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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타이완을 방문한 두 명의 조선인, 조명하와 김부귀

  • 2024.05.07
대만주간신보
일제강점기 한국을 대표하는 장신 김부귀(金富貴). - 사진: 戦前古写真アルバム

타이완과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를 겪었다는 점에서 공통된 역사를 갖고 있지요. 청일전쟁이 끝난 직후인 1895 타이완이 일본에 할양되고, 1910년 조선 왕조가 일본에 합병되면서 두 곳 모두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지만, 막상 타이완과 한국, 한국과 타이완 사이에 빈번한 왕래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 중 하나가 제가 대만주간신보 첫 시간에 소개해드린 최승희의 타이완 전국 일주 공연(2023.01.03. 다시듣기)과 1933년 세 타이완 지식인의 조선 방문(2023.01.10. 다시듣기)가 대표적인데요.

타이완에 거주했던 한국인은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0년대까지 2천 명이 채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타이베이, 이란, 지룽 등 타이완 북부에 거주하고 있었던 한국인 중 남성은 대부분 선원이나 어부로 종사하고 있었고, 여성은 절반 이상이 창녀나 기생으로 일했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타이완 영화 <비정성시>를 보면 당시 지우펀(九分)에 ‘조선루(朝鮮樓)’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듯이, 일제시대 타이완의 지룽, 아리산, 자이 등에는 모두 ‘조선루’라고 해서 한국인 여자가 한국식으로 접대를 하는 가게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타이완과 한국 간의 교류가 빈번치는 않았던 당시, 오늘 대만주간신보에서는 타이완을 방문한 두 한국인 청년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이 둘은 어부도 선원도, 창녀도 아니었죠. 한국 출신의 두 청년은 과연 어떤 일로 타이완을 방문했던 것일까요? 

일제강점기하면 한국인들은 흔히 독립운동을 떠올리곤 합니다. 타이완의 일제시기를 연구하고 그와 관련된 글쓰기를 하는 한 타이완 기자는 “조선의 강렬한 항일운동은 타이완의 항일과 성격 매우 다르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는데요. 1906년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으로 파견된지 3년 만에 독립운동가 안중근에게 암살 당했고, 1932년에는 이봉창이, 같은 해 상하이에서는 윤봉길이 일본 천황의 생일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기미가요’를 부르는 찰나에 폭탄을 던져 일본 군인에 부상을 입히기도 했죠. 한국인에게 독립운동은 정말이지 생사를 다투는 치열한 투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러한 조선 독립운동가들의 일련의 중대한 암살 행위가 바로 타이완에서도 일어났습니다.

24살의 나이에 타이완에서 숨을 거둔 독립운동가, 조명하

쇼와 3년인 1928년 4월 말, 만 27세가 된 히로히토 일본 천황은 55세의 그의 장인이자 육군 대장인 구니노미야 구니요시 왕과 함께 타이완으로 와 5월 내내 타이완 각지를 순시하였습니다. 

5월 14일 아침, 타이중 순시를 마치고 타이베이로 돌아가려는 구니노미야 구니요시 왕은 9시 50분즘 타이중 주립 도서관 앞 큰 길을 지나고 있었는데요. 타이중 시내 거리는 환송 인파로 붐비고 있었고, 그 중에는 일본 상점의 한 고용인 행세를 한 한 젊은 남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조선 황해도 출신의 다방 직원, 조명하(趙明河)입니다. 

조명하는 구니노미야 구니요시 왕의 차 뒤로 돌진해 오른손에 쥐고 있던 독이 묻은 칼을 앞으로 내밀었습니다. 지금처럼 방탄차가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 오픈카의 뒷 자석에 앉아 있던 구니노미야 구니요시 왕은 상당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으나, 운전사가 반사적으로 핸들을 왼쪽으로 돌리는 바람에, 조명하가 던진 칼은 왕 대신 뜻하지 않게 운전자의 왼쪽 등에 꽂히고 말았죠. 조명하는 이후 차량의 왼편으로 도주했으나, 타이완인 경찰 정여우디(鄭有弟)와 차이푸산(蔡福三)으로부터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환한 아침 거리 한복판에서 일본 친왕을 암살하려는 시도는 이렇게 몇 초 사이에 막을 내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타이완인 경찰 정여우디(鄭有弟)와 차이푸산(蔡福三) - 사진: 台中文化e托邦

