 일본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작곡가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일본 국적’을 박탈당하면서 장원예는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의 작곡가가 되었고 그의 이름은 곧 일본 음악계에서 사라졌죠. 게다가 공산당 치하에서는 ‘부르주아’라고 간주되면서 온전한 창작 활동은 물론 생사를 왔다갔다 해야 할 정도로 위험에 처한 그였고, 무려 30여 년이 지난 1978년이 되어서야 끝내 명예가 회복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무렵 장원예는 병에 걸렸고, 결국 1983년 베이징에서 사망하고 말았는데요. 

중일전쟁 시기인 1930년대말부터 1940년대 초, 그는 ‘중국’과 관련한 수 많은 창작품을 남겼습니다. 본격적으로 중국에서 거주하기 전부터 장원예는 ‘중국’에 대한 상상을 자신의 중요한 창작의 원천으로 여겼죠. 이를테면, 1939년 완성한 6악장의 관현악곡 <공묘대성악장(孔廟大晟樂章)>, 1943년 발표한 <일우동광(一宇同光, Symphonia Lucis Universalis Op.42)>, 무용극인 <향비전(香妃傳)>, 중국의 민가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한 합창곡과 당나라와 송나라 고시와 백화시문을 원천 삼아 창작한 독창곡까지… 

장원예를 연구한 다수의 연구자들은 ‘중국’을 소재로 작품을 끊임없이 발표하던 바로 이때를  장원예가 작곡가로서 가장 왕성하게 꽃을 피운 시기라고 말합니다. 그는 1938년 이미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음악과 교수로 재직했고, 중국에서는 교직활동과 창작을 이어나가고, 일본에서는 자신의 창작품을 발표하고 출판하는 생활을 했죠. 1943년 자신과 같이 타이완에서 일본으로 유학을 온 제자, 궈즈위안(郭志苑, 1921-2013)의 ‘왜 하필 베이징이냐’라는 질문에 장원예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중국 문화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베이징에 갔다. 베이징은 동양의 파리이다.” “중국은 나의 창작을 자극한다. 그리고 작품은 일본 도쿄에서 발표할 수 있다.”

타이완 출신에 어릴 적 부터 일본으로 유학 가 일본에서 작곡가로서 자신의 커리어를 다져 온 장원예에게 ‘중국’이란 영감은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되었던 걸까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장원예가 몸담고 있던 1930년대 일본 음악계의 서양 현대음악 조류에 대해 반드시 살피고 넘어가야 합니다. 

1930년대 서양음악, 특히 서양음악을 기반으로 창작의 길을 가고 있던 일본 작곡계에는 ‘민족성(national identity)’이 화두였습니다. 지난 주 장원예 이야기 첫 번째 시간에서 잠시 언급했던 러시아 작곡가, 알렉산더 체레프닌도 바로 ‘민족성’이란 창작 방식을 매개로 장원예와 인연을 맺게 되죠. 장원예의 멘토였던 체레프닌은 음악은 민족성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고, 유라시아, 특히 ‘동방’/’동양’ 음악의 가능성을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러시아 출신인 그가 1930-40년대 일본과 중국에서 주로 활동했던 까닭도 여기에 있죠. 1934년 일본에 온 체레프닌이 일본 음악계에 던진 메시지의 울림은 상당했습니다. 같은 해 6월 일본에서는 ‘근대일본작곡가연맹’이 창설되어 당시 활동하던 작곡가들이 자신들의 창작과 음악 사조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기 시작했고, 그해 11월 체레프닌은 세계 음악의 중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일본의 각 지역에서 음악적 영감을 찾으라고 일본 작곡가들에게 권유합니다. 그리고 장원예가 자신의 고향, 타이완을 주제로 작품을 써 데뷔작, <타이완무곡>(台灣舞曲)을 발표한 시기가 공교롭게 1934년 입니다.    

