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흘 뒤면 중화민국 타이완의 제16대 총통 선거가 전국에서 열립니다. 세 후보자 지지도 여론조사 결과는 더 이상 공개될 수 없는 상황에서 누가 총통이 될지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데요. 총통 부총통 선거와 동시에 타이완의 국회의원인 입법위원의 선거도 있죠. 12월 28일 세 후보자의 세 차례 정견 발표회가 끝난 다음 날 발표된 여론조사에서는 집권 민진당의 라이칭더 후보가 제1야당 국민당의 허우유이 후보와 제2야당 민중당의 커원저 후보를 앞서 유력한 당선 후보로 예상되었는데요. 한편 입법위원 여론조사에서는 현재 집권당인 민진당 보다 제1야당인 국민당의 의석 수가 많을 것으로 예상되면서 거대 양당 간의 팽팽한 선거전이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총통 부총통 및 입법위원 선거를 나흘 앞두고 있는 오늘 <대만주간신보> 시간에는 타이완의 선거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타이완에서의 첫 선거의 현장으로 청취자분들을 안내하고자 합니다. 때는 일제시기인 1935년 가을입니다.
1935년 11월 22일 타이완에서의 첫 민주 선거가 열렸습니다. 타이완 총독부가 같은 해 4월 공식적으로 지방제도 개혁에 과한 법령을 공포하면서 선거제도를 확립했고, 같은 해 11월 선거를 개최한 것입니다. 이 선거에서 타이완의 지방 시의원과 가장의원이 선출되었습니다.
여기서 ‘가장(街庄)'이란 일제시기인 1920년부터 시행된 타이완의 행정구역 단위 중 하나로, 당시 타이완의 지방행정제도인 주(州), 군(郡), 시(市), 가(街), 장(庄) 중 가장 말단인 가와 장에 해당되는 지역단위 입니다. 시(市) 혹은 현(縣)으로 시작해 구(區), 그 아래로 가(街)나 로(路)로 이어지는 현재의 행정구역 단위와는 상이하죠. 일제시기 타이완은 가장 기초적인 행정자치 단위로 ‘군'을 두었도, 그 아래 가와 장은 군장의 감독 하에 있으며 각 가와 장에서도 장을 두어 그 지역 단위의 행정업무를 위임 처리했습니다. 같은 시기 식민지 조선의 읍면제과 비교한다면 이해가 잘 되시리라 생각됩니다.
1935년 11월 선거 결과, 시의회 투표율은 97%, 가장협의회 투표율은 92.6%로 현재 투표율과 비교하면 상당한 참여를 보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요. 당선 결과를 보면 시의원의 경우 일본인이 51%, 타이완인이 49%였던 반면, 가장협의회에서는 일본인이 8%, 타이완인이 무려 92%나 되었습니다.
일본 식민 정부 하에서 총독부의 수장이나 주 대표를 투표하는 권리는 타이완 사람들에게 없었지만, 적어도 지방의 가장 하위 행정단위인 시와 가, 장의 대표를 선출할 수 있는 투표권을 1935년 타이완 사람들은 행사할 수 있었는데요. 당시 타이완인들은 어떻게 투표권을 획득할 수 있었을까요?
타이완 총독부가 1920년 지방행정 제도를 재편하면서 앞서 설명드렸던 군과 가장제도가 완성되었습니다. 타이완의 행정을 여러 단위로 구분했지만 행정구역 상 가장 말단인 군과 가장 역시 결국은 더 큰 행정단위인 주와 시에 속해있었기 때문에 민의 기관으로서의 기능은 거의 전무하고, 총독부의 통치가 수직적으로 전달되는 자치기관에 불과했죠. 타이완 통치를 시작한지 20여 년이 흐른 시점에서 일본 식민 정부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통치 초기에 설정했던 타이완인의 동화정책이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데다가 타이완의 지식인들을 스스로 정치 단체 등을 결성해 타이완인을 위한 정치를 주장하기 시작했죠. 하지만 타이완 인구가 일본인보다 20배 이상 많은 점을 감안할 때 선거를 실시하는 것이 일본 정부 입장에서는 전혀 유리하지 않았죠. 그렇기 때문에 지방선거를 쟁취하자는 타이완 지식인들의 주장에 대해 일본 정부는 진정성을 보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타이완 최초의 정당인 타이완 민중당이 1927년 결성되었고, 3년 뒤인 1930년에는 타이완지방자치연맹이 결성되었습니다. 타이완의 자치를 염원하는 지식인들이 자신들의 영향력을 결집시키고자 정치 단체를 만들것입니다. 타이완 최초의 정당인 타이완 민중당을 설립한 지도자인 장웨이수이(蔣渭水)는 이란 출신의 의사로, 타이중 출신의 유지 린셴탕(林獻堂)과 함께 민중당은 물론 타이완문화협회 설립에도 기여하는 등 사회운동과 민족문제에 열렬한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한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첫 정당이었던 만큼 일본 식민 정부의 감시가 상당했겠죠. 총독부는 여러 방법을 통해 장웨이수이와 린셴탕의 정당활동을 저지했고, 이들은 끊임없이 당명을 바꾸고 당의 강령을 개정하면서 간간히 당의 생명력을 유지시켜 갔습니다. 그러나 민중당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30년대에 들어서자 일본 내 군국주의가 고조되면서 1931년 일본 경찰은 ‘결사금지명령'을 발표, 즉시 타이완 민중당이 해산되었음을 성명했습니다.
