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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식민치하의 타이완 직업여성들

  • 2023.08.22
대만주간신보
2022년 9월에 출판된 의 표지. - 사진: 보커라이(博客來)

최근 타이완의 일제시기 역사 관련 연구서적이 출판되었습니다. 바로 타이완 여성사 연구를 대표하는 학자인 여우젠밍(游鑑明)의 연구물로, 제목은 ‘일본 식민 하의 그녀들(日本殖民下的她們)’입니다. 이 책은 여우 교수가 자신이 박사논문을 쓰는 동안 인터뷰한 일제시기를 겪은 타이완 여성들의 말과 글을 모아놓은 책으로 당시 문헌과 사진, 광고, 보도 등과 함께 과거 식민 치하에서 타이완 직업 여성의 면모를 깊고 솔직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 <대만주간신보> 시간에는 갓 출판된 따끈따끈한 책을 한국 청취자들에게 소개하는 시간 갖도록 하겠습니다.  

이 책은 “타이완에서는 직업 여성이 언제부터 있었나?” 라는 간단한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저자는 국내외적으로 타이완의 직업여성에 대해 온전하게 논의한 전문서적이 없는 현실을 직시하고  출판을 결정했다고 합니다. 박사논문을 쓸 당시 가장 먼저 7명의 직업여성을 방문해 그녀들의 취업과정과 직장생활을 중심으로 구술 기록을 한 바 있는데, 과거 산파 일을 했던 여성 인터뷰를 시작으로 점차 인터뷰하는 여성의 직업군을 넓혀갈 수 있었고, 인터뷰 당사자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업무 기억을 공유하고 귀중한 사진이나 증명서 등의 자료를 사심없이 제공했다고 합니다. 

일제시기 당시 중국에서 타이완을 방문한 사람들이 타이완의 직업 여성에 깊은 인상을 받아 적은 기록이 있을 만큼 1930년대 타이완 사회에서 여성들은 공무원 교사, 노동자, 점원, 이발사 등 각종 사회 영역에서 직업인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중국인 장캉후(江亢虎)가 쓴 <대만여행추기(臺游追記)>에 따르면 1934년 그가 타이완을 방문해 목격한 직업여성들, 예를 들어 버스 안의 여성 매표원이나 공장의 여공, 고등여학교내 여교사 등에 주목했다고 합니다. 동시대에 중국에서는 잘 볼 수 없었던 사회 풍경이었나봅니다. 해방 이후 1947년 <타이완신생보(臺灣新生報)>라는 신문에서는 ‘타이완여자만담(漫談臺灣女子)'이란 글을 통해 타이완 여성의 취업 현황에 대해 논했고, 같은 신문의 ‘타이베이 여성 직업 조감(臺北婦女職業鳥瞰)'에서는 타이완에서의 여성 취업자 수가 중국 내 다른 도시보다 높다고 지적하며 타이완 여성의 활약이 중국 전역 중 모범이라고 언급합니다. ‘타이완의 직업 여성(臺灣的職業女郎)’이란 글에서 한 중국 출신 저자는 “우리가 아무리 일본을 미워해도 이렇게 여성들 한명 한명이 직업을 갖도록 하는 방법은 합리적이고 좋다”라고 평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외성인의 관점에서 타이완 여성의 취업률이 높은 것을 신기해했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저자는 51년간의 일본 식민통치 기간은 항상 변방에 있던 타이완 여성들이 상당한 사회적 충격과 변환을 맞이한 시기라고 정의하며, ‘현대적 여성’이란 기조가 보편화된 시기라고 설명합니다. 물론 식민지 사회에서 교육정책은 차별과 불공평을 당연히 내포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일본 식민정부의 여자교육정책이 타이완에 신여성(新女性), 즉 새로운 여성상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고 분석합니다. 물론 식민정책에서 타이완 여성들이 직면했던 문제는 상당히 복잡합니다. 타이완의 기존 풍습, 경제요소, 전통유교관념 등이 여성의 현대화에 걸림돌이었고, 직업여성을 들여다보려면 일본 식민지 정부뿐만 아니라 당시 타이완 유지층들의 태도도 관건입니다. 제도가 닿지 못하는 곳에서의 타이완의 고유한 풍습을 변화시키는 것은 피식민자 당사자들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여교원, 여의사, 산파, 간호사, 여공 등 다섯 가지 직종의 일제시기 직업여성을 탐구합니다. 

