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타이베이에서 태어난 후 어린나이에 샤먼(廈門)을 거쳐 일본 나가노현으로 건너가 중등학교를 다니다 도쿄를 주무대로 성악가로 활동하기 시작, 이후에는 작곡가로 승승장구하다 2차세계대전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1983년 중국 베이징에서 사망한 장원예(江文也, 1910-1983). 타이베이, 샤먼, 나가노, 도쿄, 베이징 까지… 20세기, 한 세기 동안 작곡가 장원예는 동아시아를 횡단했습니다. 그리고 그 여정에서 그가 경험하고 느낀 것들을 오선보에 꾹꾹 눌러담아 만인에게 음악으로 들려주었습니다.
‘일본 국적'으로 태어나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으로 사망한 타이베이 출신 작곡가 장원예
1910년 일본 식민지였던 타이완에서 푸젠성 하카계 출신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장원예는 ‘일본 국적'이었습니다. 중등학교를 다니기 위해 일본 나가노현의 작은 마을 우에다로 진학한 이후, 전기공학 전공으로 도쿄공과대학(현 무사시공과대학)에 진학하죠. 음악과는 무관한 길을 가는 것 같은 그는 동시에 도쿄음악학교의 야간 수업에 참석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가장 먼저 가수로 활동하죠. 합창단 지도자에게 발탁되어 1932년 컬럼비아 레코드 컴퍼니의 바리톤 가수로 활동하다 몇 년 후 일본 최고의 오페라 가수 중 한 명인 후지와라 요시에(藤原義江)가 이끄는 오페라단의 단원이 됩니다. 이듬해인 1933년 한 일본인 여성과 결혼하던 무렵, 장원예는 당시 일본의 저명한 작곡가 야마다 코사쿠(山田耕筰, 1886-1965)와 하시모토 쿠니히코(橋本國彦, 1904-1949) 밑에서 작곡을 공부하기 시작하죠.
작곡가로서의 그의 인생은 이때부터였습니다. 일본 국내에서 작곡가 상을 받는 것은 물론 1936년 베를린 하계 올림픽 예술 경연 대회에 출품한 관현악 작품 ‘타이완 무곡(Formosan Dance)’이 상을 받는 명예를 얻었는데요. 당시 중국과 일본을 방문하던 러시아 작곡가 알렉산더 체레프닌(Alexander Nikolayevich Tcherepnin, 1899-1977)은 장원예의 재능을 인정하고는 유럽, 미국, 중국에서 그의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죠.
그러다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8년, 장원예는 당시 일본의 통제하에 있던 베이징의 베이징사범학교 음악 예술 교수로 임명되었고, 일본 정부는 그를 양국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귀중한 도구로 여겼습니다. 그렇게 장원예는 자신이 일하던 베이징과 가족이 거주하는 도쿄를 오가며 몇 년을 생활했고, 공교롭게도 전쟁 기간 동안 그는 일본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작곡가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일본 국적’을 박탈당하면서 장원예는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의 작곡가가 되었고 그의 이름은 곧 일본 음악계에서 사라졌죠. 공산당 치하에서는 ‘부르주아’라고 간주되면서 온전한 창작 활동은 물론 생사를 왔다갔다 해야 할 정도로 위험에 처한 그였고, 무려 30여 년이 지난 1978년이 되어서야 명예가 끝내 회복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무렵 장원예는 병에 걸렸고, 결국 1983년 베이징에서 사망하고 말았는데요.
‘일본 국적'으로 태어나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으로 사망하기까지, 20세기 동아시아 내 각종 전쟁과 치열한 이념적 갈등 속에서 일본에서도 중국에서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작곡가 장원예를 타이완에서 다시 주목합니다. 2000년대 들어, 작곡가 장원예에 대한 다수의 연구물이 출판되기 시작한 것은 물론 작년 2023년은 장원예 서거 40주년이 되는 해로, 타이완에서는 타이베이 출신 작곡가로서 그가 남긴 작품과 인생을 다시 돌아보는 각종 행사가 열렸습니다.
오늘과 다음 주 <대만주간신보> 시간에는 20세기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타이베이 출신 작곡가 장원예, 그가 1930-1940년대 일본 제국을 무대로 타이완, 일본, 중국을 횡단하며 작곡가로서 명성을 떨치던 시기, 그의 작품을 중심으로 그의 음악 활동에 대해 소개하는 시간 갖도록 하겠습니다.
작품번호 1번, <타이완 무곡>(Formosan Dance, 台灣舞曲, 1934)
‘타이완 무곡(台灣舞曲, たいわんぶきょく, Formosan Dance)’은 장원예가 1934년에 작곡한 춤곡으로, 피아노 버전은 1934년 4월, 관현악 버전은 같은 해 8월 완성되었습니다. 이 작품이 특별한 이유는 ‘타이완 무곡’의 관현악 버전이 1936년 베를린에서 열린 제11회 하계 올림픽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특별상을 수상했기 때문인데요. 놀랍게도 이 작품은 장원예의 첫 번째 관현악 작품입니다.