타이완 민중당은 해산되었지만, 린셴탕이 1930년에 세운 타이완지방자치연맹은 계속해서 타이완인의 지방보궐선거를 주장했습니다. 지방행정기관이 자주권과 재정권을 가지며 의결기관으로서 역할을 해야한다며 각종 청원과 연설을 통해 식민 정부는 물론 타이완인들에게도 설파했죠. 총독부는 이들과 타협해 들어갔습니다. 결국 총독부와 지방자치연맹은 지방자치연맹이 그동안 추진해온 의회설치 청원운동은 포기한다는 조건으로 시회 및 가장협의회 선거를 실시한다는 합의를 보았습니다.
선거가 열리기 3개월 전인 1935년 8월, 타이중주에서 발간한 ‘타이중주 시회 및 거리협의원 선거 각서’를 보면 당시 타이완에서 열린 첫 선거에는 여러 제약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민의 대표는 전체 정원의 절반만 해당되며 나머지 절반은 관에서 임명한 사람들로 채워야했고, 투표할 수 있는 사람도 일본 제국의 일원으로 25세 이상, 6개월 이상 타이완에 거주한 남성 중 연 5엔 이상의 세금을 내는 사람만 투표할 수 있도록 제한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당시 식민지 타이완의 전체 인구 400만 명 중 실제 투표에 참여할 수 있는 유권자는 2만8천 명에 불과했던 것이죠. 이러한 제약으로 인해 실제 타이완에서 거주하는 일본인 수는 타이완인에 비해 1/20, 타이중시의 경우 타이완인과 일본인의 비율은 5대 1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투표가 가능한 유권자 수는 일본인이 2천 명, 타이완인은 이에 채 못미치는 1천 8백 명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타이완인에게 전적으로 불리한 제약을 두고 실시된 첫 타이완 선거이지만, 후보자들의 유세 활동은 지금과 유사했다고 합니다. 공개적인 장소에서 연설을 하고, 어떤 후보자는 노래를 만들어 틀었으며, 전단지를 배포해 집집마다 돌리는 등, 제16대 총통 부통총 및 입법위원 선거를 앞둔 지금의 타이완 유세 현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죠. 다만 투표 방식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신분증 확인 후 이미 후보자 이름이 출력된 명단을 받아 후보자 이름 옆 공란에 도장을 찍는 지금의 투표 방식과 달리 당시에는 유권자들이 받은 투표 용지에 지지하는 후보자의 이름을 직접 붓을 들고 한자 혹은 히라가나 및 가타카나로 적어야 했습니다. 타이완인의 식자율이 높지 않았던 당시로서 타이완인에게 결코 유리한 투표 방식은 아니었죠.
1935년 11월 22일 열린 타이완 최초의 선거는 이날 오후 6시가 되어 끝이 났습니다. 공교롭게도 각 지방에서 모두 90%가 넘는 높은 투표율을 보였는데요. 일정 정도 이상의 자본을 소유한 사람에게만 제한된 선거였기에 실제 투표 가능한 유권자 수가 상당히 적었다는 한계는 있지만, 지방 선거를 주장해온 타이완지방자치연맹의 입장에서는 총독부의 공식적인 허가 하에 첫 투표를 실시했다는 점에서 일정 부분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당시 지방자치연맹 상무이사였던 양자오자(楊肇嘉)는 이번 투표에 대해 후보자들의 뇌물선거 없이 유권자 개개인의 자유롭고 비밀스러운 투표로 무사히 선거가 진행되었으며, 선거 전 문맹자들에게 강습을 해 선거에 임할 수 있도록 했다며, 이번 선거를 통해 절반의 민의를 쟁취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럼에도 총독부와의 타협이 있었다는 점에서 당시 좌파 지식인들은 이들을 적에게 투항한 ‘투항파(投降派)’라고 조롱하기도 했습니다.
투표 결과, 다수의 지방자치연맹 출신의 후보자들은 타이난시, 자이시 등의 선거에서 승리했습니다. 비록 시단위의 의원은 일본인의 당선율이 2% 정도 앞섰지만, 그 하위 행정단위인 가장협희회에서는 타이완인 당선율이 무려 92%나 되면서, 지방자치연맹 출신을 비롯한 다수의 타이완인이 가장 말단의 행정구역에서는 실권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1935년 11월 처음 열린 선거 제도를 시작으로 이듬해 11월에는 주의원 선거가 실시되었고, 4년 뒤인 1939년 11월에는 제2대 시회 및 가장협의회 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Rti 중앙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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