여교원/여교사

'교육'이라는 직업의 선봉에 있는 여성들은 불완전한 현대사범교육을 받았습니다. 식민정부가 여사범전문학교를 설립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시기의 여교원은 고등여학교 부설 교사반이나 단기강습반 등에서 왔습니다. 인종과 성별의 차이로 인한 불평등한 대우로 타이완 여교사들을에 대한 대우는 교원급여를 비롯해 일본인 남·여교원들 보다도 못하고 타이완 남교사보다도 못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저자는 이 책에서 당시 공학교 여교사의 평균임기가 2~4년임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임기가 길지 않았던 것은 주로 교통편이나 가정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사회적으로 불평등한 대우와 가정이라는 걸림돌이 있었음에도 ‘여교사'라는 직종은 당시 타이완 여성들에게 선망받는 직업이었다고 합니다. 적어도 일본 식민정부에서는 일반 민중들의 풍속을 바꾸고 일본어를 가르치는 교육 사업을 적극적으로 진행했던만큼, 이를 행할 여성교원이 필요했고, 타이완 여성은 선생으로 일하며 식민정부로부터 주목을 받았을뿐만 아니라 스스로 독립적인 공간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결혼에 자주권을 쟁취하거나 현대화된 결혼제도를 택해 과거 전통적인 가정의 틀 안에서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여의사

(물론 요즘에도 그렇지만) 일제 식민치하에서 여의사가 되기는 여교원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의학교에 입학하기 전 이과에 흥미를 가지고 자질을 갖추어야 하지만 오늘날과 달리 식민정부는 여성에게 의학 교육을 않았기 때문입니다. 의사가 되려는 여성은 타이완 국내에서는 길이 없었기에 반드시 외국으로 나가 의학교육을 받아야 했습니다. 유학에는 재정적 지원이 절대적이므로 당시 절대다수의 의과생은 부잣집 출신에 의사 집안 출신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렇게 가정에서의 동의과 지원이 있어야만 여성이 유학을 통해 의사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외국에서 학업을 마친 후 예비 의사가 된 타이완 여성들은 대부분 귀국하여 가장 먼저 큰 병원에서 무급 조수로 일하거나 시골 병원에 머무는 등 풍부한 임상 경험을 얻은 후에야 개업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여성이 의사가 된다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사회적 사건이었습니다. 흥미롭게도 당시 여의사들은 자유연애를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 상류층 가정과 가정끼리 만나 결혼을 약속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타이완의 전문직 유명인을 수록한 <타이완인사감(臺灣人士鑑)>에서도 여의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의사는 다른 직업여성들에 비해 지지와 격려를 받는 직업이기 때문에 성별이나 인종의 장벽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산파

전통적으로 '산파'라고 하면 다들 나이가 많고 빈곤한 노파를 연상하지만, 일제시기 여성의 직업 중 하나로 소개하는 산파는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새로운 스타일의 산파입니다. 일본 식민정부는 왜 젊고 새로운 산파를 양성하려고 했을까요? 일찍이 메이지유신 시대에 일본은 부국강병의 정책에 발맞춰 아기의 생명과 신세대의 건강을 중시하며 산파학교를 설립하여 산파인재를 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식민정부는 타이완을 통치할 때도 산파 개혁 정책을 도입했습니다. 그러나 일본과 달리 타이완 산파 교육은 정식학교가 아닌 공·사립병원 부속 산파양성소나 지방의 전통 산파강습회 등에서 실시했습니다. 비록 이같은 단기속성 훈련방식을 채택하더라도 상당히 많은 여성들이 몰려들어 산파양성소의 시험경쟁이 격렬했다고 했습니다. 산파는 가내 부업이 아닌 부러운 정규직으로 1930년대 여교원을 넘어 섬 전체에 보급됐습니다. 당시 소위 ‘신식 산파’는 무면허 전통 산파와는 달랐습니다. 전통 산파는 보통 배꼽을 끊는 작업만 하고, 출생아 및 부인에 대해서도 단순 간호만 했지만, 새로운 산파는 산모에게 올바른 출산과 출산 후 조리 개념을 제공하고 현대적인 의료 및 건강 지식을 가르쳐 타이완의 출산과 위생 문화를 변화시켰습니다. 그래서 산파도 대부분 공립학교 출신이며, 면허를 취득한 후 그녀들의 이미지나 사회적 지위가 크게 진흥되었다고 합니다.  다만 지금과 달리 산파들은 대부분 전용 진료실 없었기 때문에 산 넘고 물 건너 산모의 집에 가는 등 그 길은 꽤 험난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산파들이 이처럼 민가를 자주 드나었기 때문에 업무를 하며 쌓은 인맥과 명성으로 전후 타이완에서 정계에 진출하기도 했다는 사실입니다. 