그 후 타이완에서는 한 달 동안 암살을 시도한 조명하에 대한 사건이 뉴스에 한 글자도 오르내리지 않았습니다. 구니요시 왕은 타이완에서의 스케줄을 계속 단행했고, 심지어 단수이(淡水)에서 골프를 치기도 했죠. 

암살 시도가 있은지 한 달 만인 6월 14일, 오후 3시가 되어서야 일본 정부 측은 ‘타이중 불상 사건(臺中不祥事件)’이라고 칭하며, 당시 조명하의 암살 시도 사건을 대외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날, 가이야마 만노신(上山滿之進) 당시 총독은 사임했고, 후임인 가와무라 다케하루 총독으로 대체되었습니다. 

7월 18일, 사형 선고를 받은 조명하는 타이베이 교수대에 올랐고, 10월 10일 총살형으로 사형되면서  24의 나이에 그는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1905년 황해도에서 태어난 청년 조명하는 어린 나이에 타지인 타이완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장기는 타이베이  리우장리(六張犁)에 묻히었죠. 

타이완에 오기 2년 전인 1926년 조명하는 일본으로 건너가 학업을 이어가던 학생이었으나, 그와 같은 황해도 출신의 독립운동가인 안중근, 김구 등이 그를 독립운동의 길로 나아가도록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그렇게 오사카의 야간학교를 다니며 일과 공부를 병행하던 그는 상하이에 소재한 임시정부로 가기 위한 중간 기착지로 1927년 말 타이완에 들린 것이었지요. 

그렇게 타이완 타이중에서 일하던 청년 조명하는 히로히토 천황의 장인인 구니노미야 구니요시가 타이완에 온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를 척살하기로 결심한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광복 후 그의 유골은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송환되었습니다. 그리고 암살 사건이 있었던 타이중에는 그의 동상이 있습니다. 

235cm 장신의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김부귀!

타이완에 등장한 역대 최장신의 인물하면 누구일 것 같은가요? 중국의 농구 스타 야오밍(姚明)? 아니면 저 멀리 미국이나 서양에서 온 백인? 바로 1930년대에 타이완에 온 한국인, 김부귀(金富貴) 씨입니다!

1934년 11월, ‘세계의 거인 동양 제일의 김부귀’라고 써있는 명함을 들고 김부귀는 타이완 지룽 항구에 도착합니다. 타이베이 기차역에 도착하자, 그를 찍으려는 기자들과 주변 인파로 성황을 이루었는데요. 타이완의 보통 성인 남자가 거의 옆으로 다가가자 그 키가 김부귀 씨의 명치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김부귀는 당시 235cm로, 장신으로 유명한 중국의 농구 스타 야오밍보다도 6~7cm가 더 큽니다. 전남 구례군 출신의 김부귀 씨는 180cm인 아버지와 150cm 밖에 되지 않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일곱 형제 중 막내인 그는 유독 키가 컸습니다. 

타이베이 시먼에 소재한 타이완일일신보사에서 키가 커서 무엇이 가장 고민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김부귀는 화장실이 너무 작아서 한 번 들어가면 움직이기가 힘들다고 답했고, 잠자는 이불도 남들에 비해 두 배 정도 커야 겨우 들어간다고 답해 재미를 선사하기도 했습니다. 이미 결혼한 김부귀의 아내는 159cm 밖에 되지 않았죠. 

당시 타이완의 각종 신문은 김부귀를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사람이라며 ‘세계 3대 거인’이라고 대서 특필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타이완인을 포함해 타이완을 방문한, 혹은 타이완 땅을 밟은 적 있는 사람 중 가장 키가 큰 사람이며, 그 기록은 현재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프로그램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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