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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기 아편 옹호자?! 롄헝(連橫)

  • 2024.01.02
대만주간신보
일제시기 타이완 역사학자 롄헝(連橫, 1878-1936) - 사진: 위키피디아

일제시기 타이완에서 아편의 유익함을 주창하며 아편을 옹호했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바로 롄헝(連橫, 1878-1936). 그는 아편의 유익함을 주장한  <아편 특허문제>(阿片特許問題)라는 글을 써 1930년 3월 주요 일간지인 <대만일일신보>에 발표했습니다. 지금으로 따지자면 마약과도 같은 아편을 지지한다니요? 이게 무슨 상황일까요? 

식민정부의 아편정책

일찍이 청나라 시대부터 타이완에서는 아편 흡연이 성행했습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 대표는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청나라 리홍장(李鴻章)에게 “타이완의 아편을 피우는 폐습을 반드시 해결할 것”이라고 다짐하기까지 했었죠. 

일본 식민 정부는 타이완 통치 초기부터 아편 금지를 선언합니다. 타이완 총독부 초대 총독 가바야마 스케노리(樺山資紀)는 1895년 취임하자마자 아편 금지를 선언하고 형벌령을 내렸지만, 이내 강한 저항에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결국 엄금 대신 점차적으로 금지하는 점금(漸禁)을 택한 총독부는 “오랫동안 아편에 중독된 현지인들에게 즉각적인 아편 금지는 오히려 생명을 위협할 우려가 있다”며 온건적인 방식을 택하죠. 이른바 점진적 금지는 아편을 공식적으로 독점 판매하고 유통하는 경로를 정부에 신청해야 하며 이에 따른 면허 수수료와 매년 면허세까지 부과해야 함을 의미했습니다. 그렇게 총독부는 1898년 ‘타이완 아편령’을 공포했고, 그 규정은 매우 상세했습니다. 

“아편을 구매하고 싶을 경우 면허를 지참해야 한다. 계약자는 1급 또는 3급 아편은 서로 혼합하거나 다른 물질을 혼합해서도 안된다. 판매자는 수첩을 작성해 구매 수량과 매일 판매된 아편의 종류, 수량 등을 등록해야 한다.”

총독부의 ‘타이완 아편령’으로 아편을 섭취하는 인구는 확실히 감소하기 시작했습니다. 1900년 16만명으로 전체 타이완 인구의 6%에 달했던 아편 인구는 30년이 지난 1930년 약 16,000명으로 전체 인구의 0.3%로 급감했죠. 

그러나 식민 정부가 아편을 완전히 금지하는 방식이 아닌 점금제를 선택한 이유는 단순히 아편 인구의 감소뿐만 아니라 아편 시장을 일본 정부가 독점하고 하고자 하는 ‘전매제’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흥미롭게도 식민 통치 초기인 1898년 타이완 총독부의 한 해 수입 중 절반 이상이 아편 전매의 이익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타이완의 재정 상태는 일본에서 총독부에 보내준 보조금 없이는 자립이 불가능한 상태였죠. 그렇게 10년이 채 되지 않은 1904년 타이완의 재정은 일본 중앙 정부의 보조금 없이도 독립가능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바로 아편 독점 판매를 통해서 였습니다.  

이른바 아편 전매제와 점금제는 일본 정부의 식민 통치 기간 내내 수십 년 간 지속되었습니다. 1925년 일본은 국제 사회의 흐름에 맞춰 ‘국제 아편 협약’에 서명, 아편 판매 금지를 결의했지만 총독부는 그 뒤로 뒷문을 열어두었고, 이에 분노한 타이완 지식인은 유엔의 전신인 국제연맹에 일본 식민정부를 고발하기도 했죠. 

많은 타이완의 지식인들이 식민 정부의 교묘한 아편정책에 대해 크게 분노하고 있을 무렵, 타이난 출신의 시인이자 역사학자인 롄헝(連橫)이 시대를 역행하는 주장을 내놓았습니다. 바로 1930년에 발표한 ‘아편 특허문제’입니다. 롄헝은 피식민자인 타이완인을 위한 변호라면서 아편의 유익론을 제기했습니다.  