간호사

간호사도 일제시기 타이완 여성이 많이 가진 직업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간호사 역시 식민정부는 공식적으로 간호학교를 설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공립 병원과 교회 병원에서 배양되었지만 타이완의 의료 사업이 나날이 발전함에 따라 간호사의 수가 심각하게 부족해지자 소규모 사립 병원의 의사 조합도 간호사 양성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중일전쟁 기간에 이르자 간호교육을 정식으로 받지 않고도 단기간 간호 훈련을 받아 중국 대륙에 건너가 일본군을 간호하는 타이완 간호사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상대적으로 공립 병원에서의 실무 실습은 엄격했기 때문에 공립 병원을 졸업한 간호사는 시험을 거치지 않고 바로 간호사 면허를 취득할 수 있어 여성들의 입시 경쟁도 치열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간호사가 되었지만 간호사의 병원 이동률은 여교사의 학교 이동률보다 높았다고 합니다. 심지어 어떤 타이완 간호사는 높은 임금을 받고 중국 본토에 있는 병원에 일하러 가기도 했습니다. 산파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낮은 사회적 지위와 긴 노동 시간, 안전하지 않은 공중 보건 환경에 노출되어야 했기 때문에 간호와 산파 이중 면허를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산파로 전업했다고 합니다.    

여공 

1933년 이전까지 일본 식민정부는 타이완을 공업발전을 위한 지역으로 상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타이완에서는 주로 농산가공업 분야의 작은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필요했습니다. 1933년 이후 소위 ‘공업'이 타이완 발전에 중추가 되면서 공장의 규모와 수량은 증가했고, 그에 맞춰 여공들도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공에 대한 임용조건에는 반드시 건강한 신체를 갖추어야 한다는 규정 외에 교육 정도와 연령 제한 등의 규정이 있으며, 규모가 큰 관영 공장은 일본어 능력과 일반적인 시사 관념을 시험했다고 합니다. 관영 대형 공장들의 경우 여공들의 급여와 대우는 고정급여 외에도 초과근무수당 상여금과 위로금 등 출산휴가·수유기간까지 정해져 있었지만, 타이완 여공들은 같은 직급의 일본인 여공이나 타이완 남공들에 비해 낮은 임금을 받고 있어 인종과 성차별은 만연했습니다. 근무시간 및 휴가에 관한 공장별 규정은 서로 일치하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근무시간이 상당이 길었으며, 임금과 노동시간 문제, 공장 관리의 위험함, 위생 환경 관리 미비로 인한 타이완 사회 운동과 노동자들의 파업 운동에도 여공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당시 14건의 노동운동 중 7건이 여성 노동자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들의 주요 요구는 사측의 임금과 노동시간 개선이었습니다. 남아선호사상 아래서, 어린 소녀공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희생하여 학업을 포기하거나 심지어 결혼 임금으로 자신의 부모님을 뒷바라지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자신의 가정에 경제적인 보탬이 되게하는 것뿐만 아니라 일제시기 타이완 여공들은 일제 시대의 타이완의 공업 성장에 적지 않은 공헌을 했습니다. 

저자는  무려 60여 명의 타이완 여성을 직접 인터뷰해 당시 직업여성들이 몸소 겪은 취업 과정, 업무 환경, 성별이나 민족에 따른 권력관계를 더욱 세밀하게 관찰했습니다. 예를 들어, 당시 산파나 간호사가 되기 위해서는 훈련을 받을 수 있는 교육기관에 입학해야 했는데, 경쟁이 매우 치열해 입학난을 다룬 보도가 실제 맞는지, 지원자 수와 합격자 수가 실제로 어떻게 되는지 검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터뷰 대상자는 민족에 따라 차별이 있었다고 지적했는데, 이 점은 당연히 식민정부가 남긴 문헌 기록에는 드러나지 않는 사실입니다. 또한 취업상황에 대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여교원이나 간호사, 여공들의 근무연수가 길지 않은데, 인터뷰를 통해 그 사정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업무 이외의 결혼생활, 가족관계나 가정 생활과 같은 가치관이 그녀들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 또한 취업에 대한 사회적인 통계에는 전혀 기록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오랫동안 경직된 성 규범은 남성에게 고도의 사회권력을 향유하게 하고 동시에 사회적 책임과 가족 부양 임무를 부여하는데, 여성들을 인터뷰해보면 당시 취업한 직업 여성은 자신의 대인관계를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여성이 가정을 부양하기도 하는 등, 가정과 사회에서의 여성의 위치를 전복시켰습니다. 물론 기억의 단절이라거나 허위, 과장 등 불확실한 정보가 구술을 통해 발설될 수 있지만, 구술을 통해서만 찾을 수 있는 답임은 분명합니다.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프로그램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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