1930년대 일본 음악계에서 장원예는 상당히 독창적인 인물로 활약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로 그의 출신지와 민족 정체성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근대일본작곡가연맹’에서 일명 ‘민족악파’라고 불린 일본 작곡가 기요세 야스지(清瀨保二, 1900-1981)는 이 시기 장원예가 창작한 두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합니다. 장원예가 쓴 <3개의 소품>(三首小品)은 “완연히 중국적이지, 일본적이지 않다.” 반면, <작은소묘>(小素描)는 “지극히 일본적이어서 개인적으로 그런 취향을 좋아하지 않지만, 이 작품은 그의 최초의 피아노 작품이자 성공작이라는 점에서 기념할 만하다.” 여기서 기요세 야스지가 언급한 ‘중국식’, ‘일본식’에 주목해봅니다. 그는 장원예가 일본보다는 중국적인 색채를 풍기는 것이 더욱 적합하다고 여긴 것입니다. 즉, 일본 작곡가들과 출신이 다른 장원예는 그의 작품에서 중국적인 색채를 드러낼 때 더욱 부각되고 주목받을 수 있다고 평가한 것입니다. 마치 현재 미국 사회에서 백인 혹은 흑인보다 비교적 소수민족에 속한 아시아인의 서사가 여러 예술 방면에서 부각되고 있듯이 말이죠. 

중국과의 혈연이 있는 장원예 본인도 자신이 작품에서 중국이라는 민족성을 띄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고, 결국 그 길을 택하게 됩니다. 음악 공부를 위해 유럽으로 유학을 다녀 온 일본 작곡가들이 오히려 자신의 출신지, 즉 로컬(local)에서 예로부터 불린 민요나 전통음악에 귀를 기울였다면, 장원예는 일본에서 유학하면서 자신의 출신지 타이완과 혈연과 연계된 중국의 음악을 재탐색하기 시작했습니다. 

1934년 고향 타이완으로 돌아온 장원예는 "고대 아시아의 깊은 지혜가 내 영혼에서 깨어날지도 모른다"고 언급했을 만큼, 그에게 ‘아시아’, ‘동양’은 서양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이미 분명하게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9년 뒤인 1943년 그는 자신의 제자, 궈즈위안(郭志苑)에게도 "서양예술문화는 이미 벽에 부딪혔고, 많은 예술가들이 서양의 합리주의를 떠나 동양의 비합리적인 세계를 추구하기 시작했다.”며 앞으로는 동양의 세계가 미래에 사람들이 추구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는 그렇게 한발 앞서 나갔습니다.

장원예에게 ‘동양’의 세계를 포괄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자신만의 구체적이고 독창적인 음악언어는 ‘중국’을 소환하는 것이었습니다. 중국이 자신의 민족성과 직결된다는 점도 있었고, 일본을 담아내기에 일본은 그에게 이미 너무나 익숙해 신비로운 색채가 부족했죠. 1936년 처음으로 중국 베이징을 방문해 경극을 관람했고, 같은 해 9월 일본의 한 음악잡지에 ‘베이징에서 상하이까지’라는 글을 발표해 베이징과 상하이를 처음 방문한 소감을 밝혔습니다. 이 글에서 장원예는 원래 비엔나를 방문할 예정이었으나, 자신에게는 동양의 것들이 더욱 중요해졌다며 노선을 틀었다고 고백했죠. 

그가 서서히 중국과 중국 전통음악을 직접 체득하기 시작할 무렵, 공교롭게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베이징은 곧 일본의 통제를 받게 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장원예는 1938년 베이징에 소재한 한 사범대의 음악과 교수로 취임하면서 중국에서 교학과 창작을, 일본에서 작품 발표와 출판을 하는 생활을 1945년 일본의 패전 전까지 이어갔습니다.

 

  ►참고문헌

     周婉窈,  <想像的民族風──試論江文也文字作品中的臺灣與中國> 《臺大歷史學報》第 35 期  2005 年 6 月,頁 127~180. 

     趙靜瑜, <星星總會自己閃耀 江文也的《台灣舞曲》>, 中央社, 2023/10/09.

 

원고/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녹음/손전홍
 

프로그램 진행자

관련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