롄헝은 일찍이 1920년에 <대만통사>(台灣通史)라는 역사책을 서술한 적이 있습니다. 롄허는 어렸을적부터 ‘타이완 사람이니 타이완 일을 모르면 안 된다’는 아버지의 가르침으로 인해 10년 간 공을 드려 대만통사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국립 대만대학 역사과 교수 우미차(吳密察)는 롄헝의 <대만통사>에 대해  “만약 사실 오류 여부만 놓고 보면, 모든 페이지 마다 오류가 있습니다. (...) 그러나 문제는 그 책은 발아를 상징하는 것으로 타이완이 하나의 책을 서술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증서로가 아닌 사상서로서 이 책을 봐야 합니다”라고 평했을 만큼 <대만통사>는 일제시기 타이완인이 주체적으로 역사를 써내려갔다는 데 큰 의의가 있는 책이죠. 

그랬던 롄헝은 아편을 옹호하는 ‘아편 특허문제’라는 글을 쓰면서 린셴탕과 같은 당시 타이완 지식인계로부터 온갖 쓴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가 속해 있었던 타이완 고전시 모임인 ‘역사(櫟社)’에서도 단체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며 쫓겨났죠.  

‘아편 특허문제’에서 롄헝은 세계적으로 아편의 생산량이 이렇게나 많고 소비 인구가 많은 것에 비해 타이완인의 아편 섭취량은 ‘100% 미만이라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궤변을 늘어놓았습니다. 게다가 아편이 타이완에 도입된지 오래되었고, 아직 개발되지 않은 곳의 주민들은 걸핏하면 난기류에 중독되므로 아편을 피우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타이완의 풍토와 기후로 인해 주민들은 아편을 피워야만 한다는 대담한 가설을 내세웠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타이완인들이 대륙에서 타이완 섬으로 이민 와 열심히 개간한 탓에 아편을 피우는 것은 문제되지 않으며 오히려 아편을 피우는 것은 이 땅을 열심히 개간한 노력의 결과, 심지어 타이완이 현재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선주민들이 아편을 피웠기 때문이라는  놀라운 결론으로 귀결됩니다.

롄헝의 이러한 주장은 기발한 논조를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 상충되는 논점을 건드렸습니다. 식민 정부의 아편 정책으로 인해 아편 인구는 확실히 감소하고 있었고, 일본 식민 정부의 전매제로 인한 세금 수입은 증가했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일본 내에서는 아편을 철저히 금지했지만, 타이완에서는 ‘점금제’를 벌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죠. 식민 정부 입장에서는 아편 인구가 감소하면서 동시에 돈은 많이 벌 수 있으니 이 정책을 유지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는데요. 

과연 롄헝은 왜 이런 주장을 했던 것일까요? 이후 롄헝의 외손녀인 린원위에(林文月)는 자신이 국립대만대학교 교수로 재임했던 시절, 자신의 외할아버지는 그의 이름을 다른 사람에게 사칭당한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누군가가 롄헝의 이름을 도용해 그의 이름으로 신문에 글을 실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 글을 사칭한 사람의 이름은 구체적으로 밝힐 수 없지만, 꽤 실마리가 있다”며 “아마도 롄헝의 아들이 린셴탕이 주관하는 언론사 <대만민보>(台灣民報)에 취직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을 것”이라고 인터뷰한 바 있습니다. 그녀는 롄헝이 이전에 아편 금지에 찬성한 적이 있으며, 자신의 이름이 도용당했음에도 아들의 앞길을 방해할까봐 화를 참을 수 밖에 없었다고 설명합니다. 

아들의 <대만민보> 취업도 물거품되자 롄헝은 결국 1931년 아들을 데리고 타이완을 떠나 중국 상하이로 갔습니다. ‘아편 특허문제’가 발표된지 1년도 채 되지 않아서 타이완을 떠난 것입니다. 그는 “타이완에는 희망이 없고, 타이완 젊은이들은 더 희망이 없다”며 대차게 자신의 고향인 타이완을 떠났지만, 이후 그의 아들은 중국 상하이에서 공부하다 국민정부가 타이완을 인수하는 일에 동참, 타이베이 도시를 건설하는 직을 맡고 타이완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이후 롄헝의 거취나 행보는 차치하더라도 1930년 롄헝의 이름으로 쓰인  “아편 특허문제”라는 글과 이 글을 둘러싼 사건들을 통해 우리는 아편 문제가 일제시기 내내 타이완 사회에서 얼마나 논쟁적인 뜨거운 감자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프로그램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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