‘코 분야(Koh Bunya)’라는 일본명으로 도쿄에 체류하던 24살의 장원예는 자신의 고향인 타이완과 관련된 소재를 찾다가, 타이완 원주민의 민요를 소재로 한 작품을 쓰기로 결심합니다.
밝고 명랑하게 시작하는 이 작품은 2관 편성의 목관악기와 금관악기가 주로 멜로디를 이끌어가고, 현악기는 한 음을 길게 연주하거나 현을 튀기는 등 반주의 역할로 관악기의 멜로디를 뒷받침하는 용도로 사용됩니다. 17-18세기 유럽 클래식 음악계에서 탄탄하게 쌓아온 ‘기능화성’의 논리와 규칙 대신 타이완 원주민 민요에서 드러나는 독특한 선율 진행을 따라 새롭게 화성을 쌓아올린 진행을 보이면서 화성학적 측면에서는 꽤나 아방가르드에 속하는 소리를 펼쳐냅니다.
1912년 스웨덴 스톡홀롬에서 열린 올림픽에서 처음 개최한 ‘예술 문화 경기'가 7회째로 접어든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바로 그해 작곡가 장원예는 이 작품으로 베를린 올림픽 예술 문화 경기 작곡 부문에서 일본을 대표한 5개 출품작과 비유럽 국가 대표 중 유일하게 수상을 거머쥐는 영예를 얻었습니다.
1930년대 당시 일본 음악계를 주도하던 작곡가들의 후기낭만 스타일과는 전혀 다른 질감의 소리를 만들어낸 식민지 타이완 장원예의 작품이 국제 무대에서 상을 타자 일본 언론에서는 그에게 일제히 주목했고, <타이완 무곡>은 후에 지휘자 스토코프스키의 지휘로 음반으로 녹음되는 것은 물론, 관현악 총보 역시 일본어, 독일어, 영어, 프랑스어 버전으로 출판되었습니다.
“나는 여기에서 지극히 장엄한 누각을 보았다
나는 여기에서 매우 화려한 전당을 보았다.
깊은 숲으로 둘러싸인 연예장과 선조의 사당(祖廟)을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이제 다 사라져 버렸다.
이미 영이 되어 아득히 먼 우주로 녹아들어,
신과 인자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이들은 어둠 속에서 작은 알갱이처럼 떠 다닌다.
아! 나는 이 물 빠진 바닷가에 남아있는 물거품 두 세 조각을 보았다.”
(장원예가 <타이완 무곡> 악보에 손수 남긴 글)
작품번호 6번, 성악곡 <생번의 네 가지 노래>(生番四歌曲, 1936)
자신의 고향, 타이완을 주제로 한 장원예의 작품 중에는 1934년에 작곡한 그의 첫 관현악 작품 <타이완 무곡>과 함께 2년 뒤인 1936년에 작곡한 성악곡, <생번의 네 가지 노래(生番四歌曲)>도 있습니다. ‘제수의 잔치(祭首之宴)’, ‘연모의 노래(戀慕之歌)’, ‘들녘에(原野上)’, ‘자장가(搖籃曲)’ 이렇게 네 곡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1936년 초여름, 처음 베이징으로 향하는 여객선에서 무반주 독창회를 개최해 ‘제수의 잔치'를 공연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베이징에 도착한 날 밤, 장원예를 후원하던 러시아 작곡가, 알렉산더 체레프닌이 피아노 반주를 맡아 공연하면서 더욱 화제가 되었고, 결국 1937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도 공연되었습니다.
이처럼 ‘타이완' 특히 ‘타이완 원주민'은 1930년대 일본에서 활동하는 작곡가로서 전성기를 누리던 장원예가 좋아하던 주제이자, 실제로 그에게 큰 영광을 가져다 준 주제였습니다. 전쟁으로 그가 일본에서 중화인민공화국으로 국적을 바꾼 후 1946년부터 1965년 사이에도 타이완 민요에 기초한 작품을 100곡 가량 이상 작곡했고요. 그리고 베이징에서 생사를 다투던 그의 말년, 장원예는 또 다시 타이완과 관련된 주제를 가져옵니다. 미완성으로 남은 다섯 악장의 관현악 작품 <아리산의 노래(阿里山之歌)>가 그것입니다.

장원예가 작곡한 <아리산의 노래>(阿里山的歌聲) 수기 악보. - 사진: 중앙연구원 개방박물관
►참고문헌
周婉窈, <想像的民族風──試論江文也文字作品中的臺灣與中國> 《臺大歷史學報》第 35 期 2005 年 6 月,頁 127~180.
趙靜瑜, <星星總會自己閃耀 江文也的《台灣舞曲》>, 中央社, 2023/10/09.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Rti 중앙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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